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이야기

봉샹의 용서 – 다비드 당제르가 새긴 방데 장군의 기념비

봉샹의 용서 – 다비드 당제르가 새긴 방데 장군의 기념비
‘봉샹의 용서(La Clémence de Bonchamps)’는 방데(Vendée) 지역의 지도자를 기리는 무덤으로, 역설적이게도 그의 적이었던 공화파 군인의 아들이자 조각가 다비드 당제르(David d'Angers, 1788~1856)가 19세기에 제작했습니다. 화해의 상징인 이 작품은, 공화파 군인의 아들이 내리는 망치질 아래 하나의 대리석 덩어리가 왕당파 장군의 찬가로, 나아가 자애와 인류애의 승리를 노래하는 인본주의의 기념물로 탈바꿈한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봉샹 후작, 방데의 장군

샤를 멜키오르 아르튀스, 봉샹 후작(Charles Melchior Artus, Marquis de Bonchamps)은 1760년 앙주 지방의 쥘바데이(Jurvadeil)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인도에서 복무한 경력을 지닌 군인으로, 1789년 프랑스 혁명이 발발할 당시 왕립군에 복무 중이었습니다. 혁명 이후 그는 바론니에르(la Barronnière) 영지로 피신했고, 1793년 봉기한 농민들이 그를 찾아와 부대의 선봉에 서 달라고 간청했습니다. 봉샹은 개인 재산의 일부를 투자하여 소규모 부대를 무장시켰습니다. 신중한 성격의 장군이었던 그는 여러 차례 공화군과 맞섰지만, 운이 항상 그의 편에 서지는 않았습니다.

1793년 10월 17일, 봉샹은 숄레(Cholet) 전투에 참전했으나 이 전투는 방데군의 패배로 끝났습니다. 반군은 약 8,000명의 병력을 전장에 남겼고, 봉샹 역시 치명상을 입었습니다. 가톨릭 왕당군은 5,000명의 포로와 임종을 앞둔 장군을 데리고 생플로랑르비예(Saint-Florent-le-Vieil)로 철수했습니다.

패배의 분노에 사로잡힌 방데 농민들은 전사한 동료들을 위해 공화파 포로들을 처형하려 했습니다. 학살이 준비되고 도시가 들끓는 가운데, 그 피에 굶주린 함성은 임종에 이른 봉샹의 귀에까지 닿았습니다. 이 광경에 경악한 그는 마지막 명령을 내렸습니다. “포로들을 용서하라!” 그의 사촌 도티샹(d'Autichamp)은 즉시 말에 올라타, 복수를 실행하려던 자들 사이로 질주했습니다. 자애롭고 뜻밖의 이 명령은 순식간에 도시 전체로 번져나갔습니다.
“감사합니다! 포로들에게 감사를! 봉샹이 원한다! 봉샹이 명령한다!”

이 사건은 방데 전쟁의 역사에서 가장 유명한 일화가 되었으며, 가톨릭 왕당군의 지지자들에게는 십자가 위에서 숨을 거두며 “아버지여, 저들을 용서하소서. 저들이 하는 일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누가복음 23:34)라고 기도한 예수 그리스도의 용서와, 임종의 순간에 적을 용서한 봉샹의 행위 사이에 뚜렷한 평행선을 그리게 했습니다.

장군의 마지막 소원은 존중되었고, 공화파 포로들은 방데군에 대항하지 않겠다는 서약과 함께 풀려났습니다. 봉샹은 10월 18일 세상을 떠났으며, 생플로랑르비예에 안장되었습니다.

그러나 봉샹의 자비는 특별한 보상을 받지 못했습니다. 석방된 공화파 병사들은 자신들을 살려준 이들과 다시 무기를 들고 싸워야 했고, 이 관대한 행위에 대해 언급하지 말라는 엄명까지 받았습니다. 그들은 공화군이 반군의 손아귀에서 자신들을 구출했다고 말해야만 했습니다. 최악의 적에게서 발견된 선을 인정하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봉샹의 용서 – 다비드 당제르가 새긴 방데 장군의 기념비

다비드 당제르의 작품

피에르 장 다비드, 통칭 다비드 당제르(David d'Angers)는 1788년생으로 이 사건에 직접 참여하지 않았습니다. 조각가였던 그는 제1제정 시대에 경력을 시작했고(이후 파리 개선문 프리즈 작업에도 참여합니다), 왕정복고 시대에 활동을 이어가다 파리 미술학교(École des Beaux-Arts)의 교수로 임용되었습니다.

1817년 봉샹 장군의 무덤 제작을 위한 모금 운동이 시작되었을 때, 다비드는 이 사업에 참여하고자 남다른 열의를 보였습니다. 그 이유는 단순했습니다. 바로 그의 아버지가 봉샹의 은혜로 목숨을 건진 5,000명의 포로 중 한 명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그는 1825년 무덤을 완성했고, 당연히 아버지를 구한 바로 그 장면을 주제로 삼았습니다. 임종의 침상에 누워 있던 봉샹이 몸을 일으켜 손을 들어 다가오는 학살을 제지하고, 벌어진 입술로 무덤에 새겨진 문구 “포로들에게 감사를!”을 외치는 순간입니다.

작품의 양식은 완벽하게 신고전주의적입니다. 상처 입은 몸은 영웅적 나체로 숭고하게 표현되었고, 옷의 주름은 순수한 고대 양식으로 처리되었습니다. 반면 얼굴에는 이미 바로크적 낭만주의가 배어 있습니다. 흐트러진 머리카락, 고통으로 일그러진 표정—그 고통은 육체적 죽음의 고통인 동시에, 인간의 잔혹한 행동을 목격한 도덕적 고통이기도 합니다. 벌어진 입술에서 마지막 숨결이 새어 나오는 듯한데, 그 숨결이 떠나감으로써 한 사람의 생명은 끝나고 5,000명의 생명이 구원됩니다.

인류애의 구체화라 불리는 이 무덤은 오늘날에도 생플로랑르비예의 성당에서 만나볼 수 있으며, 복제품은 앙제(Angers)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