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후 재판은 종종 승전국이 패전국을 압박하고 휴전 이후에도 전쟁을 계속 이어가기 위한 도구로 활용되어 왔습니다. 이번 글에서는 그 대표적인 사례인 뉘른베르크 재판을 좀 더 깊이 있게 살펴보겠습니다.
승자의 재판으로서의 뉘른베르크
뉘른베르크 재판은 법적으로 여러 가지 문제점을 안고 있었습니다. 국제재판소라는 이름 아래 실제로는 승자가 패자를 심판하는 전형적인 '승자의 재판'이었고, 규모가 너무 커져 기존 방식으로는 처벌할 수 없게 된 과거의 범죄를 단죄하기 위해 새로운 법률이 만들어졌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절차는 법의 근본 원칙 중 하나인 죄형법정주의, 즉 법 불소급 원칙을 무력화하는 법적 모순을 낳았고, 이후 세워질 세계 질서에 위험한 선례를 남겼습니다.
왜 하필 뉘른베르크였는가
제2차 세계대전에서 제3제국은 미국, 소련, 영국으로 구성된 연합국에게 패배했고, 연합국은 뉘른베르크에 국제군사재판소를 설립했습니다. 뉘른베르크가 선택된 것은 상실적 가치 때문이었습니다. 이 도시는 제3제국을 상징하는 도시 중 하나였고 나치 독재의 상징이기도 했습니다. 더욱이 1935년 나치당 제7차 전국대회에서 “독일 혈통과 명예 보호법” (RGBl. I S. 1146), “제국 시민법” (RGBl. I S. 1146), “제국기법”이 공표된 곳이기도 했습니다. 이 세 법률은 세계적으로 '뉘른베르크법'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승전 4개국이 만든 법정
연합국이 뉘른베르크에 설치한 군사재판소는 세계 앞에서 국제적이고 공정하며 중립적인 법원으로 내세워졌지만, 구성원은 오직 전쟁 승전국 인사들뿐이었고 사실상 전형적인 승자의 재판소로 기능했습니다.
프랑스, 영국, 미국, 소련이라는 4대 승전국은 재판소를 조직하면서 각국이 주심 판사 1명과 보조 판사 1명씩을 임명하고, 검찰관 2명을 지정해 제3제국의 전범들을 심판하고 처벌하는 임무를 맡겼습니다.
정치극장이 된 법정
처음부터 뉘른베르크 법정은 정치적 재판의 성격을 드러냈습니다. 정의를 실현하려는 국제재판이라기보다, 법정이라는 무대에서 전쟁을 계속 수행하려는 승자의 재판에 가까워 보였습니다. 다만 피고인이 사인 변호인을 선임하지 않을 경우 직권 변호인(ex officio)의 조력을 받을 권리는 인정되었습니다. 그러나 혐의의 규모와 범위를 고려하면 변호인의 몫도 결코 만만치 않았고, 전후를 내다보면 전직 나치 수뇌부의 변호 경력은 커리어에 결코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 분명했습니다.
그럼에도 재판 자체는 일정한 절차에 따라 진행되었고, 전 세계의 시선이 그 법정에 집중되어 있었습니다. 모두가 판결을 기다렸지만 무죄나 관대한 처분을 예상하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뉘른베르크에 대한 논의가 시작되기도 전에, 재판 준비가 시작되기도 전에 이미 결과는 정해져 있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다만 국제적인 쇼를 연출하고 형식을 갖춘 재판을 수행해야 할 필요가 있었던 것입니다.
어떤 법으로, 어떻게 처벌했는가
재판의 결과만큼이나 피고인들에게 내려진 혹독한 형량도 놀랍지 않습니다. 놀라운 것은 그 형량에 이르는 방식이었습니다. 뉘른베르크에서는 당시 독일에서 시행되던 법률이 적용되지 않았습니다. 제3제국의 법체계상 나치의 행위는 완전한 합법이었기 때문입니다. 대신 미국, 프랑스, 영국, 소련의 군사법전이 동원되었고, 각 법전에는 나치가 전쟁 중 저지른 범죄에 대한 처벌 규정이 존재했습니다. 그러나 법전마다 같은 범죄에 대한 형량이 서로 달랐고, 그 특수한 정치적 상황에서 어느 형법을 적용하느냐는 막대한 정치적 의미를 지녔습니다. 미국은 자국 규정의 적용을 꺼렸고 소련도 소련법 적용을 원하지 않았으며, 프랑스는 나치 전범들이 법적 지위를 박탈당한 무법자(outlaw)로 처리되기를 바랐습니다.
