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차 세계대전 기간 동안 미국과 소련은 순탄하지 않아도 여전히 동맹 관계였습니다. 그러나 나치 제3제국의 최종 패망과 함께 상황은 급격히 바뀌었습니다. 미국 내에서는 양국 간의 대립이 불가피하며, 미국 정책을 새로운 방향으로 전환해야 한다는 인식이 점차 확산되었습니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등장한 트루먼 독트린은 고립주의를 종식시키고 냉전 시대를 여는 신호탄이 되었습니다. 1947년 3월 12일, 해리 트루먼 대통령은 소련과의 대결 구도 속에서 미국 외교 정책의 근본적인 전환을 선언했습니다.
장문 전보(Long Telegram)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직후부터 현행 미국 정책, 특히 대소련 정책의 변화 필요성이 점점 더 분명해졌습니다. 소련의 추가적인 정치적 팽창이 미국의 이익을 위협할 수 있다는 우려가 커져갔고, 실제로 구체적인 조치도 이루어졌습니다. 대표적인 사례가 1945년 11월부터 1946년 6월까지 이어진 이란 주둔 소련군 철수 문제에 대한 미국의 개입입니다. 미국의 이러한 태도는 일종의 소련식 '기정사실화' 정책에 대한 반발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결정적인 계기가 필요했습니다. 그 계기를 만든 것은 주소련 미국 대사관의 외교관 조지 케넌(George Kennan)이 당시 국무장관 조지 마셜(George Marshall)에게 보낸 보고서였습니다. 훗날 유럽 부흥 계획이 '마셜 플랜'이라 불리게 된 것은 바로 그의 이름에서 비롯되었습니다. 1946년 2월 22일 발송된 이 메시지는 '장문 전보(Long Telegram)'로 알려져 있습니다.
조지 케넌은 워싱턴 행정부가 소련의 실제 태도와 목표를 직시하도록 만든 인물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는 소련이 자본주의 진영에 둘러싸여 있다는 위기감을 느끼는 한 장기적인 평화 공존은 불가능하다고 진단했습니다. 같은 해인 1947년 7월, 케넌은 외교 전문지 『포린 어페어즈(Foreign Affairs)』에 익명으로 게재한 글 「소련 행동의 근원(The Sources of Soviet Conduct)」을 통해 훗날 '억제(containment)' 독트린의 토대를 마련했습니다. 그는 소련이 평화롭고 안정된 세계 질서를 침해하려는 의지를 드러내는 곳이라면 어디든 '적절한 역량'으로 맞서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억제 독트린의 서곡
미국 행정부 내부의 논의가 가속화되었습니다. 케넌의 전보는 국무부의 해리슨 프리먼 매슈스(Harrison Freeman Matthews)에 의해 각서 형태로 정리되어 1946년 4월 1일 부처 간 위원회에 전달되었습니다.
훨씬 더 중요하면서도 비밀에 부쳐진 것은 1946년 9월 24일 트루먼 대통령의 고문 클라크 클리포드(Clark Clifford)가 작성한 보고서였습니다. 두 문서에서 도출된 결론은 명확했습니다. 대소련 외교적 조치가 실패할 경우 군사력의 사용도 불가피할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언어야말로 권력 정치를 이해하는 자들만이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한편 소련의 팽창을 저지하기 위해서는 특히 유럽 국가들에 대한 충분한 경제적 지원이 필요하다는 점도 함께 인식되었습니다.
그리스와 터키 문제
실제로 지중해 지역에서 경제 지원의 필요성이 곧 대두되었습니다. 영국이 그리스와 터키에 대한 지원에서 철수할 수밖에 없게 된 것입니다. 영국은 전쟁의 후유증을 감당하기에도 벅찬 상황이었습니다. 미국은 이러한 상황에서 약화된 그리스에서 공산주의 세력이 승리할 경우, 그 '감염'이 터키를 포함한 유럽과 중동의 다른 국가들로 번질 수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이른바 도미노 이론이었으며, 딘 애치슨(Dean Acheson) 국무차관이 그 지지자 중 한 명이었습니다. 그는 1947년 2월 다음과 같이 경고했습니다.
"그리스, 터키, 이란 또는 중동·지중해의 어떤 국가에서 공산주의가 승리하면, 유럽 전역의 친서방 정부들이 빠르게 붕괴될 수 있습니다. 세계 육지의 4분의 3과 세계 인구의 4분의 3을 러시아가 통제하게 된다면, 그것은 미국에 실질적인 위협이 될 것입니다."
