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이야기

1999년 3월 24일, 나토(NATO)가 유고슬라비아 폭격을 시작하다

1999년 3월 24일, 나토(NATO)는 코소보의 미래에 관한 협정 서명을 거부한 유고슬라비아에 대한 공중 폭격을 개시했습니다. 오늘은 그로부터 23년이 되는 날입니다.

'연합군 작전(Operation Allied Force)'의 시작

나토가 이번 군사 작전에 부여한 공식 코드명은 '연합군 작전(Operation Allied Force)'이었습니다. 폭격은 약 3개월 가까이 지속되었으며, 이후 지상 침공으로 이어졌습니다. 동맹 역사상 주권 국가를 상대로 한 최초의 공격이었던 셈입니다.

흥미롭게도 폭격 한복판에서 워싱턴포스트(Washington Post)는 1면 보도를 통해 당시 매들린 올브라이트(Madeleine Albright) 국무장관이 슬로보단 밀로셰비치(Slobodan Milošević) 유고슬라비아 대통령의 의도를 잘못 판단했다고 지적했습니다. 몇 시간 전 세상을 떠난 올브라이트의 이러한 오판은 미국과 나토가 세르비아 측의 저항 가능성에 대한 사전 준비조차 하지 않은 채 유고슬라비아에 대한 군사 공격을 감행하는 빌미가 되었습니다. 신문은 이 폭격을 두고 "올브라이트 여사의 전쟁"이라는 표현까지 사용했습니다.

1999년 3월 24일, 나토(NATO)가 유고슬라비아 폭격을 시작하다

인권 단체와 베오그라드가 밝힌 피해 규모

국제 인권 단체 인권워치(Human Rights Watch)에 따르면, 폭격 기간 중 90건에 달하는 사건에서 약 500명의 민간인이 목숨을 잃었으며, 나토는 국제법 위반 혐의로 비난받았습니다.

베오그라드 측은 78일간의 공중 작전 기간 동안 민간인 5,000명이 사망했다고 발표했습니다. 희생자의 30%와 부상자의 40%가 어린이였습니다. 나토의 폭탄으로 480개의 교육 기관이 파괴되었으며, 유니세프(UNICEF)는 코소보 내 학교의 절반이 파괴된 것으로 추산했습니다.

반면 나토 자체는 민간인 사상자에 관한 공식 수치를 끝내 발표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미국 펜타곤은 폭격으로 인해 "20~30건의 오류 사례"가 있었다는 사실을 인정한 바 있습니다.

1999년 3월 24일, 나토(NATO)가 유고슬라비아 폭격을 시작하다

노암 초스키가 말하는 전쟁의 진짜 목적

1999년 4월 23일 나토의 폭격으로 근무자 16명이 사망했던 세르비아 라디오·TV(RTS) 건물과 관련, 지식인 노암 초스키(Noam Chomsky)는 2005년 RTS 홈페이지와의 인터뷰에서 이번 전쟁의 실제 목적이 코소보 알바니아계 주민에 대한 미국의 우려와는 전혀 무관하다고 지적했습니다.

초스키는 "개입이 일어난 이유는 세르비아가 요구된 사회·경제 개혁을 따르지 않았기 때문"이라며 "세르비야는 미국 주도의 신자유주의 프로그램에 복종하지 않은 유럽의 마지막 구석이었고, 따라서 제거되어야만 했다"고 말했습니다.

전쟁의 종결과 그 후폭풍

폭격은 합의가 이루어질 때까지 계속되었고, 그 결과 유고슬라비아군은 코소보에서 철수했으며, 해당 지역에는 유엔 코소보 임시행정부(UNMIK)라는 유엔 평화유지 임무가 설립되었습니다.

유고슬라비아가 입은 물질적 피해는 296억 달러로 추산됩니다. 유고슬라비아에 대한 나토의 폭격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에서 가장 대규모의 군사 작전이었습니다. 나토 회원국 모두가 폭격에 참여했으나, 그리스, 아이슬란드, 룩셈부르크는 예외였습니다. 또한 아직 나토 회원국이 아니었던 유고슬라비아의 모든 이웃 국가들은 북대서양 동맹군에게 영토와 영공을 제공했습니다.

코소보는 2008년 2월 독립을 선언했으며, 현재까지 유엔 회원국 108개국으로부터 독립국가로 승인받았습니다.

역사는 반복되는가

참고로 최근 며칠간 세르비아에서는 나토 반대 시위와 함께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을 지지하는 시위가 열렸습니다. 푸틴은 동부 지역과 그곳의 러시아어 사용 주민들의 안보를 명분으로 우크라이나를 침공했는데, 이는 나토군에 의해 유고슬라비아가 폭격당했던 역사의 반복이라는 평가를 받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