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18년 크라쿠프를 방문했던 헝가리 여행자 마르톤 촘보르(Marton Csombor)는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도덕에 관해서라면, 소돔과 고모라보다 크라쿠프에서 더 자유롭지 않다고 생각한다. 어디를 보아도 간음이 넘쳐나고, 어디로 가든 온갖 방탕자들이 뒤따라온다."
과장된 표현이었을까요? 역사학자 안제이 카르핀스키(Andrzej Karpiński)는 16세기 후반과 17세기 자료에서 크라쿠프의 매춘부를 단 29명만 확인했습니다. 비교하면 포즈난은 113명, 루블린은 15명, 바르샤바는 겨우 3명이었습니다. 다만 그는 주로 법원 기록장에 의존했는데, 이는 귀중한 자료임이 분명하지만 통계 작성에는 신뢰도가 떨어집니다. 실제로는 훨씬 더 많은 매춘부가 있었을 것이며, 유통되던 뇌물의 규모만 봐도 이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촘보르가 크라쿠프를 방문했을 당시 이 도시에는 매춘업소가 9곳 있었습니다. 예전에는 13곳으로 알려졌지만, 정밀한 조사 끝에 그중 두 곳은 다른 주소로 이전했고, 또 두 곳은 매춘부들이 손님을 유치하기 위해 드나들던 장소일 뿐이라는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합법적 방탕과 불법적 방탕
가장 중요한 매춘업소는 시영(市營) 매춘업소였습니다. 당시 폴란드의 도시들은 '허가받은' 업소를 통해 매춘으로 수익을 올렸습니다. 보통 "이런 업소는 형집행인의 소유였고, 그들의 아내들이 경영을 맡았다"고 합니다(캄러, 『악당들』, 161쪽).
16세기 말 크라쿠프의 시영 매춘업소는 개신교회 근처 크라쿠프 탑에 위치해 있었고, 이후 성 마르크 거리 끝자락으로, 1604년경에는 새문(New Gate) 근처 시엔나 거리 출구로 옮겨졌습니다. 17세기 후반에는 슈체판스카 거리로 이전했습니다.
시엔나 거리 끝의 새문. 17세기 초 공식 시영 매춘업소가 자리했던 곳입니다.
그 밖에도 불법 매춘업소들이 운영되었습니다. 16세기와 17세기가 교차하는 시점에는 얀 드리구트(Jan Drygut)가 드우가 거리의 업소를 경영했습니다. 세부 정보는 발레리안 네칸다 트렙카의 저술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는 귀족 신분을 사칭한 자들을 등록한 유명한 『무례한 자들의 책』에 몇몇 크라쿠프 포주들을 기록해 두었습니다. 예컨대 1630년경 얀 체라노프스키(Jan Ceranowski)는 스모차 야마(용의 굴) 근처 포트잠체에 살면서 "선술집을 위장하고 영업했다"고 전해집니다.
또한 1617년경 또 다른 귀족 사칭범 로키츠키(Rokicki)는 부인과 함께 미코와이스카 문 뒤편 집에서 '창녀들'을 관리했습니다. 그는 꽤 능력 있는 인물이어서, 국회 의원들이 바르샤바로 올 때마다 자신의 '방탕한 여자들'과 함께 그곳을 찾았다고 합니다. 손님들은 강도를 당하는 것은 물론 살해당하기도 했고, 이 때문에 로키츠키는 결국 크라쿠프에서 도피해야 했습니다.
개별 매춘 역시 활발했으며, 손님을 유치하던 장소로는 피브니차 슈비드니츠카(지하 술집, 분노를 금치 못한 안제이 프리츠 모제프스키가 기록한 곳)와 스모차 야마(담담하게 언급한 얀 안제이 모르슈틴의 글에 등장하는 곳)가 꼽혔습니다.
"...감옥에 열한 번 갔습니다..."
매춘 자체는 합법이었기 때문에 매춘부들이 재판에 회부되는 이유는 대개 다른 곳에 있었습니다. 가장 흔한 혐의는 절도였습니다. 1598년 카지미에시 출신의 아그네슈카 코렌두브나는 "소녀 시절 농부들에게 돈을 뜯어낸 적이 있다 [...] 그런 일이 있었다"고 증언했습니다(캄러, 『죄인들』, 174쪽).
때로는 값을 강제로 치르기도 했습니다. 1582년 카지미에시에서 티니에츠 출신의 네타(Neta)는 스스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가 아무것도 주지 않아서, 한 밤값으로 참사회원에게 주석 그릇을 가져왔다"고요(캄러, 『악당들』, 175쪽).
