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이야기

1944년 르아브르 공방전 (1): 노르망디 해방의 승패를 가른 '큰 교차로'

노르망디에 상륙한 연합군에게 르아브르는 후방과 측면을 동시에 위협하는 골칫거리였습니다. 영국군은 이 요새 항구의 독일 수비군을 강제로 항복시키기로 결심합니다.

지상군 병력이 부족한 상황에서도 신속히 항구를 점령하라는 명령을 받고 존 크로커(John Crocker) 장군이 르아브르에 도착했습니다. 그의 맞은편에는 열성적인 나치 지지자인 헤르만 빌더무트(Hermann-Erich Wildermuth) 대령이 서 있었습니다. 수비대 사령관 빌더무트는 병력이 남아 있는 한 끝까지 버틸 것을 히틀러에게 맹세한 상태였습니다.

르아브르로 가는 길

연합군이 노르망디 해변에 첫발을 내디딘 지 한 달여가 지난 1944년 7월 중순, 수십만에 달하는 병력이 저항하는 독일군과 들판과 노르망디의 도시들에서 격돌했습니다. 루앙(Rouen), 셰르부르(Cherbourg), 캉(Caen)은 수천 명의 민간인과 군인의 목숨을 앗아간 전투 끝에 함락되었습니다.

모든 일이 너무나 빠르게 전개되고 있었습니다. 많은 전략가들은 1944년 안에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으리라 낙관했습니다. 그러나 진격 속도가 지나치게 빨랐던 탓에 곧 보급 문제가 불거졌고, 연료가 바닥난 조지 패튼(George Patton) 장군의 전차부대는 프랑스 도로변에 멈춰 서고 말았습니다.

연합군 사령부는 보급품을 실어 나를 노르망디 해안의 새로운 기지가 절실했습니다. 선택된 곳은 르아브르 항구였습니다. 이 결정은 도시에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하게 됩니다.

르아브르 해방 작전을 맡은 이는 존 크로커 장군이었습니다. 깊은 종교적 신념과 도덕적 소신 덕분에 '정직한 존(Honest John)'이라는 별명을 얻은 그는 과묵하고 신중한 성격으로, 패튼이나 몽고메리처럼 호쾌하고 오만한 장군들과는 정반대 인물이었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세운 영웅적인 전공으로 훈장을 받기도 했습니다.

1940년 당시 그는 전투 전차 운용 분야에서 최고의 전략가 중 한 명으로 평가받았습니다. 1944년 여름, 몽고메리는 캉 점령 작전을 크로커에게 맡겼습니다. 그러나 노르망디 도시의 정복은 말처럼 쉽지 않았습니다. 신속한 함락이 예고됐지만 실제로는 6주와 최소 4차례의 공격이 필요했고, 크로커의 부대는 3,500명이라는 처참한 손실을 감수해야 했습니다.

요새 르아브르, '페스퉁 르아브르'

크로커 장군에게 르아브르 항구 점령 임무가 주어졌을 때, 이 작전은 제한된 물자로 빠르고 쉽게 끝낼 수 있는 정복전으로 구상되었습니다. 그러나 르아브르는 나치 독일 대서양 방벽(Atlantic Wall)의 일부를 이루는 고도로 요새화된 도시, 이른바 '페스퉁 르아브르(Festung Le Havre)'였습니다.

1944년 르아브르 공방전 (1): 노르망디 해방의 승패를 가른  큰 교차로

도시는 다량의 중포로 무장한 수천 명 규모의 수비대가 지키고 있었습니다. 지휘관은 은행가이자 정치인 출신인 헤르만 빌더무트 대령으로, 1930년대 중반부터 나치 정권에 공감해 온 인물이었습니다. 빌더무트는 전투 경험이 풍부한 지휘관이었으며, 1940년 신속하게 진행된 유고슬라비아 침공에서 뛰어난 활약을 펼친 바 있습니다.

전쟁 내내 그의 부지런하고 효율적인 군사 역량은 두드러졌습니다. 히틀러는 1944년 7월 그를 르아브르 수비대 사령관으로 임명하면서,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항구 시설을 파괴하고 요새를 끝까지 지키라고 명령했습니다.

