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간기(두 차례 대전 사이 시기)의 남성들에는 지금은 사라진 특별한 매력이 있었다. 단정하게 면도를 하고, 세련되게 옷을 입고, 탄탄한 체격에 부드럽게 흘러내리는 머리칼까지 갖춘 그들은 여성들의 마음을 쉽게 사로잡았다. 오늘은 우리 증조모 세대가 한 없이 탐냈던, 전쟁 전 폴란드의 미남들을 소개한다.
유게니우시 보도 (Eugeniusz Bodo)

전간기 최고의 로맨티스트 중 한 명, 유게니우시 보도 (사진: 퍼블릭 도메인)
유게니우시 보도, 본명은 보흐단 외젠 주노(Bohdan Eugène Junod). 1899년생으로 폴란드 여성과 스위스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나 이중 국적을 지녔다. 아버지는 영화라는 새로운 매체에 푹 빠져 차르 통치하던 러시아 등지를 돌아다니며 필름 상영회를 열었다. 보도가 '열 번째의 뮤즈'라 불린 영화와 처음 만난 것도 바로 아버지 덕분이었다. 불과 10세에 아버지가 운영하던 '우라니아' 환상극장 무대에 서며 배우 인생을 시작했다.
10대 시절에는 레뷰 무대에서 가수이자 무용수로 활약했고, 1919년부터는 '끼 프로 쿠오(Qui pro Quo)', '바르샤바 이발사(Cyrulik Warszawski)' 같은 당대 최고의 카바레에 이름을 올렸다. 1925년 영화에 데뷔한 뒤로는 커리어가 순항을 거듭했다. 흥미롭게도 그는 의류 브랜드의 얼굴로 발탁된 최초의 폴란드 스타이기도 했다.
여성들의 우상이었던 그는 신사적이고 매혹적인 남자라는 평판을 얻었다. 한편으로는 술 한 잔 하지 않는 금주주의자이기도 했다.
알렉산데르 잡친스키 (Aleksander Żabczyński)

영화 '웃는 여인(The Woman Who Laughs)' 속 알렉산데르 잡친스키 (사진: 퍼블릭 도메인)
알렉산데르 잡친스키가 짙은 눈썹 밑으로 시선을 던질 때면, 전간기 폴란드 여성들은 다리에 힘이 빠질 지경이었다고 한다. 젊은 시절만 놓고 보면 영화계에서의 화려한 성공은 전혀 예감되지 않았다. 그는 포즈난의 사관학교와 법학교를 다녔고, 민법 시험에서 낙방하는 등 학업은 순탄하지 않았다. 결국 예비역 장교로 복무하던 시절, 자신의 진짜 열정이 연기임을 깨닫고 무대에 뛰어들었다.
그는 극장을 깊이 존경하며 연극 무대에서 출발했지만, 진짜 대중적 인기를 가져다준 것은 영화였다. 폴란드 영화계의 1급 스타로서 배역이 아예 그를 위해 집필되기도 했다. 1939년 8월 군에 소집되어 유명한 제2군단에서 싸웠고, 몬테카시노 전투에서 부상을 입었으며 수많은 훈장을 받았다. 전쟁이 끝난 후에는 폴란드로 돌아와 극단에서 연기를 이어갔다.
아돌프 딤샤 (Adolf Dymsza)

아돌프 딤샤 (사진: 퍼블릭 도메인)
아돌프 딤샤, 본명 아돌프 바긴스키(Adolf Bagiński)는 영화에서 '도데크(Dodek)'라는 이름으로 잘 알려졌으며, 1900년 바르샤바에서 태어났다. 고향의 상업학교에서 교육을 받았지만 그의 진정한 소명은 연극이었고, 18세에 무대에 데뷔한 뒤 점차 가장 인기 있는 레뷰 배우로 자리매김했다.
그는 무성영화에서 첫발을 내디뎠지만, 유성영화 시대가 열리면서야 비로소 그의 코믹한 재능이 만개했다. 1935년은 폴란드 영화계에서 '딤샤의 해'라고 불릴 정도였다. 그러나 전쟁이 발발하자 여성들의 마음을 한몸에 받던 이 사랑받는 배우는 추천의 단상에서 내려왔다. 그가 점령당국이 공식 허가한 극장에 출연하기로 선택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전후 그는 수십 년간 바르샤바 무대 출연을 금지당했다.
이고 심 (Igo Sym)

