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차 마른 전투는 1914년 9월 5일부터 12일까지 프랑스 북동부에서 벌어진 전투로, 독일군의 파리 진격을 저지하고 이후 4년간 이어질 '참호전' 시대의 막을 연 결정적 사건이었다. 개전 초기 독일군은 벨기에의 중립을 침해하며 슐리펜 계획에 따라 프랑스군 좌익을 포위하는 작전을 추진했다. 9월 2일, 독일 기병대는 파리에서 불과 25km 거리까지 육박했다. 조프르(Joffre) 장군과 갈리에니(Gallieni) 장군은 상황을 반전시키고 독일군이 수도에 도달하는 것을 막기 위한 계획을 세웠고, 연합군 병력을 전선으로 신속히 이송하기 위해 모든 운송 수단을 동원했다. 특히 '마른의 택시(Taxi de la Marne)'로 불리는 파리 택시의 징발은 이 전투를 상징하는 장면이 되었다.
제1차 마른 전투의 배경
다른 전역의 중요성을 부정할 수는 없지만, 1914년부터 1918년까지 제1차 세계대전의 운명이 갈렸던 곳은 단연 프랑스 전선이었다. 프랑스-러시아 동맹에 대응하기 위해 수립된 슐리펜의 유명한 계획에 따라, 1914년 몰트케는 벨기에를 통과하는 군대의 이동 속도와 규모에 기초해 작전을 설계했다. 이후 루덴도르프는 1918년 3월부터 7월까지 피카르디에서 샹파뉴에 이르는 프랑스 전선에서 다섯 차례의 공세를 감행하며, 미군이 대규모로 참전하기 전에 승리를 거두려 했다. 그러나 7월 18일, 포슈(Foch)의 지휘 아래 연합군은 빌레르코테레에서 처음으로 작전 주도권을 되찾으며 전쟁의 흐름이 바뀌었다.
1914년 8월 러시아군이 동부 전선을 위협하자, 독일군은 차르 군대를 격멸하는 데 전력을 집중할 수 있도록 서부 전선을 최대한 빨리 마무리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이에 따라 1914년 여름 프랑스의 상황은 절망적이었다. 독일군은 벨기에를 침공해 프랑스 북부를 점령한 뒤 8월 29일 솜 강에 도달했다. 조프르 장군은 알자스와 로렌에서 패배한 데 이어 계속 밀려났다. 독일군의 진격에 직면해 비비아니 정부는 9월 2일 보르도로 철수했고, 1870년 포위전의 기억에 떨리던 수십만 명의 파리 시민이 수도를 떠났다. 파리 총사령관인 갈리에니 장군은 끝까지 임무를 수행할 것을 다짐하며 반격을 준비했다. 파리 방어를 위해 모누리(Maunoury)의 제6군을 구성할 10만 명의 병력이 프랑스 동부 전선에서 차출되어 수도 북쪽 우르크 강 서쪽 지역에 배치되었다.
마른 강에서의 프랑스군 반격
9월 3일, 폰 클루크(von Kluck) 장군의 독일 제1군은 파리에서 25km 지점까지 진출해 있었다. 그러나 프랑스 참모부는 독일군이 더 이상 파리를 향하지 않고 남동쪽 마른 강 방면으로 방향을 틀었다는 사실을 파악했다. 독일군은 대규모 선회 기동을 마친 뒤 연합군 좌익을 포위·포획하려는 의도였다. 그러나 이러한 기동은 독일군 우익이 노출될 위험을 안고 있었다.
이틀 후 모누리 장군의 군대는 우르크 강 방면으로 진격했고, 갈리에니의 강한 권고에 따라 조프르 장군은 공세에 나서기로 결심했다. 와즈 강에서 보주 산맥까지 6개 군이 일렬로 전개되었고, 영국군의 지원도 이뤄졌다. 일주일 동안 모(Meaux)에서 베르됭(Verdun)까지 약 300km에 이르는 전선에서 200만 병력이 충돌했다.
9월 5일, 프랑스-영국 연합군이 공세를 개시했다. 이른 오후 모누리의 제6군 병사들은 모 북쪽에서 남진하던 폰 클루크의 군대와 조우했다. 첫날 전투는 전선 동·서 측면에서 기동전 형태로 전개되었고, 그동안 양측의 막강한 화력이 쏟아졌다. 전투 중 프랑스 75mm 야포는 하루에 300발을 발사했다!
마른 전투의 상징, '마른의 택시'
독일군은 서쪽으로 전진해 배후를 위협당하지 않도록 진형을 조정했다. 9월 6일과 7일에는 반격을 감행해 북쪽에서 프랑스군을 압도하려 했다. 연합군은 파리에 본부를 둔 병력의 증원을 요청했다. 모누리 군대가 비트리르프랑수아(Vitry-le-François) 주변에서 포위되는 것을 막으려면 연합군 좌익을 강화하는 것이 필수적이었다. 갈리에니는 2개 연대, 즉 4,000명의 병력을 하룻밤 사이에 전선으로 수송하기 위해 철도는 물론 천 대의 파리 택시를 징발했다. '마른의 택시(Taxis de la Marne)'의 개입은 오늘날까지 프랑스 저항 정신의 상징 중 하나로 남아 있다.
9월 8일과 9일에는 포슈 장군의 제9군이 폰 뷜로(von Bülow) 장군의 독일 제2군의 공격을 맞아 싸웠다. 영국 원정군 부대와 프랑스 제5군 일부는 독일군의 뷜로 군과 클루크 군 사이의 간격을 벌리는 데 성공했는데, 이는 폰 클루크의 서측 이동이 만들어준 돌파구였다.
프란셰 데스페레(Franchet d'Esperey)의 제5군이 이 틈새로 진격했고, 영국군이 9월 9일 마른 강을 도하하며 뒤를 이었다. 9월 10일의 새로운 격전 끝에 독일군은 밀려났다. 포위 위협에 직면한 독일군은 누아용-베르됭 선을 따라 엔 강 방면으로 후퇴해 그 자리를 굳혔다. 그들이 참호를 파기 시작하면서 이제 진지전이 조직되기 시작했다.
대전의 첫 번째 전환점
프랑스-영국 연합군은 동프로이센에서 러시아군과 싸우기 위해 병력을 뽑아간 독일군의 약화된 전력을 활용할 수 있었다. 이로써 그들은 9월 12일 조프르 장군이 전쟁부 장관에게 공식 통보한 '마른의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프랑스의 손실은 8만 명에 달해 매우 막대했다.
2년 후 베르됭에서는 전사들이 독일군을 막아냈다. 마른 전투 이후 전투는 1914년 9월부터 11월까지 이어졌다. 이른바 '바다를 향한 경주' 기간 동안 독일군과 프랑스군은 수아송에서 북해 연안까지, 영국 해협을 향해 서로의 측면을 돌파하려 경쟁했다. 그러나 곧 베르됭으로 상징되는 이동전의 종말과 소모전의 시대가 열리게 된다.
참고문헌
- François Cochet(편), 『우르크에서 베르됭까지: 마른 전투(1914·1918)』 심포지엄 논문집, 14-18 Editions, 2004.
- 피에르 미켈(Pierre Miquel), 『마른 전투』, Tempus,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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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랑스 정부 공식 사이트 'Chemins de mémoi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