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가 바뀌던 무렵, 석유가 발견된 곳이면 어디든 사람들의 삶은 극적으로 변했다. 갈리치아 지방의 보브르카(Bóbrka)도 예외는 아니었다. 슈친스니 모라프스키(Szczęsny Morawski)가 남긴 기록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이 땅에서 알려지지 않았던 삶이 깨어났다. 그전까지 없었던 세계, 즉 광산 노동의 세계가 탄생했다. 미국에 온 듯한 기분일 것이다."
보브르카와 그 주변에서 석유가 흘러나온 역사는 아주 오래되었다. 당시 주민들은 석유를 '타르' 혹은 '암석 기름'이라 불렀고, 그 쓸모도 빠르게 찾아냈다. 바로 수레 바퀴의 윤활유였다. 게다가 양의 간흡충 치료제로도 쓰였다. 하지만 그 누구도 가난한 갈리치아 주민들의 삶이 얼마나 크게 변할지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석유 러시의 시대
다행히 이그나치 우카셰비치(Ignacy Łukasiewicz)는 석유에서 무엇을 얻어낼 수 있는지 예견할 줄 알았다. '석유 산업의 아버지'로 불리는 인물이다.

석유 러시 시대가 곧이어 찾아온 것은 당연한 귀결이었다. 당시 신문 '슈탄다르 폴스키(Sztandar Polski)'는 이렇게 묘사했다.
이것은 말하자면 진짜 유행병 같은 시절이었고, 복권 추첨과 같은 조건에 기반을 두고 있었다. 예컨대 산기슭 석유 지대 어딘가에서 오래전부터 알려져 있던 흔적이 나타났다고 치자.
시냇가에 막대기를 담그기만 해도 물 표면에 유지의 무지갯빛이 번지곤 했다. 그러면 아무것도 자라지 않던 밭에 삽을 들이밀었고, 이내 웅덩이가 역청 진흙으로 가득 차올랐다.

석유 산업의 아버지, 이그나치 우카셰비치.
그러나 많은 경우 기쁨은 과했고, 몇 통의 배럴을 채우고 나면 원천이 마르기 일쑤였다. 그들은 어떻게든 석유를 채굴하려 했다. 처음에는 물이 고이고 석유가 그 위에 떠오르도록 얕은 구덩이와 도랑을 팔 정도였다. 훨씬 나중에야 기술이 발달하여 깊은 갱도를 파기 시작했다.
노동의 현실: 양동이에 실려 지하 200미터로
방법이 어떠했든 노동은 매우 위험했다. 석유부(石油夫)들은 붕괴에 깔리거나 물에 잠기거나, 혹은 예기치 못한 석유·가스 유입에 질식할 위험에 늘 노출되어 있었다. 광부들이 내려간 갱도는 가로세로 120cm에 불과했다. 각 현장에는 삼베줄이 감긴 도르래가 있었고, 그 끝에는 나무나 양철 양동이가 매달려 있었다.

보브르카에서 사용된 초기 굴착지 모형 (사진: 슈체판 자이델).
이런 작업장에는 두 사람이 필요했다. 한 명은 굴착부로서 갱도 바닥까지 내려가고, 다른 한 명은 맨손으로 분쇄기를 돌려 갱도 밑바닥에 공기를 공급하는 환풍기 역할을 맡았다.
그렇다면 이 갱도는 얼마나 깊었을까? 파비안스키(Fabiański) 교수의 말에 따르면 무려 200미터에 달하기도 했다. 여기에 안전줄 부재까지 더해지니 위험은 말할 것도 없었다. 실제로 1872년에는 치명적인 사고 사례가 기록되었다.
폭발은 이렇게 일어났다. 갱도 바닥에 있던 노동자가 철봉으로 단단한 바위를 때리다 불티를 일으켰고, 불꽃은 가스에 옮겨붙어 번개처럼 위로 치솟았으며, 환풍기를 돌리던 불행한 희생자마저 집어삼켰다.