1896년생 이고 심, 본명 카롤 안토니 율리우시 심(Karol Antoni Juliusz Sym)은 마치 최고급 석공 작업장에서 조각해낸 듯한 이목구비를 지니고 있었다. 그 완벽한 미모는 영화계에서의 성공을 보장해 주었고, 그는 대개 우아한 남자, 즉 귀족이나 장교 역을 주로 맡았다.
어머니가 오스트리아인이었던 덕에 그는 독일과 오스트리아 영화에도 출연했다. 전쟁이 발발하자 처음에는 바르샤바 방어전에 참여했지만, 이후 폭스도이체(Volksdeutsche, 독일계 시민)를 자처하면서 독일은 그의 전간기 명성을 선전에 이용하기 시작했다. 그는 게슈타포의 밀정이 되어(가수 오르동카를 체포하기도 했다) 반폴란드 작품에 배우들을 모집하는 일에 가담했다. 결국 1941년, 폴란드 지하 저항조직의 처형을 받았다.
프란치셰크 브로드니에비치 (Franciszek Brodniewicz)

영화 '검사 알리차 혼'에서 야드비가 스모사르스카와 함께한 프란치셰크 브로드니에비치 (사진: 퍼블릭 도메인)
프란치셰크 브로드니에비치의 매력은 이마를 가로지르는 깊은 주름에서 크게 나왔다. 이 주름은 그의 얼굴에 사려 깊은 인상을 부여했으면서도 은근한 불길함까지 더해 주었다. 영화 '검사 알리차 혼(Prosecutor Alicja Horn)'에서 호흡을 맞춘 스크린 파트너 야드비가 스모사르스카는 이렇게 말했다.
“브로드니에비치에게는 우리 연애 배우들이 늘 갖지 못한 것이 모두 있다. 남자다움, 큰 키, 그리고 위풍. 거기에 따뜻하고 울림 좋은 목소리까지 더해지지.”
브로드니에비치는 41세에 '검사 알리차 혼'에 출연했고, 이후로는 해마다 여러 편의 영화에 등장하며 전성기를 구가했다. 그러나 그의 대단한 행진은 전쟁 발발로 끊겼다. 독일 점령기 동안 그는 공개 제작 영화 출연을 거부했고, 바르샤바 봉기 중 심장마비로 생을 마감했다.
미에치스와프 치불스키 (Mieczysław Cybulski)

미에치스와프 치불스키 (사진: 퍼블릭 도메인)
자연은 미에치스와프 치불스키에게 강력한 무기를 쥐여 주었다. 극도로 길고 짙은 속눈썹이 푸른 눈동자를 감싸 프레임처럼 두드러지게 했고, 천사 같은 얼굴과 어우러져 여성들에게 전기가 통하듯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여기에 두텁고 부드러운 갈색 머리칼이 전체적인 분위기를 완성했다.
치불스키는 미남이었지만 자신과 명성에 대한 건전한 거리감과 유머 감각을 갖춘 인물이었다. 조각상 같은 외모 탓에 대개 연애극의 주인공 역을 맡았는데, 그는 자신의 배역들을 놀리듯 '허둥대는 꼬마' 혹은 '감상적인 어린애'라고 불렀다.
그럼에도 그는 연기를 진지하게 대했다. 좋은 평가를 쌓았고 영화관마다 팬들의 행렬이 이어졌다. 하지만 그는 영화만으로 살겠다는 생각은 없었다. 그의 철학은 명확했다. 연기는 다른 안정된 직업이 있을 때 겸업으로 하는 직업이라는 것. 실제로 그는 국영버스회사의 운행 검사원이라는 자신의 직책을 자랑스러워했다.
볼레스와프 비엔리아바-드우고쇼프스키 (Bolesław Wieniawa-Długoszowski)

