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이야기

공산주의를 경멸하던 바르샤바의 유대인 건축가, 스탈린의 마음을 사다

세계 최고층을 꿈꾸며 태어난 '소비에트 궁전'

모스크바에 세워질 예정이었던 '소비에트 궁전'은 세계에서 가장 높은 건축물로서, 인류가 품은 가장 밝은 꿈, 즉 공산주의를 상징하는 기념비가 될 예정이었다. 당대 세계 최고의 건축가들이 설계 공모전에 참여했고, 그 사이에는 바르샤바에서 온 한 명의 유대인 건축가도 있었다. 그는 어떤 결과를 얻었을까? 그리고 그의 작품은 바르샤바 문화과학궁전과 무슨 연관이 있을까?

그제시 시갈린(Grzegorz Sigalin)은 전간기 바르샤바에서 가장 재능 있는 건축가 중 한 사람이었다. 진취적인 집안 출신으로, 할머니 클라우디아 시갈리나는 유명한 케피르 공장의 주인이었다. 그는 바르샤바 공과대학교 건축학부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뒤 형 로만(Roman)과 함께 설계 활동을 시작했고, 두 형제는 바르샤바·그디니아·우치에 여러 테너먼트 주거 건물을 남기며 이름을 알렸다. 하지만 그제시에게는 더 큰 야망이 있었다.

그 무렵 모스크바에서 소비에트 궁전 설계 공모전이 발표되었다. 처음에 시갈린은 1920년, 볼셰비키를 물리치겠다며 스스로 군대에 입대했던 젊은 날을 떠올렸을 것이다. 그러나 이 공모전은 그가 오랫동안 꿈꿔온 성공을 이룰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소비에트 궁전이라는 계획이 자신의 젊은 시절 신념과 정면으로 배치된다는 사실은 어쩔 수 없이 뒷전으로 밀려났다. 그는 동료인 헨리크 블룸(Henryk Blum)과 베르톨트 루벳킨(Bertold Lubetkin)과 함께 공모전에 참가했다.

프롤레타리아트의 건축적 복수

공산주의의 승리를 상징하고 서구 부르주아의 저택들을 압도하는 건물을 세우자는 아이디어는 이미 1922년 12월에 등장했다.

공산주의를 경멸하던 바르샤바의 유대인 건축가, 스탈린의 마음을 사다

소비에트 궁전의 부지를 마련하기 위해 먼저 그리스도 구세주 대성당이 철거되어야 했다. 사진은 성당이 폭파되는 순간이다(출처: 퍼블릭 도메인).

소련 소비에트 대회에서 시갈린은 볼셰비키의 공로자 세르게이 키로프(Sergei Kirov)를 알게 되었다. 베아타 호몬토프스카(Beata Chomątowska)의 저서 『팔라체, 친밀한 전기』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소비에트 궁전 [...]은 경멸받던, 한때 낙후된 노동자와 농민의 힘이 부르주아 서구에 대한 복수임을 보여주는 건물이어야 한다. 우리 적들이 꿈에도 상상하지 못할 구조물이어야 한다. 이 건축물은 폴란드뿐 아니라 서구에서도 미래의 권력, 공산주의의 승리를 보여주는 눈에 보이는 징표가 되어야 한다."

키로프의 연설은 물론 열렬한 박수를 받았고, 곧 궁전 부지가 정해졌다. 바로 그리스도 구세주 대성당이 서 있던 광장이었다. 빠른 추진이 필요했기에 성당은 폭파로 철거되었고, 스탈린 동지 자신의 기대에 부응할 건축가와 설계안을 찾는 대탐색이 시작되었다.

콘트라베이스 선율과 함께 발표된 궁전 설계

소비에트 궁전 설계 공모전은 1931년에 발표되었다. 주최 측은 관련 소식이 전 세계에 퍼지도록 신경 썼고, 제출된 160개의 설계안 가운데 24개가 해외 참가작이었다. 참가자 중에는 에리히 멘델존, 오귀스트 페레, 르 코르뷔지에 같은 거장들도 있었고, 이른바 '트로이카', 즉 시갈린·블룸·루벳킨 팀도 있었다.

그러나 젊은 건축가들에게 주어진 과제는 만만치 않았다. 우주선을 연상시키는 매우 현대적인 형태가 돋보이는 그들의 건물은 거물급 경쟁자들뿐 아니라 파격적인 발표 방식과도 겨뤄야 했다. 실제로 르 코르뷔지에의 발표회는 화려한 춤 공연으로 가득했고, 건축가 본인이 콘트라베이스를 연주하기도 했다.