코판카 프라넥(Kopanka Franek). 오늘날까지 석유가 고여 있다 (사진: 슈체판 자이델).
보통 작업 시간은 12시간이었고, 그 과정에서 수많은 사망 사고가 기록되었다. 율리안 파비안스키(Julian Fabiański) 교수는 논문 「폴란드 석유·가스 시추의 발전」에서 이렇게 회고했다.
나는 지칠 줄 모르는 굴착부의 모습을 생생히 기억한다. 매일 목숨을 걸고 양동이에 실려 갱도로 미끄러져 내려갔다. 대개는 안전줄도 없이, 손에는 안전등이라 부르기엔 믿음직스럽지 못한 램프를 들고 말이다.
그럼에도 갈리치아의 석유부들은 언제나 자신이 경작하는 땅에 충실했다. 광산 노동은 어디까지나 농장 운영 자금을 벌기 위한 부업으로 여겨졌다. 그래서 급한 농사일이 있으면 광산을 빠져나가곤 했는데, 그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소 젖 짜기 같은 일이었다.
새로운 유행
그럼에도 석유부들은 마을에서 두드러졌다(지갑 두께만이 아니라). 밝은 색 셔츠와 짙은 색 모자, 야구 모자가 크게 유행했고, 돈 좀 되는 이들은 회중시계를 갖고 다녔다. 해외 노동의 보수로 들여온 것들로, 대개 톰백(tombak)이나 은제였지만 진짜 황금 보석도 있었다. 시계들은 가장 명성 높은 스위스 제조사의 제품들이었다. 그래서 이 지역에서는 "석유부는 핑키를 물처럼 마신다"는 말이 회자되었다.

일하는 중인 석유부.
부자가 된 것은 노동자만이 아니었다. 자기 땅에서 석유가 솟구치면 농부들도 살림이 넉넉해졌다. 갑작스러운 석유 분출 덕분에 이 행운아들은 '방크멘(bangmen)'이라 불렸다. 석유 산업에 숱한 인력이 필요했기에 채용 기준은 크게 낮아졌다.
토요일, 즉 급여 지급일이면 모든 작업이 멈췄다 […]. 일요일에는 선술집에서 보드카를 마시며 놀았고, 노동자는 월요일에 하루를 넘기고, 화요일에야 자기 일을 떠올려 수요일에 이르러서야 일을 시작했다.
광부의 건강과 생명에 대한 적절한 보호 없이 서둘러 진행된 유전 개발은 치명적인 사고로 자주 이어졌다. 병들거나 장애로 일할 수 없게 된 노동자는 극심한 가난에 빠졌다.
늘어나는 석유 노동자들의 운명에 관심을 두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B. 올레야르시, 「진흙인가 황금인가 — 19세기 후반 크로스노 지역 농촌 삶에 미친 석유 산업의 영향」)
세계가 인정한 프로페셔널
보브르카의 노동자들은 직업 훈련을 철저히 받았다. 덕분에 당시 노동 시장에서 큰 인기를 누렸다. 석유가 있는 곳이라면 거의 어디서든 갈리치아 출신 노동자들을 찾아볼 수 있었다. 그들은 러시아, 칠레, 뉴질랜드, 보르네오, 트리니다드, 네덜란드령 동인도까지 떠났다. 폴란드인들이 가장 많이 토로한 것은 그곳의 음식이었다. 매일 엄청난 양의 과일과 함께 먹는 쌀밥으로는 시큼한 호밀 수프(주레크), 라드, 감자를 대신할 수 없었다.

보브르카. 세계 각국에서 인정받은 석유부들의 고향이다.
원유는 주민들의 삶에 커다란 변화를 가져왔다. 한 광산 감독관은 이렇게 기록했다.
좋은 도로, 곳곳에 심어진 나무, 배수로, 물길이 닿아 잘 가꿔진 초원, 특히 즈렌친(Zręcin)과 호르쿠프카(Chorkówka)의 깨끗하고 넓은 건물과 공장들, 그리고 잘 먹고 깨끗한 농부들 […] 어디를 보나 확실한 번영이 보였고, 광산을 방문했을 때도 그것이 내 눈에 들어왔다. 점심시간에 노동자들이 고기를 요리하고 돼지기름을 구워 먹는 모습을 보았는데, 이는 갈리치아 어디에서도 본 적 없는 광경이었다.
아쉽게도 보브르카 광산은 원료 고갈로 인해 비교적 빠르게 쇠퇴의 길을 걷게 되었다. 그러나 중요한 점은 소규모 채굴이 오늘날까지도 이어지고 있으며, 보브르카의 석유·가스 산업 박물관에서는 여전히 가장 오래된 채굴 유적을 직접 볼 수 있고, 세계 석유 산업의 개척자들이 살았던 그 시절의 분위기를 온몸으로 느낄 수 있다는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