1916년, 35세의 미남이었던 볼레스와프 비엔리아바-드우고쇼프스키 (사진: 퍼블릭 도메인)
볼레스와프 비엔리아바-드우고쇼프스키는 단연코 전간기 폴란드에서 가장 유명한 창기병이자, 당대의 전설적인 '창기병 환상'의 살아있는 화신이었다. 그는 그 시대 가장 다채로운 인물 중 한 명으로, 그의 과분한 방탕에 대한 소문과 험담은 폴란드 상류사회는 물론 해외에서도 회자되었다.
교양 있고 신사적인 그는 시를 쓰고, 군복을 자랑스럽게 입었으며, 여성의 매력에 남다르게 민감했다. 이 모든 것이 숙녀들로 하여금 그를 황홀한 눈빛으로 바라보게 만들었다. 수많은 여성과의 연애설이 끊이지 않았다.
결투가 금지되던 시대였음에도 그는 열정적으로, 그리고 자주 결투장에 섰다. 학생 시절에는 금주주의자였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태도가 바뀌어 끝내는 바르샤바 엘리트 사회에서 가장 강한 술꾼으로 이름을 날렸다.
율리우시 오스테르바 (Juliusz Osterwa)

율리우시 오스테르바 (사진: 퍼블릭 도메인)
그의 본명은 율리우시 안제이 말루셰크(Juliusz Andrzej Maluszek)로, 궁정 문지기와 산파의 아들이었다. 예명 '오스테르바'는 학창 시절 친구였던 레온 실러가 지어준 것이다. 그의 시작은 순탄하지 않았다. 어머니가 돌아간 후 그는 고아처럼 친척들의 집을 전전하며 자랐다. 최종 시험에 합격하지 못하자 연극계에서 일자리를 찾았지만, 기회를 놓치고 중요한 인연들과 어긋나는 시기를 보냈다.
그러다 마침내 진짜 기회를 잡았을 때, 그는 스워바츠키의 작품을 통해 자신의 실력을 유감없이 보여 주었다. 위대한 재능은 그의 미모와 더불어 수많은 팬들의 찬사를 불러일으켰다. 스물 조금 넘은 나이에 결혼을 결심하자, 그에게 반해 있던 여성들은 절망에 빠졌다. 필사적으로 그들은 신부 예정자와 배우 본인에게까지 애원과 협박이 가득 담긴 편지를 보냈다고 한다.
야로스와프 이바슈키에비치 (Jarosław Iwaszkiewicz)

1914년의 야로스와프 이바슈키에비치 (사진: 퍼블릭 도메인)
우리는 야로스와프 이바슈키에비치를 주로 시인이자 산문가, 번역가로 기억한다. 이미지를 떠올리자면 대개 인민공화국 시대의, 정수리가 텅 빈 머리에 뿔테 안경을 쓴 노년의 모습일 것이다.
그러나 학교에서 그의 작품을 배우던 그 진지한 인물은 젊은 시절에는 키가 크고 체격이 좋으며 긴 얼굴의 매력적인 미남이었다. 남자와 여자 모두 그를 뒤따랐다고 하며, 그 자신은 양성애자였다고 전해진다. 그는 안나 릴포푸브나(Anna Lilpopówna)와 결혼하여 서로 완벽히 통하는 부부의 삶을 살았다.
얀 키에푸라 (Jan Kiepura)

얀 키에푸라 (사진: 퍼블릭 도메인)
세계적인 가수가 되기 전, 얀 키에푸라는 소스노비에츠의 평범한 빵집 아들이었다. 대학에 들어가(전쟁 전에는 법학이 인기 학과였다) 공부를 시작하면서 동시에 성악 레슨도 받기 시작했다. 변호사는 되지 않았지만, 대신 그의 아름다운 테너 목소리는 곧 관객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는 미모와 천사 같은 목소리를 모두 갖춘 남자였다. 폴란드 미스였던 조피아 바티츠카와 거의 결혼할 뻔하기도 했는데, 미스의 아버지가 온갖 사회 계층의 숙녀들이 '조니'에게 매력을 아낌없이 퍼붓는 모습을 보고 만류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훗날 훈남 키에푸라가 마침내 한 곳에 정착하자, 그는 더 이상 다른 여성들에게 눈을 돌리지 않았다. 그의 대표 히트곡 '흑발 여인들, 금발 여인들(Brunettes, Blondes)'에서 노래했듯, 그는 모든 여인들에게 입맞춤하고 싶어도 오직 한 사람만이 그에게 중요했다. 바로 마르타 에거트(Marta Eggerth)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