매춘업소 풍경. 이른바 브라운슈바이크 모노그램 화가가 1540년에 그린 작품.
포주들은 처벌을 받았습니다. 1597년, 어린 소녀를 선술집으로 유인한 죄를 지운 슈체스나 바르비에르카는 목조형구대 앞에서 채찍질을 당하고 귀가 잘린 뒤 도시에서 추방되었습니다. 1년 뒤에는 포들라시에 출신의 얀 쿠차르츠(요리사 얀)가 "아내와 함께 마을에서 마을로 어린 소녀들을 속여 데려다 판" 혐의로 재판을 받았습니다(카르핀스키, 『매춘』, 283쪽).
하지만 처벌이 항상 예방 효과를 거둔 것은 아니었습니다. 크라쿠프와 카지미에시에서 활동한 매춘부 마그달레나 옷비노프스카의 증언은 1778년 것으로 시기적으로 늦지만 상당히 특징적입니다. "나는 이미 크라쿠프 시청 감옥에 열한 번 갇혔고, 시청 앞 채찍형대[채찍질을 받는 자가 엎드리던 긴 의자 — 편집자 주]에 세워져 도시에서 추방되는 식으로 처벌받았습니다"(크라치크, 로제크, 『건달들』, 164쪽).
상황은 터무니없었습니다. 매춘부를 처벌하던 형집행인이 직접 매춘업소를 운영했고, 한 번이 아니라 여러 차례 유죄 판결을 받은 여성들 가운데서 매춘부를 모집하기까지 했기 때문입니다.
관리된 매춘인가, 통제 불능의 방탕인가?
크라쿠프가 도시로 건설되자마자 첫 매춘업소가 설립되었다는 눈길을 끄는 문장을 쓰고 싶지만, 안타깝게도 자료 부족이 걸림돌입니다. 1398년에야 수도 당국이 매춘업소 3곳의 폐쇄를 결정했다는 기록이 처음 나타납니다. 그러나 이 계획은 끝내 실행되지 않았습니다. 중세에는 매춘이 하나의 정당한 직업으로 취급되었다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조직적이고 제한된 매춘을 허용하는 편이 통제 불가능한 방탕보다 낫다는 논리가 통용되었습니다. 구(舊) 폴란드와 크라쿠프에서 성범죄가 차지하던 규모를 생각하면, 이런 명분을 찾아냈다는 사실 자체가 놀라운 일은 아닙니다.
동침하는 연인들. 18세기 판화.
1655년, 크라쿠프 당국은 태도를 바꾸어 매춘부와 매춘 종사자들에게 임대주택을 빌려주는 행위를 금지했습니다. 피해자 중에는 도시 변호사 브주한스키도 있었을 수 있습니다. 1650년 기록에 따르면 그가 "두니노바 침발리시치나를 비롯한 매춘 여성들"에게 아파트를 빌려주었다고 합니다.
계몽주의 시대에 이르러서야 더 결단력 있는 조치가 취해졌습니다. 1783년 경찰국은 크라쿠프의 모든 '매춘 여성'을 체포하여 공공 노역에 동원하라고 명령했습니다. 그러나 이 방안 역시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19세기에는 매춘을 근절하기보다 통제하고 규제하려는 노력이 이루어졌습니다. 19세기 말에는 크라쿠프가 "사제, 군인, 매춘부의 도시"라는 평가가 나돌기도 했습니다(미친스카, 『배반』, 87쪽에서 인용).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남았습니다. 적어도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할 때까지는요.
출처
기본 자료
- Kamler Marcin, 『악당들. 도시 법원 기록으로 본 16세기 후반~17세기 전반 왕령지역의 범죄』, 바르샤바, 2010.
- Karpiński Andrzej, 『16~17세기 폴란드 대도시의 매춘(크라쿠프, 루블린, 포즈난, 바르샤바)』, 「물질문화사 분기지」 36권, 1988, 2호.
- Kracik Jan, Rożek Michał, 『옛 크라쿠프의 건달, 악당, 매춘부』, 크라쿠프, 1986.
보충 자료
- Csobra Tibor, 『마르톤 세프시 촘보르와 그의 Europica Varietas』, 「Nowiny Płockie」 4/13-14, 1959.
- Micińska Magdalena, 『배반, 노차의 딸. 1861~1914년 폴란드인 의식 속 민족 배반 개념』, 바르샤바, 199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