하지만 스위스 거장의 화려한 쇼는 허사였다. 외국 손님들의 놀람, 특히 르 코르뷔지에 본인의 분통을 자아내며, 두 명의 폴란드 참가자와 한 명의 미국인이 최종 3강에 올랐다. 결국 승자는 평범하고 두드러진 점이 없는(꼭대기에 거대한 '해방된 프롤레타리아트' 조각상이 얹혀 있다는 점을 제외하면) 보리스 요판(Boris Jofan)의 설계안이었다.

공산주의를 경멸하던 바르샤바의 유대인 건축가, 스탈린의 마음을 사다

최종적으로 보리스 요판의 설계안이 선정되었다. 평범하고 특별한 점이 없었지만, 꼭대기에는 '해방된 프롤레타리아트' 조각상이 세워질 예정이었다(출처: 퍼블릭 도메인).

운명은 가족 안에 머물다

그제시 시갈린은 결국 요판에게 패배했지만, 그의 설계안은 스탈린 본인으로부터 상을 받았다. 소련에 깊은 원한을 품게 된 르 코르뷔지에와 달리, 젊은 건축가는 자신이 확실히 인정받았다는 느낌을 받았다. 2년 후 인민위원평의회가 모스크바 개조 종합 계획을 채택하자, 시갈린은 동쪽으로 떠난 첫 번째 사람들 중 하나였다.

그는 국립건축국에서 일자리를 구하는 데 성공했지만, 당시 소련의 모든 거주민과 마찬가지로 완전한 안전을 느낄 수는 없었다. 곧 그에 대한 소식이 끊겼다. 러시아 아카이브가 공개된 후에야 비로소 그가 허위 고발로 체포된 뒤 처형되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공산주의를 경멸하던 바르샤바의 유대인 건축가, 스탈린의 마음을 사다

이 글은 베아타 호몬토프스카의 『팔라체, 친밀한 전기』(SIW Znak 2015) 등을 바탕으로 작성되었다.

그러나 시갈린 가문의 운명은 소련 건축 사상과 뗄 수 없이 이어져 있는 듯하다. 그제시가 죽고 몇 년 후, 그의 남동생 유제프(Józef)는 비에루트 동지에 의해 바르샤바 수석 건축가이자 문화과학궁전 건설 담당 전권대사로 임명되었다.

세상에서 유일한 '진짜' 불가사의

그렇다면 소비에트 궁전은 어떻게 되었을까? 요판의 계획은 다른 건축가들과 스탈린 본인에 의해 여러 차례 수정되었다. 원래의 '해방된 프롤레타리아트' 조각상은 블라디미르 레닌의 조각상으로 바뀌었다. 최종 설계안은 1934년에 발표되었다. 베아타 호몬토프스카는 종이 위의 소비에트 궁전이 마치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과 킹콩 형상의 기묘한 조합처럼 보였다고 정곡을 찌른다. 건물은 416미터 높이로 계획되었으며, 그중 80미터는 고층 빌딩 꼭대기에 세워질 레닌 조각상이 차지했다.

소비에트 궁전의 건설은 1937년에 시작되었다. 공사가 시작되기도 전에 모스크바 언론은 새로운 세계 불가사의의 탄생을 예고했다. 여덟 번째가 아니라 '당당한 첫 번째', 노예의 손이 아니라 자유로운 민족의 손으로 처음 지어지는 불가사의라고 말이었다. 그러나 독일군의 공세가 시작되면서 공사는 중단되었고, '가장 아름다운 프롤레타리아트의 기념비'는 끝내 완공되지 못했다.

공산주의를 경멸하던 바르샤바의 유대인 건축가, 스탈린의 마음을 사다

계획에 따르면 소비에트 궁전은 진짜 세계 불가사의가 될 예정이었다. 그것도 여덟 번째가 아니라 '당당한 첫 번째'(출처: 퍼블릭 도메인).

그러나 그에 대한 기억은 오래 지속되었고, 바르샤바 문화과학궁전과 소련 각 공화국에 세워진 '자매 건물들' 건설의 영감이 되었다. 모스크바 상공에 우뚝 선 레닌의 모습은 오랫동안 소련 영화와 문학 속에 등장했다.

참고 문헌

  1. 베아타 호몬토프스카, 『팔라체, 친밀한 전기』, SIW Znak, 크라쿠프 2015.
  2. 야쿠브 사독스키, 『소비에트 궁전과 문화궁전 사이, 전체주의 문화 연구』, Libron, 크라쿠프 2009.
  3. 우카시 비레타, 「건축가 예지 겔바르트와 로만 시갈린의 삶과 작품」, 1부, [수록:] 『한 달에 한 번, 대개 건축에 대해』[우카시 비레타의 블로그], 2013년 12월 31일 [열람일: 2015년 7월 18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