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이야기

시코르스키 장군의 마지막 비행: 지브롤터 추락 사고의 미스터리

여전히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

1943년 7월 4일, 브와디스와프 시코르스키(Władysław Sikorski) 폴란드 총리 겸 최고사령관이 탑승한 빌러레이터(Liberator) 수송기가 지브롤터 앞바다에 추락했습니다. 그로부터 8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지만 이 사고의 정확한 원인은 아직도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영국은 관련 기록을 2033년까지 기밀로 유지하고 있으며, 난무하는 암살 음모론들은 스몰렌스크 대통령 전용기 추락 사건 이후 제기됐던 각종 이론들을 연상시킵니다.

시코르스키 장군의 가장 널리 알려진 사진 중 하나는 총리 겸 최고사령관이 빌러레이터기에 오르는 모습입니다. 1943년 7월 4일, 그는 이런 비행기에 마지막으로 탑승하는 모습이 목격되었습니다. 함께 탑승한 이들은 장군의 딸 조피아 레시니우스카(Zofia Leśniowska), 부관, 비서, 영국인 2명, 6인 승무원 등 총 17명이었습니다.

그로부터 잠시 후, 지브롤터 바위에서 약 500미터 떨어진 해상에서 비행기가 바다로 떨어지기 시작했습니다. 기체는 수면에 충돌한 뒤 물속에서 뒤집혀 가라앉았습니다. 경보가 울리고 탐조등이 가라앉는 기체를 비췄습니다. 구조선이 도착했을 때 비행기는 랜딩기어를 세운 채 해저에 가라앉아 있었습니다. 살아남은 이는 체코계 조종사 에드워드 막스 프찰(Edward Max Prchal) 대위 단 한 명뿐이었습니다. 승객 전원과 나머지 승무원은 모두 사망했습니다. 시코르스키의 시신은 여러 곳에 상처를 입은 채 발견되었으며, 조피아 레시니우스카를 포함한 일부 시신은 끝내 찾지 못했습니다.

VIP 라운지로 개조된 그 빌러레이터기는 최고사령관이 중동으로 향해 폴란드군을 시찰할 때 탔던 바로 그 기체였고, 귀환길에 지브롤터에 들렀습니다. 게다가 시코르스키 본인이 영국 측에 이 기체와 승무원의 배정을 요청했는데, 그는 체코인 조종사의 실력과 역량을 높이 평가했기 때문입니다.

총리, 장군, 무직 장교, 그리고 최고사령관

브와디스와프 시코르스키는 제2차 폴란드 공화국의 국경 수비 전투에서 이름을 알렸고, 리비우(Lwów) 군관구 사령관을 맡았습니다. 신생 폴란드 초창기에는 경력이 순식간에 상승해 잠시 총리직까지 역임했습니다. 그러나 1926년 5월 쿠데타 때 피우수츠키(Józef Piłsudski)를 지지하지 않으면서 이후 행보가 결정되었습니다. 1939년 9월에는 군 직위 없이 방치된 상태였을 정도였습니다. 그는 9월 전쟁 와중에 프랑스로 향하는 데 성공했고, 그곳에서 폴란드군과 망명 정부를 재건했습니다. 그는 망명 정부의 수반이 되었고, 대통령은 시코르스키를 총사령관 겸 무력총감찰관으로 임명했습니다. 시코르스키 역시 산치아(Sanacja) 진영의 정적들에게, 그들이 자신에게 했던 것과 같은 방식으로 대응했습니다.

시코르스키 장군의 마지막 비행: 지브롤터 추락 사고의 미스터리

1941년 지브롤터를 이전에 방문했을 당시의 시코르스키 장군. 왼쪽은 맥팔레인(Macfarlane) 총독, 오른쪽 앞쪽은 빅터 카잘렛(Victor Cazalet), 그 뒤에 타데우시 클리메츠키(Tadeusz Klimecki) 장군이 있습니다. 시코르스키 뒤에 있는 민간인은 유제프 레팅어(Józef Retinger)입니다.

