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로부터 고립되고, 비좁고, 굶주린 사람들. 독일군의 자의와 굴욕에 내맡겨진 나치 점령 유럽 최대의 게토에 갇힌 사람들은, 터무니없는 현실 속에서도 '정상적인 일상'의 대체물이라도 얻으려 필사적으로 노력했습니다. 그들의 일상은 과연 어떠했을까요?
바르샤바 게토는 1940년 11월 16일 봉쇄되었습니다. 인구가 정점에 달했던 1941년 여름에는 무려 46만 명의 유대인이 이곳에 살았습니다. 몇 달 뒤, 훗날 케디프(Kedyw)의 엘리트 부대 '콜레기움 A' 소속이 되어 바르샤바 봉기에도 참전하게 되는 스타니스와프 아론손(가명 '리시에크')은 부모님과 함께 게토로 들어갔습니다. 강제수용소행보다는 차라리 게토에서 사는 편이 낫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저서 『내일 전쟁이 온다』에서 이렇게 회상합니다.
"나는 열여셧 살이었다. 그때 처음으로 인도 위에서 시체를 보았다. 밀랍 인형처럼, 여동생 장난감처럼 창백한 시체였다. 신문으로 덮인 채 누워 있었다. 그리고 거리 곳곳에는 넝마를 걸친 좀비들이, 좀비 떼가 있었다. 충격이었다. 그 순간 나의 삶은 끝났고, 청춘도 끝났다."
사람은 결국 익숙해진다
벽 안의 첫날들은 십 대 소년에게 잔혹할 만큼 힘들었습니다. 특히 도처에 만연한 굶주림이 그를 짓눌렀습니다. 게토 설립부터 1942년 7월 22일 주민들을 트레블링카로 추송하기 시작할 때까지 약 9만 명이 질병과 영양실조로 사망했습니다. 하지만 그가 말하듯, 시간이 지나면 사람은 이런 충격적인 광경에도 익숙해집니다.
"하루, 이틀, 며칠이 지나면 거리를 배회하는 살아 있는 시체들은 더 이상 아무 느낌도 주지 않는다. 누군가 인도에 쓰러져 죽어가고 있다 해도, 이미 죽어 신문 아래 누워 있다 해도 말이다."

스타니스와프 아론손(1946년 촬영)은 게토에 1년도 채 살지 못했습니다. 강제수용소행 수송열차에서 탈출하는 데 성공했고, 이후 저항운동에 합류했습니다.
그 자신은 운이 좋은 편이었습니다. 가족은 비극 속에서도 경제적으로는 나쁘지 않은 형편이었습니다. 기자 에밀 마라트, 미하우 부이치크와의 긴 인터뷰 형식으로 쓰인 『내일 전쟁이 온다』에서 아론손은 이렇게 털어놓습니다. "나는 한 번도 넝마를 입지 않았고, 빵 한 조각을 훔치라고 강요당한 적도 없다. 밀수꾼이 된 적도 없다." 하지만 그는 곧 덧붙입니다.
"우리는 조금 더 형편이 좋은 편이었다. 모두가 죽음을 기다리는 대기실에 있었지만, 당시 우리는 그 사실을 알지 못했다. 그리고 그 대기실 안에서 어떤 이들은 굶주렸고, 어떤 이들은 그렇지 않았다. 어떤 이들은 넝마를 입었고, 어떤 이들은 입지 않았다. 그게 정말 중요한 일이었을까?"
그의 추산으로는 게토 주민의 약 20퍼센트가 최악의 조건 속에서 살았습니다. 나머지 사람들의 상황도 계속 악화되긴 했지만 치명적이지는 않았습니다. "옷은 남루하고 굶주렸지만, 암시장에서 물건을 사면서도 어떻게든 살아냈다"고 그는 회상합니다. 그가 벽 안에서 가족과 함께 보낸 1년 미만의 시간은 의외로… 단조롭게 기억됩니다. 낮에는 일하고(게토 유대인의 의무였습니다), 저녁에는 비밀 학급에서 공부했습니다. 그의 말입니다.
"나는 아스트라 계산기 공장에서 일했다. 일자리는 꽤 괜찮았다. 오전 8시부터 오후 6시까지. 그곳에서 식사도 하나 주었다. 저녁에 집으로 돌아왔다. 가는 길에 도시를 관찰할 수 있었다.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보았다. 하지만 다행히 헌병이 사람을 죽이는 것을 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게토는 스스로 죽어갔다
1942년 7월, 독일이 바르샤바 게토의 유대인들을 트레블링카 절멸수용소의 가스실로 추송하기로 결정하기 전까지, 폐쇄된 구역의 거리는 붐비고 시끄러웠습니다. 쓰레기 악취가 공중에 감돌았지만 그곳에는 생명력이 넘쳤습니다. 노점상, 소규모 산업, 서비스업은 물론 콘서트, 연극 공연, 종교 행사 같은 문화와 오락도 존재했습니다.

물자 공급 상황은 끔찍했습니다. 식량, 의약품, 기본적인 위생용품이 부족했습니다. 하지만 그 외에는 —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 벽 안은 평온했습니다. 스타니스와프 아론손은 『내일 전쟁이 온다』에서 이렇게 회상합니다.
"나는 그 터무니없는 평온함을 기억한다. (...) 사람 사냥, 연행은 벽 너머에서만 보았다. 그 이후에야 말이다. 참으로 역설적이다. 독일인들은 바르샤바 다른 지역에서처럼 게토를 그렇게 자주 드나들지 않았다. 거리에서 사람들을 테러하지 않았다."
"어쩌다 히틀러유겐트 소년들이 놀러 오기도 하고, 휴가 나온 병사들이 지나가기도 했다. 사파리를 하듯 와서 총을 쏘고 웃으며 지나갔지만, 그 정도였다. 게토는 추송이 시작될 때까지 스스로 죽어갔다. 굶주림 때문에."
모든 것이 7월 22일에 바뀌었습니다. 거리는 하룻밤 새 죽은 듯 텅 비었습니다. 움슐라크플라츠(Umschlagplatz)로 몰려가는 사람들의 행렬만이 침묵 속을 이동했습니다. 아론손 가족도 그 행렬에 있었습니다. 스타니스와프는 부모님과 그 자리에서 헤어졌고, 두 번 다시 만나지 못했습니다.
그는 바르샤바 근교 들판에서 열차가 멈췄을 때 수송열차에서 빠져나오는 데 성공했습니다. 가축수송 화차의 창문을 뚫고 밖으로 뛰어내린 것입니다. 1943년 1월 18일, 혹은 19일이나 20일이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탈출에 대해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열여덟 살이었고, 힘이 셌다. 그래서 해냈다. (...) 아무도 나를 눈치채지 못했고, 아무도 총을 쏘지 않았다. 나는 살고 싶었다. (...) 참지 못할 것 같은 충동을 느꼈다. 그런 시절에는 그런 충동이 삶과 죽음을 가렸다. 목숨은 우연에 달려 있었다."
참고 문헌
본문은 스타니스와프 아론손, 에밀 마라트, 미하우 부이치크의 저서 『내일 전쟁이 온다: 전설의 국내군 케디프 병사가 경고하다』(Znak Litera Nova, 2019)를 바탕으로 작성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