총통과의 맹세를 지키며 죽음까지 싸우기로 결심한 빌더무트 대령 휘하에는, 다가올 전투를 위해 특별히 훈련된 12,000명의 수비군이 있었습니다.

비시 정권과 연합군의 선전을 통해 르아브르 주민들은 6월 6일부터 연합군이 프랑스에 상륙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도시의 일상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습니다. 르아부아즈(Havrais)라 불리는 주민들은 여전히 독일의 통치 아래 있었고, 그 지배가 흔들릴 조짐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6월 12일, 대규모 폭격

1944년 6월 12일, 르아브르는 영국 왕립공군(RAF)의 폭격을 받았습니다. 연합군이 이 독일 요새를 공습한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지만, 이토록 강렬한 폭격은 처음이었습니다.

독일 구축함과 잠수함 여러 척이 정박해 있던 항구 유역이 주요 타격 대상이었습니다. 독일 해군이 상당한 피해를 입었지만, 가장 큰 피해는 도시 지역에 집중됐습니다. 생존자들은 며칠 동안 폭격으로 파괴된 잔해를 치우고 희생된 민간인들의 시신을 수습해야 했습니다.

그렇다면 6월 폭격의 목적은 무엇이었을까요? 연합군이 르아브르에 임박한 상륙을 준비하고 있었던 걸까요? 사실 이번 포격에는 순수한 군사적 목적, 즉 고속 어뢰정 기지의 파괴가 담겨 있었습니다. 이 독일 쾌속정들은 1940년부터 수로에서 영국 해군을 괴롭혀 왔고, 연합군 수송선단에 심각한 위협이 되고 있었기에 그 파괴가 최우선 과제였습니다.

1944년 르아브르 공방전 (1): 노르망디 해방의 승패를 가른  큰 교차로

영국군은 독일 해군 기지를 파괴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그러나 그해 여름, 독일군은 연합군이 항구를 활용하지 못하도록 오히려 항구 시설을 스스로 파괴해 버렸습니다. 폭격 이후 도시 인구의 일부가 피난길에 올랐습니다. 원래 150,000명이던 르아브르의 인구는 이 무렵 50,000명 수준으로 줄어든 것으로 추산됩니다.

총공격 준비

보급 문제가 계속되는 가운데서도 연합군의 진격은 멈추지 않았습니다. 1944년 8월 26일, 파리는 시민들의 환호 속에 해방되었습니다. 그러나 르아브르는 여전히 최우선 목표였고, 도시는 이미 영국군에 의해 완전히 포위된 상태였습니다.

1944년 9월 3일 일요일, 르아브르 북쪽에 위치한 영국 제1군단 사령부에서 중요한 회의가 열렸습니다. 크로커 장군은 영국군과 캐나다군 장교들을 소집해 공격 준비를 지시했습니다. 그가 도시 공략에 투입할 수 있는 병력은 단 두 개 사단뿐이었습니다.

1944년 르아브르 공방전 (1): 노르망디 해방의 승패를 가른  큰 교차로

크로커는 해안 방어선이 비교적 강고하여 해상 공격은 불가능하다고 판단했습니다. 빌더무트와 마찬가지로 그 역시 공격은 북쪽과 북동쪽에서 이루어져야 하며, 그에 앞서 대규모 포격이 선행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폭격은 완벽한 전략처럼 보였습니다. 직접적인 지상전을 최소화하면서 적진에 공포를 심어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모든 정보는 독일군의 한계에 도달했음을 가리키고 있었습니다. 운이 좋다면 단순한 폭격 위협만으로도 수비군을 굴복시킬 수 있을지도 몰랐습니다.

영국군은 프랑스 레지스탕스가 적의 방어 체계를 상세히 기록한 도시 지도를 확보하고 있었습니다. 그 지도가 보여준 것은 철벽의 요새였습니다. 서쪽에는 요새와 포병 진지가, 동쪽에는 참호와 지뢰밭이 펼쳐져 있었습니다. 총 77,000개의 지뢰와 430개의 벙커.

그러나 치명적인 착각도 있었습니다. 정보국은 수비대 병력을 약 8,000명으로 추산했지만, 실제 병력은 12,000명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