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이야기

제1차 세계대전의 전환점, 솜 전투(1916년 7월~11월)

제1차 세계대전의 전환점, 솜 전투(1916년 7월~11월)
1916년 7월부터 11월까지 프랑스 북부 솜(Somme) 지역에서 벌어진 솜 전투는 제1차 세계대전 최악의 참화 중 하나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포슈(Foch) 장군과 더글러스 헤이그(Douglas Haig)가 지휘한 최초의 대규모 프랑코-영국 연합 공세였지만, 참모본부가 기대했던 서부 전선에서의 진격은 이루어지지 못했습니다. 특히 9월 15일 플레르(Flers) 전투에서 약 40대의 전차가 처음으로 투입된 역사적인 순간이 있었지만, 악천후와 병력의 극심한 소진, 미미한 영토 확보에 그치면서 1916년 11월 18일 조프르(Joffre) 장군의 명령으로 공세는 종료되었습니다.

솜 전투의 목적은 무엇이었나?

1915년, 연합군이 주도한 공세들은 물자 부족으로 좌절했다고 총사령부는 판단했습니다. 대포와 포탄 생산량 증가와 맞물려, 장군들은 대규모 포격 준비가 병력 진격의 길을 열어줄 것이라 믿었습니다. 바로 그러한 구상 아래 1915년 12월 6일부터 8일까지 조프르 장군이 지휘하는 프랑스 총사령부가 있는 샹티이(Chantilly)에서 연합국 회의가 열렸습니다.

여러 전선에서 동시에 공세를 펼치자는 구상은 프랑스, 영국, 이탈리아, 러시아 모두에게 공유되었습니다. 동부 전선에서는 러시아군의 총공격이, 이탈리아에서는 이손초(Isonzo) 공격이 계획되었고, 서부에서는 프랑스군과 영국군이 1916년 늦봄부터 초여름 사이 솜 지역에서 대규모 공세를 시작하기로 했습니다. 한편 독일군은 팔켄하인(Falkenhayn)의 영향 아래 소모전 전략을 채택하여 요충지 베르됭(Verdun)을 공격함으로써 프랑스군을 “백지화”하려는 계획을 세웠습니다.

베르됭 전투 발발로 수정된 계획

제1차 세계대전의 전환점, 솜 전투(1916년 7월~11월)
1916년 2월 21일 베르됭 전투가 발발하면서 계획은 크게 흔들렸습니다. 솜 공세는 원래 양측 동맹국이 동등하게 참여하는 프랑코-영국 전투로 구상되었지만, 프랑스는 2월부터 이미 영국의 참여 비중 확대를 요구했습니다. 또한 공격 전선도 크게 축소되어 70km에서 40km로 줄었고, 영국 담당 구역은 28km에 달하게 되면서 솜 전투는 사실상 영국 중심의 공세로 변모했습니다.

작전은 연합군이 통제하는 알베르(Albert) 지역과 독일군이 장악한 페론(Péronne) 주변 사이에서 진행될 예정이었습니다. 목표는 상대적으로 모호했는데, 역사학자 장자크 베커(Jean-Jacques Becker)에 따르면 독일군을 소모시키는 동시에 최종 승리를 가져올 결정적 전투를 추구하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미미한 전진, 치명적인 희생

1916년 7월 1일, 며칠간의 집중 포격 끝에 프랑스군과 영국군이 독일 방어선에 총공격을 개시했습니다. 남부 지역에서 프랑스 제6군은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었지만, 영국군에게는 재앙 같은 결과가 찾아왔습니다. 투입된 12만 명 중 6만 명이 하루 만에 전력에서 이탈했으며, 그중 약 1만 명이 전사했습니다. 수많은 사전 포격에도 불구하고 공격자들은 부분적으로 온전히 보존된 방어선과 독일군의 기관총 화망에 직면했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의 전환점, 솜 전투(1916년 7월~11월)
장기간에 걸친 전투는 크게 세 단계로 나눌 수 있습니다. 7월 1일부터 20일까지의 첫 공세, 7월 20일부터 9월 3일까지의 긴 교착, 그리고 9월 3일부터 11월 18일까지의 일부 진전입니다. 결국 불과 몇 킬로미터의 전진을 위해 영국군은 42만 명, 프랑스군은 사망자만 10만 명이 넘는 총 20만 명의 손실을 입었고, 독일군의 손실도 50만 명을 넘었습니다.

1916년 9월 15일 플레르에서 영국군은 전차를 처음으로 실전 투입했습니다. 많은 전차가 공격선까지 도달하지 못했지만, 도달한 전차들은 눈부신 전진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러나 당시 전차는 여전히 너무 느리고 고장이 잦고 수도 적어, 결정적인 전술적 효과를 내기에는 역부족이었습니다.

