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이야기

오토 3세는 왜 맨발로 그니에즈노를 향해 걸었을까?

오토 3세는 왜 맨발로 그니에즈노를 향해 걸었을까?

1000년 그니에즈노 회담에 관한 기록 가운데 '폴란드의 연대기'를 남긴 갈루스 아노니무스는 무엇보다 용맹공 볼레스와프의 놀라운 부와 독일 황제 오토 3세로부터 받은 영광을 강조했습니다. 반면 독일 측은 같은 사건을 조금 다르게 기억했습니다. 연대기 작성자이자 주교였던 티트마르는 이렇게 적었습니다. "오토가 그토록 갈망하던 성채를 멀리 바라보았을 때, 그는 기도문을 입술에 담은 채 맨발로 다가갔다"(제4권 45절). 과연 유럽의 최고 통치자가 폴란드의 수도를 맨발로 걸어갈 수 있었던 일일까요?

우리 교과서들은 이 사건을 두 가지 방식으로 설명합니다. 첫째, 용맹공 볼레스와프는 교활한 정치가였고 젊은 황제를 훌륭하게 속일 줄 알았다는 것입니다. 프로이센인들에게 살해된 보이체흐 주교의 유해를 사들여 그니에즈노로 옮긴 뒤, 이를 자신에게 유리하게 활용했다는 설명입니다.

성인 앞에서는 오직 맨발로

두 번째 설명에 따르면, 오토 3세는 순교자(결코 우리의 선량한 볼레스와프가 아니라!)의 유해를 찾아 눈물을 흘리며, 어쩌면 굵은 참회복을 입고 맨발로 순례를 떠난 것입니다. 이 설명에는 동의하지 않기 어렵습니다.

오토 3세는 왜 맨발로 그니에즈노를 향해 걸었을까?

성 아달베르트, 즉 보이체흐의 묘를 향해 오토 3세는 순례를 떠났습니다.

또한 역사학자들은 오토 3세가 일반적으로 매우 특이한 통치자였으며, 초기 중세의 현실을 고려하더라도 금욕주의, 참회, 종교적 성찰에 지나칠 정도로 큰 비중을 두었다고 강조합니다. 한마디로 일종의 '별난 황제'였고, 그래서 폴란드인들의 마을을 맨발로 행진했다는 것입니다. 이 설명에는 얼마나 진실이 담겨 있을까요? 거의 없습니다.

오토 3세는 확실히 기행에 가까운 면모를 지닌 통치자였지만, 이 경우에는 수십 년간 유행했던 전통을 따랐을 뿐이며, 이는 그의 측근과 신민들에게 충분히 이해할 만한 것이었습니다. 황제의 '참회적' 행동에 놀란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오직 폴란드인들뿐이었습니다.

어쨌든 볼레스와프의 궁정 신하들과 기사단이 서유럽의 종교적 '유행'을 따라잡으리라고 기대할 수는 없었습니다. 더군다나 10세기의 풍습은 21세기에 사는 우리에게 이해되기 어려운 것이 사실입니다.

다행히도 독일의 중세학자 게르트 알트호프와 그의 혁신적인 저서 『권력의 의식』이 우리를 도와줍니다. 이 통찰력 있는 역사학자는 10~11세기 독일의 통치자들과 주교들 사이에서 유행한 독특한 의식을 재구성해냈습니다.

오토 3세는 왜 맨발로 그니에즈노를 향해 걸었을까?

맨발로 걷는 것은 독일 통치자들에게 새로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이미 오토 1세부터 이러한 행위가 실천되었습니다.

알트호프의 말을 빌리자면, 오토 왕조 시대는 "통치자들이 종종 표현적으로 스스로를 낮추곤 했는데, 이는 당대 사람들의 이해 속에서 오히려 격상을 의미했다"는 시기였습니다. "통치자들의 참회복과 몸짓은 바로 그들의 직분의 윤리적 기초로 규정되었던 것을 정확히 표현한 것이었다"(102, 104쪽).

국가 이익이 황제의 맨발 걷기를 요구하다

요컨대 금욕과 참회는 좋은 취향으로 여겨졌고, 신민들은 황제에게 바로 그것을 기대했습니다! 자신의 경건함과 대중에 대한 도덕적 우월성을 드러내기 위해 통치자들은 다양한 몸짓을 사용했지만, 가장 흔한 것은 바로 맨발로 걷는 것이었습니다.

이미 오토 3세의 할아버지인 오토 1세는 할버슈타트의 주교 연대기에 따르면 현지 주교와 화해할 때 참회자의 자세를 취하고, 맨발로 주교에게 걸어가 그 앞에 엎드렸습니다. 오토 3세의 측근이자 멘토였던 프라하의 보이체흐 주교나 쾰른의 헤리베르트 주교 역시 신발을 벗었습니다. 두 사람 모두 주교직에 취임하며 "맨발로, 참회복을 입고 자신의 교구로 들어갔다"(102쪽).

반세기 후 새로 선출된 교황 레오 9세도 같은 행동을 했습니다. 오토 3세 이후의 통치자들도 비슷한 방식으로 행동했습니다. 특히 경건하다고 여겨진 인물이든, 예외적으로 세속적이라 평가받은 인물이든 마찬가지였습니다. 하인리히 2세는 "혹독한 추위 속에서도" 베르게 수도원에서 대성당까지 성 모리스의 유해를 운반했습니다(104쪽).

그보다 조금 후에 즉위한 하인리히 3세는 헝가리와의 승전 후에 참회의 행위(혹은 겸손의 표현?)를 결심했습니다. 게르트 알트호프의 말에 따르면, "왕은 맨발로, 굵은 옷을 입은 채 성십자가의 유해 앞에 몸을 던져 땅에 엎드렸다"(107쪽). 그는 자신의 어머니 장례식에서도 같은 행동을 했습니다. 비슷한 사례는 얼마든지 늘어놓을 수 있습니다. 한마디로 오토 3세가 한 일은 결코 놀라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토 3세는 왜 맨발로 그니에즈노를 향해 걸었을까?

맨발로 걷는 것은 세속 통치자만이 아니라 주교들과 교황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레오 9세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황제들이 맨발로 과시하듯 걷고 땅에 엎드리는 이 독특한 전통은 그리 오래 지속되지 않았습니다. 1077년 굴욕당한 독일 통치자 하인리히 4세가 카노사에서 교황 앞에 겸손을 드러낸(사흘 동안 맨발로 안뜰에 서 있었죠!) 이후 모든 것이 변했습니다. 그러면서 이 의식은 새로운 의미를 갖게 되었고, 이후 거의 어떤 독일의 왕이나 황제도 주교 앞에서도, 교황 앞에서도, 심지어 하느님 앞에서조차 신발을 벗기를 원하지 않았습니다.

출처:

  • 게르트 알트호프, 『권력의 의식: 중세 권력의 상징성』, 폴란드 학술출판사(PWN), 20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