당시 시코르스키와 관련된 가장 중요한 사건 중 하나는 소련과의 외교 관계 수립이었습니다. 이 협정은 1941년 7월 30일 런던에서 시코르스키와 주영 소련 대사 이반 마이스키(Ivan Majski)가 서명했기에 '시코르스키-마이스키 협정'이라 불립니다. 시코르스키는 냉철한 정치가였습니다. 소련과 국교가 단절된 후(카틴 학살 문제)에도 그는 폴란드의 운명이 소련의 손에 달려 있다는 사실, 따라서 그들과 합의해야 한다는 점을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시코르스키 장군은 연합국으로부터 인정받았고, 국내에서도 큰 권위자로서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었습니다. "해가 높이 오를수록 시코르스키가 더 가까워진다"는 말이 유행할 정도였습니다.

암살인가, 사고인가?

참사 직후부터 사람들은 원인이 무엇인지 궁금해하기 시작했습니다. 추락 원인을 조사한 위원회는 오로지 영국 공군 장교들로만 구성되었습니다. 폴란드 측 추가 위원은 질문조차 할 수 없었습니다. 항공기 제작사 대표단의 참관도 허용되지 않았습니다. 공식적인 사고 원인은 '승강타 조종줄의 고착'으로 발표되었습니다.

곧바로 테러 공격설이 제기되었습니다. 물론 독일 선전은 이를 이용해 영국과 소련을 공격의 배후로 몰았습니다. 오랜 세월이 흘렀지만 사건은 여전히 최종적으로 규명되지 않았고, 이는 각종 음모론에 먹거리를 제공합니다. 그중 일부는 스몰렌스크 대통령 전용기 추락 사건을 설명하려던 금속 캔 사용설과 같은 오늘날의 기이한 감정 의견들을 연상시킵니다.

시코르스키 장군의 마지막 비행: 지브롤터 추락 사고의 미스터리

1943년 7월 5일, 희생자 시신 수색 작업

예컨대 첫 다이버들이 조피아 레시니우스카의 시신을 발견했지만, 익사자의 머리카락을 만지면 불운이 온다는 미신적 두려움 때문에 회수하지 않았다는 주장도 있었습니다. 하물며 군 소속 스쿠버 다이버들이 말입니다! 음모론적 역사관을 내세운 이들은 빌러레이터기의 승객들이 이미 이륙 전에 살아있지 않았고, 사고는 공격을 덮기 위한 위장이었다고 주장했습니다.

2008년 11월, 바벨(Wawel)에 안치된 장군의 유해가 정밀 검사를 받았습니다. 검사 결과 장군은 항공·교통 재해 희생자에게 전형적인 다발성 장기 손상으로 사망한 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

2013년 말, 폴란드 국민기억연구원(IPN)은 시코르스키의 죽음에 대한 수사를 종결했습니다. 검찰은 파괴 공작 가능성을 확인할 수도 배제할 수도 없다고 판단했으나, 지브롤터 이륙 전에 암살 시도가 있었다는 가능성은 배제했습니다.

만약 암살이라면, 누구 소행인가?

투폴레프 추락 사건과 마찬가지로 암살설에는 하나의 약점이 있습니다. 과연 누가, 왜 저질렀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론적으로 시코르스키에 대한 공격은 사태를 더욱 복잡하게 만듭니다. 소련은 분명히 이득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폴란드 망명 정부와의 관계를 끊고, 자국군이 폴란드를 점령하게 될 것을 예상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존경받고 인정받는 현실주의 정치가 시코르스키는 그들에게 걸림돌이었습니다. 그러나 소련이 지브롤터를 공격할 능력은 극히 제한적이었습니다. 영국 음모론은 대체로 독일 선전의 후폭풍에 가깝습니다. 굳이 소통이 쉬운 예측 가능한 정치가를 제거할 이유가 있었을까요? 자국민을 희생시켰을까요? 독일 입장에서는 이번 참사가 연합국 진영을 이간질하기에 딱 좋은 기회였습니다.

시코르스키 장군의 마지막 비행: 지브롤터 추락 사고의 미스터리

지브롤터 연안 지중해 해저에 가라앉은 시코르스키 장군의 빌러레이터기 잔해. 사진에 기름 얼룩이 보입니다.

영국 문서들이 이 문제를 규명해 줄 수 있겠지만, 영국은 기밀 유지 기간을 90년, 즉 2033년까지 연장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