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도 어린 합스부르크인가요? 그렇다면 유감이지만, 한가한 어린 시절은 포기해야 합니다. 첫마디를 내뱉는 순간 철저한 훈련이 시작됩니다. 교사는 교과서를 검열하고, 궁정 신학자는 도덕적 기준을 책임지며, 지루한 강사들은 헌법 강의로 젊은 시절을 짓누릅니다.
타고난 재능의 유무와 상관없이, 모든 어린 합스부르크 가문의 아이들은 보수적인 가톨릭 가치관 속에서 세심한 교육을 받아야 했습니다. 유럽 전역의 귀족 사회에서 가장 빛나는 황제를 대표해야 했기 때문에, 품위 있게 공식 견해에 부합하는 방식으로 행동하도록 길러져야 했던 것입니다.
지식의 숲 속 홀로 남겨진 어린 왕자
합스부르크 교육의 세계를 안내할 인물은 대공 프란츠 페르디난트입니다. 이 인물은 훗날 사라예보에서 가브릴로 프린치프의 총탄에 맞아 제1차 세계대전의 도화선을 터뜨리게 되는 인물입니다. 하지만 어린 시절의 그는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었습니다. 언젠가 왕좌에 앉게 될 거라고 말이죠.

1914년의 프란츠 페르디난트 (출처: 퍼블릭 도메인)
그의 삼촌인 프란츠 요제프 황제는 건강했고, 정점에 이른 남성 상속자도 있었습니다. 프란츠 페르디난트는 왕조의 두 번째 열에 서 있었고, 왕위 계승 서열은 3위에 불과했습니다. 그가 왕위를 계승하려면 무언가 아주 큰 일이 벌어져야 했습니다. 그래서 어린 왕자는 왕위 계승자용이 아닌 '표준' 버전의 합스부르크 교육을 받게 되었습니다. 아이가 다소 온화하고 고독을 즐기는 성향이었음에도, 엄격한 교육 체제는 피할 길이 없었습니다.

카를 루트비히 대공의 가족은 여름철마다 도나우 계곡의 아르트슈텟텐 성에서 지냈습니다. 어린 프란츠 페르디난트는 과연 어느 방에서 공부했을까요? (사진: Arcomonte26, CC-BY 3.0)
황제 프란츠 요제프의 동생인 카를 루트비히 폰 합스부르크의 자녀들은, 유럽 전역의 귀족 사촌들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는 교육을 받아야 했습니다. 이에 대공은 가정교사에게 아낌없이 비용을 쏟아부었습니다. 게다가 그는 교육 과정 전반에 적극적으로 참여해 아들들에게 미술사 수업 등을 직접 가르치기도 했습니다. 시야를 넓히기 위해 저명한 예술가, 발명가, 과학자들을 자주 초청했는데, 흥미로운 강연을 통해 어린 왕자들이 더 부지런히 공부하도록 격려받고 그들의 업적에 관심을 갖기를 기대한 것입니다. 적어도 이론상으로는요. 실제로는 전혀 흥미롭지 않았습니다.
한 가지 분명히 해둘 점이 있습니다. 어린 합스부르크 왕자들로 붐비는 교실도, 오스트리아-헝가리 최고 귀족을 위한 특별 교육 기관도 존재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유럽의 수많은 명문 가문과 마찬가지로, 아이들은 혼자서 궁전의 방 안에서 오직 교사와 함께 공부했습니다. 형제 간 나이 차가 작으면 일부 강의를 함께 듣기도 했지만, 대부분의 경우 하루 몇 시간씩 주 6일 동안 어린 학생은 엄격한 가정교사와 자기 자신만을 벗삼아야 했습니다.

