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8년 5월 17일, 프랑스 세느강에서 중년 남성의 시신이 발견되었습니다. 주머니 속 서류는 그가 브로니스와프 기넷피우수츠키(Bronisław Ginet-Piłsudski)임을 밝혀주었습니다. 공식적인 사인은 자살이었습니다. 하지만 훗날 폴란드의 초대 원수가 되는 유제프 피우수츠키의 형은 정말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일까요?
폴란드에서는 그의 존재를 기억하는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반면 일본에서는 그를 위해 기념비가 세워졌고, 그는 국민적 영웅으로 추앙받고 있습니다. 피우수츠키 가문의 마지막 남계 후손인 그의 손자 카즈야스 키무라 역시 그곳에 살고 있습니다.
1885년, 브로니스와프와 유제프 피우수츠키 형제
그렇다면 왜 고향에서 브로니스와프는 오늘날까지 동생의 그림자에 머물러 있을까요? 그의 학문적 업적은 '지우크'라는 별명으로 불리던 유제프의 독립운동만큼이나 값진 것이었습니다. 게다가 피우수츠키 형제 중 형인 그는 동생 못지않게 격동적이고 놀라운 삶을 살았으며, 그의 죽음의 정황은 지금까지도 논란거리로 남아 있습니다.
"털 많은 사람들"의 왕
브로니스와프 피우수츠키는 오늘날에도 미스터리한 인물입니다. 생존해 있는 가족들은 형의 운명에 대한 구체적인 사실을 아무도 모른다고 고백합니다. 원래 그는 변호사의 꿈을 꾸었지만, 운명은 그를 민족학자로 이끌었습니다. 유배지에서 만난 레프 슈테른베르크가 그를 설득한 것입니다.
피우수츠키는 1887년 3월, 차르 알렉산드르 3세 암살 음모에 가담한 혐의로 체포되었습니다. 처음에는 사형을 선고받았지만, 결국 형량이 사할린으로의 15년 유배형으로 감경되었습니다. 바로 그곳에서 그는 길략(니브흐), 오로카, 그리고 무엇보다도 아이누 문화에 깊은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마우고자타 스텝카는 이렇게 전합니다.
피우수츠키는 1905년까지 사할린에 머물렀습니다. 그는 현지 부족들, 특히 아이누에게 권위와 신뢰를 얻었습니다. 그는 이 부족의 일원으로 받아들여졌고, 이는 더 깊이 있는 연구를 가능하게 했습니다. 아이누 여성과 결혼하면서 그는 말하자면 자신의 가족을 직접 관찰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털 많은 사람들'이라 불리던 아이누는 그를 심지어 자신들의 왕으로 모셨습니다(물론 공식 칭호가 아닌 별명이었습니다). 그들에게 이는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브로니스와프 피우수츠키는 유배 기간 내내 현지 부족들을 위해 헌신했기 때문입니다. 그가 직접 남긴 말입니다. "나는 그들을 치료하고 두창 예방 접종을 해주었다. 원주민을 위한 학교가 없었기에 읽고 쓰는 법을 가르쳤다. 나는 그들의 통역관이자 당국 앞에서의 대변인이었다."
아이누의 왕, 브로니스와프 피우수츠키
그는 섬 곳곳을 누비며 여러 학교와 도서관을 설립했고, 행정 규정 초안도 마련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가장 위대한 업적은 아이누어를 멸종의 위기에서 구해낸 것입니다. 1만 단어가 넘는 사전을 편찬했고, 에디슨 축음기용 밀랍 실린더 100개에 부족의 언어와 노래의 소중한 기록을 남겼습니다.
피우수츠키의 미스터리한 죽음
그는 아내 추흐삼마 사이에서 아들 수케조와 딸 기요(1903년생)를 두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딸을 한 번도 만나지 못했습니다. 아내가 둘째를 임신 중이었을 때 그는 일본으로 떠났는데, 부족 당국이 가족의 동행을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당시 여성이 마을을 떠나는 것은 불명예로 여겨졌습니다. 8개월 후 그는 폴란드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19년의 방황 끝에 고향으로 돌아온 브로니스와프의 희망찬 귀환은 쓰디쓴 실망으로 끝났습니다. 크라쿠프에서든 리비우에서든 그는 외면당했습니다. 그의 학문에 관심을 두는 이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는 대학 강단에 서는 꿈을 품었지만 학력이 부족했습니다. 결국 열악한 조건의 여러 직업을 전전해야 했습니다. 전쟁이 발발하자 오스트리아를 거쳐 스위스로 건너갔고, 마침내 파리에 정착했습니다.
또 다시 강요된 유배 생활 속에서 그는 행복하지 않았습니다. 예르지 호치워프스키는 이렇게 기록합니다. "흥분 상태가 무기력과 뒤섞이고, 환희가 우울과 교차합니다. 그의 우울증은 고통스러운 고독에서 비롯됩니다. 그는 곁에 여자가 없다는 사실을 늘 호소했습니다."
사실 우울증의 발작은 이전부터 있었습니다. 브로니스와프 피우수츠키는 극한 상황을 동생보다 훨씬 더 힘들어했습니다. 민족학자의 운명에서 영감을 받은 파베우 고즈린스키의 소설 『아칸』은 그런 발작이 어떠했을지 생생하게 그려냅니다.
그의 호흡은 거칠고 불규칙하게 끊겼다. 의식의 다른 징후는 보이지 않았다. 감정의 흔적도 없었다. 그를 이런 모습으로 본 것은 처음이었다. 마지막도 아니었다. 그는 밖으로 나왔지만 무덤덤해지지 않았다. 패배를 받아들인 사람처럼 보였다.
그의 몸은 가장 깊은 어둠 속에서만 배울 수 있었던 자세로 굳어 있었다. 그는 기억의 홍수로부터 머리를 지키려는 듯 팔에 얼굴을 묻었다. 고통이 최대한 닿지 않도록 몸을 움츠렸다. 마치 처형 전날 밤의 감방에서처럼, 떠다니는 감옥의 갑판 아래서처럼.
브로니스와프 피우수츠키
불안과 공포의 발작, 피해망상, 그리고 시간이 지나며 발병한 것으로 추정되는 기면증까지. 결국 이 모든 것이 그를 자살로 이끌었다고, 적어도 공식 기록들은 말합니다.
그러나 장차 원수가 될 인물의 형이 죽은 정황에 대해 모두가 같은 견해를 갖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이들은 불운한 사고였다고 주장하고, 또 어떤 이들은 제3자의 개입을 의심합니다. 피우수츠키라는 성은 여전히 '지우크'의 혁명 활동과 연결되는 '위험한' 이름이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어떠했을까요? 우리는 아마 영원히 알 수 없을 것입니다.
영감의 출처:
- Paweł Goźliński, 『Akan』, Agora, 2019.
참고 문헌:
- Jerzy Chociłowski, 『Bronisław Piłsudski's duel with fate』, Iskry, 2018.
- Janusz R. Kowalczyk, 『Bronisław Piłsudski – with a phonograph among the Ainu』, Culture.pl (2019년 9월 28일 확인).
- Małgorzata Stępka, 『Bronisław Piłsudski. The fate of the "King of Ainu"』, 『Nowy Dziennik』, 1999년 12월 4~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