따라서 그리스와 터키 지원에 미국이 개입하는 것은 미국의 안보 이익에 부합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로부터 1년 전인 1946년 2월 27일, 트루먼 대통령과 국무장관 조지 마셜, 국무차관 딘 애치슨이 의회 대표단과의 회담에서 세계가 두 강대국의 지배 아래 놓였다는 점이 확인되었습니다. 이러한 양극화는 아테네와 스파르타, 로마와 카르타고의 시대 이후 처음 있는 일이었습니다. 소련의 위협이 얼마나 현실적으로 받아들여졌는지는 1948년 11월 24일 트루먼 대통령이 승인한 국가안전보장회의(NSC) 보고서에서 잘 드러납니다. 이 문서에 따르면 소련은 6개월 이내에 카이로에 이르는 중동 전역과 유럽 대륙을 점령할 능력을 갖춘 것으로 평가되었습니다.
트루먼 독트린의 탄생
해리 트루먼은 영국의 철수로 남겨진 공백을 미국이 메워야 한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는 의회에 양국에 대한 4억 달러 규모의 지원을 요청했습니다. 1947년 3월 12일, 그는 의회 연설을 통해 이 상황을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이 제공했던 지원, 즉 일종의 '평화에 대한 투자'에 비유했습니다. 흥미롭게도 트루먼은 소련을 직접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이 문제를 민주주의와 전체주의 간의 대립으로 규정했으며, 미국은 "무장 소수세력의 정복 시도나 외부의 압력에 저항하는 자유로운 국가들을 지원해야 한다"고 밝혔습니다.
미국 대통령의 판단은 타당했습니다. 그리스, 그리고 아마도 터키마저 소련의 세력권에 편입된다면 소련은 지중해로의 자유로운 접근권을 손에 넣게 됩니다. 단호한 조치를 취하지 않았더라면 어떤 일이 벌어질 수 있었는지의 사례로 트루먼은 폴란드, 루마니아, 불가리아 등 중동부 유럽 국가들에 전체주의 체제가 강요된 현실을 들었습니다. 동시에 당시로서는 유럽의 이 지역에서 소련의 팽창을 막을 뚜렷한 방법이 사실상 없다는 점도 인정되고 있었습니다.
새로운 정책의 결과
트루먼 독트린은 사실상(de facto) 중동을 미국 이익에 전략적으로 중요한 지역으로 인정하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이 점에서 훨씬 후대의 카터 독트린과 비교되기도 하지만, 후자가 더 급진적인 성격을 띠었습니다. 트루먼 독트린은 미국의 고립주의 노선(먼로 독트린)과 결별하는 전환점이었습니다. 미국이 유럽의 정세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게 된 것입니다. 그것도 두 차례의 세계대전 때처럼 비상사태에 한정된 개입이 아니라 상시적인 개입이었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이 독트린은 미국 내에서조차 비판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모든 것은 그리스와 터키에 대한 지원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이후 몇 년간 미국의 활동 범위는 훨씬 더 많은 국가로 확대되었습니다. 트루먼 행정부 정책의 핵심 요소는 물론 유럽 경제 재건 계획, 즉 마셜 플랜이었습니다. 그 목표 역시 서유럽에서의 공산주의 팽창을 저지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미 그 무렵에는 소련의 압력 때문에 이 계획을 중동부 유럽 국가들까지 확장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이 분명해져 있었습니다.
소련의 반응
마셜 플랜과 트루먼 독트린 자체는 소련, 특히 이오시프 스탈린과 그의 유럽 구상에 심각한 위협이 되었습니다. 새로운 미국 정책은 그들의 계획에 실질적인 위협이었던 것입니다. 이에 소련은 서유럽에서 진행되던 통합 과정을 무산시키려 했고, 프랑스와 이탈리아의 공산당 세력까지 동원하려 했습니다. 코민포름(Kominform)이 창설된 것도 바로 이 시기였습니다. 트루먼 독트린은 무자비하게 공격받았으며, 소련과의 전쟁을 도발하려는 시도로 규정되었습니다. 초기에는 관심을 보였던 마셜 플랜 역시 공격 대상이 되었는데, 소련의 입장에서는 그것이 독트린 실행의 한 요소였기 때문입니다. 소련 언론은 트루먼 대통령을 향해 인신공격성(ad personam) 공격까지 감행했습니다.
소련 지도부의 이러한 신경질적인 반응은 오히려 해리 트루먼이 미국의 대유럽 정책을 급진적으로 전환함으로써 정확히 요점을 찔렀다는 사실을 보여주었습니다. 냉전의 수십 년 동안 미국은 소련의 팽창주의적 성향을 성공적으로 억제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 검증된 전략은 언제든 다시 활용될 수 있다는 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