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들은 깃털은 물론 새 통째로를 장식으로 모자에 얹었습니다. 이 기괴한 패션 유행으로 수십만 마리의 개체가 목숨을 잃었고, 오늘날 일부 종은 멸종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19세기 잉글랜드에서 갈매기들의 삶은 순탄하지 않았습니다. 1830년대 서부 해안에 여객 노선이 개통되면서, 승객을 실은 증기선들은 새들을 쏘아 맞힐 수 있도록 정차하기까지 했습니다. 패션이 갈매기를 요구하는 순간, 그들의 운명은 사실상 정해진 것이나 다름없었습니다.
이 유행은 1774년 프랑스 왕비로 즉위한 마리 앙투아네트와 그녀의 궁정 신하들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그들이 뽐낸 깃털 장식 헤어스타일은 마차 절반을 차지할 만큼 화려했습니다. 이후 수십 년 동안 이 추세는 더욱 강해졌으며, 특히 대영제국에서 두드러졌습니다.
아담 니콜슨(Adam Nicolson)이 저서 『바닷새의 비명: 하늘 방랑자들의 사라지는 세계』에서 소개했듯이, 1891년 로스앤젤레스 타임스는 "잘 차려입은 여성은 마치 갓 둥지에서 꺼내온 새처럼 깃털투성이다"라며 이 현상을 지적했습니다. 거의 20년 후에는 또 다른 신문이 "겨울에 유행을 따르고 싶다면 몸에 깃털을 달아야 한다"고 보도했습니다.
생물 시간에서 배웠듯이, 인간은 아무리 애를 써도 등에 깃털이 돋지 않습니다. 따라서 깃털에 대한 끊임없는 패션 열풍은 새들에게 피비린내 나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 19세기 마지막 10년의 비토리오 마테오 코르코스(Vittorio Matteo Corcos)의 그림 (사진: 퍼블릭 도메인)
새들에 대한 대량 학살
19세기에는 진짜 깃털과 구분하기 어려운 인조 깃털을 만들 기술이 없었습니다. 어차피 당시의 유행 선도자들은 반쪽짜리 대용품으로 만족할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다니엘 제임스 콜(Daniel James Cole)과 낸시 다일(Nancy Deihl)이 1850년 이후의 패션사를 다룬 저서에서 밝혔듯이, 1890년대에는 다음과 같은 상황이 벌어졌습니다.
"깃털, 특히 타조와 왜가리 깃털은 없어서는 안 될 필수품이 되었고, 그 판매와 거래는 하나의 거대한 산업으로 폭발적으로 성장했습니다. 새의 통째 날개—경우에 따라서는 새 통째로—가 극적인 모자 장식이 되었습니다. [...] 깃털이 모자 패션을 주도하는 동안, 오듀본 협회(Audubon Society)와 다른 단체들은 이런 용도로 새를 도살하는 행위에 반대하는 항의를 벌였습니다."
모자 패션을 맹목적으로 좇던 여성들의 입맛을 충족시키기 위해, 특정 조류의 포획에만 전념하는 공동체 전체가 생겨났습니다. 잉글랜드 데번(Devon)의 한 마을에서는 거의 일 년 내내 손으로 깃털 장식물을 가공했습니다. 이 마을은 새들이 좋아하는 절벽이 가까이 있어 그런 기술을 가진 사람들에게 이상적인 곳이었습니다.
그 결과 성수기에는 숙련된 깃털 채집꾼이 하루에 무려 700마리의 새에서 깃털을 뽑을 수 있었다고 합니다. 아담 니콜슨은 저서에서 이렇게 적습니다.
"19세기 한 추산에 따르면, 단 2주 만에 최대 9천 마리의 런디 섬 갈매기가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레이트브리튼 해안의 섬 — 편집자 주] "설령 과장된 수치라 하더라도, 런디 섬의 세발가락갈매기 개체군(현재 겨우 100쌍 남짓이며 계속 감소 중)이 빈번하고 정기적인 사냥의 희생양이 되었다는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 가장 유행했던 에드워드 시대 모자의 또 다른 사례. 새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듭니다…
영국 제도의 자연학자들은 종을 구하기 위해 움직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들은 패션을 바꾸거나 이 새들의 아름다움에 감탄하려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생물 다양성 보전이 더 중요했고, 규제 없이 자행된 대규모 사냥은 세발가락갈매기를 멸종 직전까지 몰아넣었습니다. 1869년 영국 의회는 번식기 동안 바닷새 사냥을 금지하는 최초의 법률을 제정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까지도 이 종의 운명은 여전히 불확실합니다. 그리고 그 모든 책임은 살인적인 패션을 향한 집착에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