갓 태어난 아이들에게도 '오스트리아와 황제를 사랑하라'는 원칙이 주입되었습니다. 사진은 카를 루트비히의 아내 마리아 안눈치아타 디 시칠리아와 두 아들 프란츠 페르디난트, 오토입니다.
어린 프란츠 페르디난트와 그의 형제들을 감시한 엄격한 체제의 수호자는 상상력과 혁신 기질이 부족한 인물이었습니다. 전직 장교 출신의 페르디난트 데겐펠트 백작은 과학, 산술, 역사, 문학, 종교, 그리고 당연히 독일어와 문법으로 빼곡하게 채워진 보수적인 커리큘럼을 꼼꼼하게 감독했습니다. 그는 예외를 단 한 번도 허용하지 않았으며, 가정교사들이 어린 합스부르크들에게 심어준 가치를 철저히 지켰습니다.
교과서에 대한 사전 검열
오노 클로프 교수는 어린 왕자들의 역사 교육을 담당했습니다. 그는 자신에게 어렵고도 중요한 임무가 주어졌음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역사를 가르치면서 동시에, 학생들의 머릿속에 싹트는 '반동적' 사고의 가장 작은 불씨까지 붙잡아 제거해야 했던 것입니다. 그가 선택한 방법은 '유일하게 올바른 견해'를 교리처럼 주입하는 것이었습니다. 만약을 대비해 그는 교재를 직접 검열하기까지 했습니다.
『대공을 죽여라(To Kill the Archduke)』의 저자 그레그 킹과 수 울만스는 이렇게 기록합니다.
"교사는 자유주의 정치 견해에 대한 비판, 현대 사상의 위험성, 그리고 합스부르크 군주국의 신성한 사명 위에 드리운 프로이센의 팽창 위협에 대한 불길한 경고에 집중했습니다."
"클로프는 제자에게 영향을 줄지 모를 다양한 생각이 두려웠던 나머지, 원치 않고 유해한 정치 용어를 걷어내기 위해 어린 대공을 위해 직접 역사 교과서를 집필하기까지 했습니다."
왕자가 왕조에 대해 짊어져야 할 미래의 의무, 예컨대 국가 각지에서의 군 복무나 외교 활동에는 여러 언어에 대한 지식이 필요했습니다. 첫 번째이자 기본은 독일어로, 합스부르크의 아이들은 독일어로 말문을 열었습니다.
이후 프랑스어, 영어, 체코어, 헝가리어를 차례로 배웠습니다. 그런데 어린 프란츠 페르디난트에게 헝가리어는 진짜 악몽이었습니다. 어린 왕자에게는 다국어 재능이라곤 없었습니다. 평생에 걸쳐 헝가리어 실력을 끌어올리려 노력했지만, 끝내 전문가 수준에는 도달하지 못했습니다. 영어 실력도 다소 엉성했습니다.
종교 교육에는 그 어떤 관용도 없었습니다. 합스부르크 가문과 긴밀한 유대를 맺은 엄격한 성직자 고티프리드 마르샬이 프란츠 페르디난트의 신학적 방향을 이끌었습니다.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조에서 태어나 황제와 가까운 혈족이라면 선택의 여지는 없었습니다. 가톨릭, 그것뿐이었습니다.
게다가 어린 왕자들은 장차 믿음과 경건함의 모범이 되어야 했습니다(적어도 공개 석상에서는). 다행히 프란츠 페르디난트의 경우, 신부는 특히 수월한 임무를 맡았습니다.

1873년, 새로이 세 번째 아내가 된 마리아 테레자 델 포르투갈과 함께한 카를 루트비히, 그리고 전처 사이의 네 자녀들: 프란츠 페르디난트, 오토, 페르디난트 카를, 마우고자타 조피아.
소년은 어린 시절부터 상당히 독실했고 전례에 남다른 관심을 보였습니다. 가톨릭에 대한 그의 매혹은 너무 깊어서, 궁전 예배당에 앉아 그 장엄한 분위기를 흡수하고 싶어할 정도였습니다. 마르샬이 주입한 교리에 대해 그는 어떤 비판도 가하지 않았습니다. 흥미롭게도 그는 종교적 불관용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그 사람이 자신의 신앙에 충실하고 그 가르침에 따라 살았는지 여부였지, 성경이나 토라 또는 코란을 읽었는지 여부가 아니었습니다.
기본 과정은 추가 강의로 보완되었습니다. 『대공을 죽여라』의 저자들에 따르면, 프란츠 페르디난트 왕자는 다음 과목의 수업을 받았습니다.
"군사사, 해군 기동, 건축학과 공학. 오스트리아의 미래 총리가 될 막스 블라디미르 베크는 민법과 헌법을 가르쳤습니다. 하나도 빠짐없이 […]"
실습 수업도 계속되었습니다. 승마, 무용, 펜싱까지. 모든 것이 훌륭하게 들립니다. 철저히 교육받은 젊은이, 박식하고 다국어를 구사하는 인물로 완벽하게 갖춰진 구성입니다. 그런데 전례를 제외하면 우리 주인공이 특별한 재능을 보이지 못했다면 어떨까요?

"프란치는 기분이 좋지 않더군." 조카를 만난 뒤 프란츠 요제프 황제는 이렇게 적어남겼습니다. 왼쪽은 어린 시절의 프란치, 오른쪽은 다 자란 프란츠 페르디난트 폰 합스부르크입니다.
교사들의 진심 어린 의도와 필사적인 노력에도 불구하고, 지식의 씨앗은 극도로 척박한 땅에 떨어졌습니다. 왕자를 바보라고 부를 때까지는 가지 않겠습니다. 그것은 폐하에 대한 모욕이 될 테니까요! 다만 모든 것을 벼락치기로 외웠을 뿐, 정작 아무것도 배우지 못했다고 말해두겠습니다.
사실 그것은 큰 문제가 아니었을 터였습니다. 프란츠 페르디난트의 운명은 이미 정해져 있는 듯했습니다. 군 경력, 왕조의 위상 유지(적어도 추락시키지만 않는!), 그리고 편안한 삶. 그러나 운명은 기괴하게도 어느 날 그 모든 것을 무너뜨렸습니다. 젊은 왕자가 왕위를 계승하게 된 것입니다.
출처
- 이 글은 그레그 킹(Greg King)과 수 울만스(Sue Woolmans)의 저서 『대공을 죽여라(To Kill the Archduke)』(Literanova Mark, 2014)를 바탕으로 작성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