몇 달 뒤 등장한 프랑스·독일 전차와 마찬가지로 초기 전차는 시속 6km에 불과한 속도 등 수많은 결함 탓에 심리적 효과가 실질적 효과보다 컸고, 투입된 대부분의 전차는 파괴되거나 포획당했습니다. 전차가 진정한 결정적 무기로 자리 잡기까지는 몇 달이 더 필요했습니다.

1916년 말, 솜 공세는 적 방어선을 돌파하지 못한 채 실패로 끝났습니다. 독일은 여전히 프랑스 북동부를 점령하고 있었고, 세력 균형은 여전히 동맹국 측에 유리했습니다. 더 안타까운 점은 어느 쪽도 결정적 승리가 가능해 보이지 않았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솜 전투, 전환점이었나?

여러 측면에서 솜 전투는 대전(大戰)의 분수령으로 평가됩니다. 게르트 크루메이히(Gerd Krumeich)가 밝혔듯이, 독일 측에서는 베르됭이 군인들의 회고록에 크게 등장하지 않는 반면 솜 전투는 중심적 위치를 차지합니다. 지하 은폐호에서 방어 자세를 취하던 독일 병사들은 프랑스 영토에서 벌어진 전투였음에도 이를 영국 침략자에 대한 조국 방어의 국면으로 인식했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의 전환점, 솜 전투(1916년 7월~11월)
프랑스 측에서는 피에르 르누뱅(Pierre Renouvin)에 따르면 솜의 실패가 일부 낙담을 초래하고 1916년 말부터 시작된 전쟁 피로감을 키웠으며, 이는 1917년에 더욱 강렬하게 표출되었습니다. 영국에게 솜 전투는 1916년 7월 1일 주력 부대로 투입되어 궤멸적인 피해를 입은 자원병 군대의 쇠퇴와, 1916년 초 훈련이 시작된 징집병 군대로의 전환을 의미하는 기점이 되었습니다.

솜 전투는 또한 대전기 프랑코-영국 협력의 중요한 계기이기도 했습니다. 양군 간 관계를 원활히 하기 위해 연락 장교를 점점 더 많이 배치해야 했고, 연락 방식도 서서히 정착되어 갔습니다. 실패와 막대한 인명 손실에도 불구하고 솜 지역에서의 작전은 연합군 지휘부에게 독일군을 격파하려면 협력과 훈련의 획기적 개선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주었습니다. 혹독한 기상 조건과 심각한 전술적 오류에도 불구하고, 이 거대한 물자 소모전은 연합군에게 특히 포병 운용 측면에서 귀중한 학습의 시간이었고, 1918년 최종 승리의 토대가 되었습니다.

솜 전투의 기억

제1차 세계대전의 전환점, 솜 전투(1916년 7월~11월)
솜 전투는 영국인들의 대전 기억에 오래도록 새겨졌습니다. 영국 역사상 가장 피비린내 나는 하루인 공세 첫날은 전투의 치명성을 다룬 수많은 증언을 낳았습니다. 단 두 명의 동료와 함께 독일 방어선에 도달한 스코틀랜드 부대의 한 소위는 “하느님, 나머지 애들은 어디 있는가?”라고 외쳤다고 전해집니다. 마틴 미들브룩(Martin Middlebrook)의 『솜의 첫날 – 1916년 7월 1일』 1984년판에서 저자는 “이 날에서 얻을 수 있는 유일한 선은 영국 병사들이 보여준 넘치는 애국심, 용기, 희생정신이다”라고 지적합니다.

솜 전투는 빠르게 추모되기도 했습니다. 영국 정부의 주도로 건축가 에드윈 루티언스(Edwin Lutyens)가 설계한 티에프발(Thiepval) 기념비가 1928~1932년에 세워졌습니다. 높이 45미터의 개선문 형태를 한 이 기념물에는 솜 전장에서 전사한 73,367명의 영국 및 남아프리카 병사의 이름이 새겨져 있습니다. 매년 약 16만 명의 방문객이 찾는 영국인들의 성지가 된 이곳에는 영국식 규격에 따른 군사 묘지가 인접해 있으며, 계급과 서임에 관계없이 이름들이 균일한 비석에 새겨집니다.

또한 ‘솜 전투 추모 코스’라 불리는 방문 코스가 조성되어, 대전이 풍경에 남긴 흉터를 확인하고 울스터 타워(아일랜드 추모비), ANZAC 추모비(호주·뉴질랜드) 등 솜 전투를 기리기 위해 세워진 주요 기념물들을 둘러볼 수 있습니다.

참고 문헌

- Marjolaine Boutet, Philippe Nivet, 『솜 전투: 잊혀진 대참사(The Battle of the Somme. The Forgotten Hecatomb)』, Tallandier, 2016

- Alain Denizot, 『솜 전투(The Battle of the Somme)』, Poche Tempus, 2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