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By Rainer Sousa
가톨릭 교회가 하나의 조직으로 자리 잡아 가는 과정에서 교리의 강요와 엄격한 위계질서는 이 기관을 구성하는 근간이 되었습니다. 규칙과 직제 외에도, 천 년의 역사를 지닌 이 종교가 안정을 이루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여러 장치가 있었는데, 그중에서도 파문(excommunication)은 통일성과 보존이라는 원칙을 지키는 데 핵심적인 수단이었습니다.
파문의 의미: '공동체 밖의 사람'
라틴어에서 유래한 '파문'이라는 말은 문자 그대로 "공동체 밖에 있는 자"를 뜻합니다. 이 주제를 다루는 일부 논자들은 파문을 신의 심판에 앞서 내려지는 영적 처벌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고 봅니다. 다시 말해, 파문당한 사람이 곧 지옥행을 확정당한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325년 니케아 공의회의 입장에 따르면, 파문자는 단지 가톨릭 성사를 더 이상 받지 못하게 될 뿐입니다.
이론과 달랐던 현실
그러나 이론적 정의를 벗어나 실제 운용을 들여다보면, 파문은 훨씬 폭넓고 가혹한 결과로 이어졌습니다. 기독교 시대 초기 몇 세기 동안 파문은 교회의 종교적 결정을 어기거나 무시한 기독교 지도자들을 몰아내는 데 널리 동원되었습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파문은 추가적인 제재가 뒤따르게 되는 기준으로 기능하기도 했습니다.
오랫동안 잉글랜드에서는 파문당한 자가 어떠한 소송도 제기할 수 없었습니다. 프랑크 왕국에서는 국왕 피핀 3세(단신왕, 714~768)가 파문된 모든 이들을 즉각 영토에서 추방하라고 명령하기까지 했습니다. 이러한 사례에서 볼 수 있듯, 종교적 처벌은 결국 국가와 교회 사이의 유대를 강화하는 도구로 작동했습니다.
왕권과 부딪힌 파문
한편 교회는 파문을 활용해 여러 왕의 이익에 맞서거나 그것을 견제하기도 했습니다. 특히 중세 후기의 신성 로마 제국은 이런 조치가 가장 빈번하게 이루어진 나라였습니다. 종교와 경제 양 분야에서 막강했던 교회의 영향력은 교회 지도부로 하여금 프리드리히 2세(1194~1250)와 루트비히 4세(1282~1347)의 출교를 선언하게 만들었습니다.
16세기: 종교개혁가들과 헨리 8세
16세기에는 가톨릭 교리에 반발한 저명한 종교 지도자들이 파문되었습니다. 루터교와 칼뱅주의의 창시자인 마르틴 루터와 장 칼뱅은 교황의 인가를 벗어난 기독교 신앙을 전파했다는 이유로 교회에서 축출되었습니다. 같은 세기에는 잉글랜드 왕 헨리 8세가 아라곤의 카탈리나 왕비와의 혼인을 계속하도록 규정한 성사를 무시했다는 죄목으로 파문당했습니다.
현대의 파문: 이념의 상징
오늘날 파문은 이념적 성격을 띤 행위로 변모했습니다. 과거 파문이 수반하던 차별과 여러 폐해는 그 의미가 재편되었습니다. 1962년에는 쿠바의 지도자 피델 카스트로가 자국의 혁명 과정을 이끈 뒤 가톨릭 교회에서 파문되었습니다. 그로부터 한 세대 전인 1950년대에는 후안 페론 대통령도 정부를 비판한 두 주교의 추방을 명령한 뒤 같은 처분을 받았습니다.
최근에는 아일랜드 출신 가수 시네이드 오코너가 교회 지도부로 하여금 이 불명예스러운 '영광'을 내리게 만들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이기도 했습니다. 1990년대 초 미국의 유명 TV 프로그램에 출연했을 때 그녀는 공연을 마무리하며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사진을 찢어버렸습니다. 그러나 가톨릭 교회의 징책은 1999년에야 내려졌는데, 그녀가 이른바 '독립 가톨릭 교회'에서 여성 사제 서품을 받으면서였습니다.
브라질에서 벌어진 두 사례
브라질에서도 큰 반향을 일으킨 파문 사례가 두 건 있었습니다. 첫 번째는 1984년의 일로, 신학자이자 작가인 레오나르도 보프가 이른바 해방신학의 방향을 옹호했다는 이유로 파문 직전까지 몰린 사건입니다. 두 번째는 2009년으로, 계부에게 성폭행을 당한 9세 소녀의 쌍둥이 임신을 중절한 의사들과 소녀의 어머니를 교회가 파문하면서 거센 논란이 일었습니다.
이처럼 파문은 단순한 종교 징계를 넘어 정치와 사회의 관계를 재편하는 강력한 무기로 기능해 왔습니다. 시대에 따라 그 형태와 의미는 달라졌지만, '공동체에서 배제한다'는 파문의 본질은 오늘날까지 교회와 신자, 그리고 사회를 잇는 흥미로운 접점으로 남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