결국 독일 전범들을 조속히 재판하고 처벌해야 한다다는 절박한 필요성 앞에서 특히 독창적인 '대안적' 해결책이 착안됩니다. 해적행위를 규율하는 국제법 규범을 차용해 나치 전범들을 hostis generis humani, 즉 '인류의 적'으로 규정한 것입니다. 이 원칙을 토대로, 전통적 방식의 처벌로는 비례성이 성립하지 않을 만큼 거대해진 과거의 범죄를 단죄하기 위한 새로운 법률이 만들어졌습니다.
'반인도적 범죄'의 탄생과 소급적용의 딜레마
이렇게 하여 '반인도적 범죄(crimes against humanity)' 개념이 탄생했고, 그 범죄를 저지른 자들을 기소하고 처벌하기 위한 규범의 소급적용이 확립되었습니다. 반인도적 범죄는 1946년에 탄생했지만 누구에게나 적용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적용 대상은 패전자들이었고, 먼저 뉘른베르크에서, 그리고 이어서 도쿄에서 적용되었습니다.
이러한 규범의 소급적용, 즉 해당 행위들이 범죄로 규정되기 이전에 저질러진 행위까지 소급하여 처벌하는 것은 윤리적·법적 난제였습니다. 한편으로는 전 세계가 범죄로 인정하는 행위를 처벌해야 할 필요가 있었지만, 그 행위들은 전례 없는 것이었고 범죄가 저질러진 당시 국가의 법과 합법성 안에서 수행된 것이었기 때문에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판단하기 어려웠습니다. 세계는 정의를 요구했고 희생자들은 정의를 요구했지만, 정의와 복수 사이의 경계는 극히 얇고 거의 식별되지 않았으며, 많은 이들에게 법을 깨면서 얻는 정의란 상상하기 어려운 것이었습니다.
결국 새로운 규범을 실효적으로 소급 적용하기로 결정되었고, 그 자리에서 소급되는 신생 국제법을 근거로 나치 전범들이 처벌되었습니다. 이 결정은 중대한 판결들을 낳았습니다. 다수가 사형을 선고받았고, 일부는 종신형을, 또 일부는 20년형과 10년형을 선고받았으며, 재판이 끝난 뒤 무죄를 선고받은 피고인은 극소수에 불과했습니다.
슈판다우 감옥의 수형자들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소에서 10년형에서 종신형까지의 실형을 선고받은 7명은 1947년 슈판다우 감옥으로 이송되어 형기를 살았습니다.
슈판다우의 문을 처음 통과한 이는 15년형을 선고받은 콘스탄틴 폰 노이라트였습니다. 그는 1954년 건강상의 이유로 석방되었고, 2년 뒤인 1956년 세상을 떠났습니다. 종신형을 선고받았던 에리히 레더는 1955년 건강상의 이유로 석방되었습니다. 1956년에는 칼 되니츠가 10년 형기를 모두 채우고 출소했고, 이듬해인 1957년에는 종신형을 선고받았던 발터 푼크가 역시 건강상의 이유로 석방되었습니다.
슈판다우를 떠난 마지막 두 수형자는 알베르트 슈페어와 발두어 폰 시라흐였습니다. 두 사람 모두 20년형을 선고받았고 형기를 마친 뒤 1966년에 석방되었습니다. 끝내 밖으로 나오지 못한 유일한 종신형 수형자는 루돌프 헤스였습니다. 그는 1987년, 감옥 안에서 생을 마감한 그해까지 형기를 보냈습니다.
참고 자료
L. 발디사라, P. 페치노, 『Judge and Punish』
R.H. 잭슨, 『The Tribunal of Humanity – 뉘른베르크 재판의 공소장』
C. 슈미트, 『Answers in Nuremberg』
D. 졸로, 『승자의 정의, 뉘른베르크에서 바그다드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