1793년 방데 반란의 영웅으로, 일부 사람들에게 '푸아투의 성자'라 불리던 루이 드 레스큐어 후작(Marquis de Lescure). 그는 동시대인들에게 절제·용기·경건의 모범으로 여겨졌으며, 젊은 나이에 전사한 뒤 진정한 영웅적 지위를 얻은 카리스마 넘치는 인물입니다. 상징이 될 인물을 찾던 루이 18세는 왕정복고기에 방데 지도자들에게 영예를 돌리기 위해, 로베르 르페브르에게 맡겨진 이 그림을 포함해 퐁트네 전투의 신화적 장면을 담은 연작을 제작하도록 했습니다.
방데 군의 영웅, 루이 드 레스큐어
루이-마리 드 살그(Louis-Marie de Salgues), 레스큐어 후작은 푸아투(Poitou)의 귀족 가문 출신입니다. 사관학교 학생 시절부터 엄격한 경건함과 박식함을 보여주었으며, 인문주의자였던 그는 혁명의 새로운 사상에 대한 맹렬한 반대자였습니다. 왕의 바렌 도주 실패 이후 망명을 택했지만, 곧바로 프랑스로 돌아와 1792년 8월 10일 튈르리 궁에서 왕을 지키려는 헛된 저항에 참여했습니다. 이후 파리의 혁명적 소란에서 물러나 푸아투의 클리송(Clisson)으로 은거했습니다.

1793년 방데에서 반란이 일어나자, 그는 사촌인 라 로슈자켈랭 씨에게 농민군을 이끌 것을 권유했습니다. 자신은 클리송에 남았다가 공화파에게 가족과 함께 체포되어 브레쉬르(Bressuire)에 수감되었으나, 방데군의 진격 덕분에 석방되었습니다. 이후 그는 방데 반란의 주요 지도자 중 한 명이 되었습니다. 농민들은 전투에서 검을 휘두르고, 권총을 장전할 새도 없이 '블루스(공화파)'를 몰아붙이며 도망치라고 외치는 이 남자의 침착함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고 전합니다. 그는 낭트까지의 승리 행진에 동참했으나, 1793년 10월 15일 마인츠 군대를 상대한 라 트랑블레 전투의 참패 순간, 도망치는 방데 병사들을 규합하려다 머리에 중상을 입었습니다. 가톨릭군은 이틀 뒤 숄레에서 완전히 격퇴되었지만, 그는 간신히 루아르 강을 건널 수 있었습니다. 결국 1793년 11월 4일, 에르네(Ernée)와 푸제르(Fougères) 사이 레 베스나디에르(Les Besnadières)로 이동하던 마차 안에서 27세의 짧은 생을 마감했습니다.
정치적 메시지를 담은 작품
왕정복고 과정에서 방데의 지도자들은 다시 명예를 회복했고, 유명 초상화 화가 로베르 르페브르(Robert Lefèvre)는 레스큐어 씨의 그림 제작을 의뢰받아 1818년에 완성했습니다. 작품의 의도는 순전히 정치적이었습니다. 일부 왕당파 영웅들을 추앙함으로써 공화정과 제정의 서사를 잊게 만드는 것이 목표였습니다. 루이 18세는 1816년 방데 지도자들의 초상화 연작을 의뢰했고, 이 작품들은 팔레 드 생클루(Palais de Saint-Cloud)에 설치되기 전 살롱에서 대중에게 전시되었습니다. 정치적 성격이 뚜렷한 이 그림들은 1830년 혁명 이후 루브르 박물관 보관 구역으로 옮겨졌고, 1870년에야 대중에게 공개되었습니다. 현재는 숄레 미술관(Musée de Cholet)에서 관람할 수 있습니다.
선택된 장면: 용기와 경건
화가가 선택한 장면은 방데 진영의 특징이자 복고 왕정이 내세운 두 가치, 즉 용기와 경건을 동시에 드러냅니다.
장면은 1793년 5월 25일 퐁트네 전투에서 가져왔습니다. 방데군은 며칠 전 같은 장소에서 샬보(Chalbos) 장군의 군대에게 패배했지만, 재편성과 증원 끝에 승리의 역습을 개시하고 반군의 '마스코트'가 된 대포 마리-잔느(Marie-Jeanne)를 되찾았습니다. 전투 중 레스큐어의 병사들이 주저하는 듯 보이자, 그는 적을 향해 홀로 전진했습니다. 공화파의 포도탄이 그의 등자를 부러뜨렸습니다(작품 속 디테일로 표현됨)! 농민들이 그와 함께 돌진했지만, 갑자기 십자가 앞에 멈춰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그림 배경에서 왼쪽 아래의 전사가 이를 가리킵니다). 뷔제(Monsieur de Beugé) 씨가 다시 돌격을 재촉하려 할 때, 레스큐어는 "아니오, 기도하게 두세요. 그들이 더 잘 싸울 것입니다!"라며 그를 말렸습니다. 바로 이 순간, 레스큐어는 손과 눈을 하늘로 향해 농민들의 승리를 비는 기도에 동참하는 모습으로 그려졌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