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최강국의 어두운 기원
미국인들이 스스로 "세계 최고의 나라"라고 부르는 미국의 역사에는 결코 밝지 못한 장면들이 적지 않습니다. 콜럼버스 시대부터 이어진 인신매매와 노예 제도, 유혈 사태와 식인 행위까지 — 미국인들이 잊고 싶어 할 만한 역사가 그곳에 있습니다.
콜럼버스에서 시작된 노예 제도
미국의 노예 제도 하면 거대한 면화·담배·인디고 플랜테이션에서 혹사당한 흑인 노예들이 떠오르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이 수치스러운 관행은 그보다 훨씬 이전,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의 시대에 아메리카 대륙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지칠 줄 모르는 탐험가 콜럼버스는 1482년부터 포르투갈 노예선의 선원으로 일했습니다. 그렇기에 10여 년 후 그가 후원자인 아라곤의 페르난도와 카스티야의 이사벨에게 보고한 내용도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질 레포어의 저서 『우리, 국민』에 따르면, 콜럼버스는 "50명만 있으면 아이티 주민들을 모두 통제하고 원하는 무엇이든 시킬 수 있다"며 그들을 노예로 삼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으리라 말했습니다.
이후 수십 년간 스페인인들은 현지 주민들을 금광과 플랜테이션에서 가혹하게 부렸고, 그들을 순식간에 몰살시킨 치명적인 병균까지 옮겼습니다. 결국 그들은 포르투갈인들이 판매하는 아프리카인이라는 또 다른 무료 노동력의 공급원으로 눈을 돌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1500년에서 1800년 사이 약 250만 명의 유럽인이 아메리카로 이주하는 동안, 아프리카에서는 무려 1,200만 명이 강제로 끌려갔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는 아메리카를 발견하기 전 포르투갈 노예선의 선원이었습니다.
한편 아메리카 원주민 약 5,000만 명이 목숨을 잃었는데, 주된 원인은 천연두처럼 대양 너머에서는 알려지지 않았던 구대륙의 질병이었습니다. 하지만 당시 권력자들에게 인디언의 죽음은 당연한 결과였습니다. 그들은 어차피 "야만인"이었으니까요.
아내를 식량으로 삼다
인디언의 야만성을 입증하는 근거로 유럽 정착민들은 그들이 자연의 법칙을 어겼다고 주장했습니다. 신대륙 원주민들이 식인 풍습에 빠져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이는 그들과의 전쟁을 정당화하기 위해 퍼뜨린 험담에 불과했습니다.
정작 식인 행위는 바다 건너에서 온 이주민들 사이에서 벌어졌습니다. 1607년 봄, 여성 한 명 없는 영국인 무리가 식민지 건설을 위해 버지니아에 도착하면서 사태는 극단적으로 치달았습니다. 질 레포어는 이렇게 기술합니다.
"식민지 개척자들은 통치 능력이 없음이 드러났다. 그들은 요새를 짓고 금을 찾기 시작했다. 그러나 병사들과 귀족 모험가 무리는 밭을 개간하거나 작물을 심고 수확할 생각이 없었다. 대신 그들은 포우하탄 족에게서 식량을 훔치고 곡물과 콩 창고를 약탈했다."
이는 식민지의 미래를 암시하는 불길한 징조였습니다. 총독으로 선출된 존 스미스는 프랑스와 네덜란드에서 스페인군과 싸운 참전 용사로서, 버지니아에 가장 쓸모없는 사람들이 보내졌다고 쓴소리를 냈습니다. 그는 무리 전체에서 목수 한 명과 대장장이 두 명만을 찾아볼 수 있었고, 나머지는 "공화국을 세우기보다는 망치기에 적합한" 상인, 병사, 귀족들이었습니다.
1608년 스미스는 개척자들에게 일할 동기를 부여하고자 "일하지 않는 자는 먹지도 않는다"는 원칙을 도입했습니다. 그러나 기대한 성과는 나오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다음 해 정착민들은 반란을 일으켜 그를 영국으로 되돌려 보냈고, 버지니아를 "황무지, 폐허, 죽음, 지옥"으로 만들었다고 비난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최악의 악몽 속에서도 진짜 지옥이 아직 오지 않았음을 상상하지 못했습니다.
1609년에서 1610년으로 넘어가는 겨울, 땅을 경작하지 않고 사냥을 게을리하며 이웃을 원수로 만든 대가가 참혹하게 치러졌습니다. 혹한이 몰아친 몇 달 동안 식민지 인구는 500명 이상에서 수십 명으로 급감했습니다. 부총독 조지 퍼시는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굶주림에 많은 이들이 알몸으로 침대에서 뛰쳐나와 앙상한 해골처럼 보이며 외쳤다. 배고프다! 배고프다고! (...) 우리 중 한 명인 콜린은 아내를 살해하고 태중의 아이를 뽑아 강에 던진 뒤, 어머니를 토막 내 소금에 절여 식량으로 삼았다."
증발한 식민지, 로어노크의 미스터리
더 비극적인 결말은 1587년 오늘날의 노스캐롤라이나로 파견된 원정대가 맞았습니다. 해당 지역에 아메리카 최초의 영국 식민지를 세우려는 두 번째 시도였으며, 로어노크 식민지의 총독으로 선출된 화가이자 지도 제작자 존 화이트가 원정을 이끌었습니다.
그는 월터 랄리가 이끈 이전 원정에도 참여한 바 있습니다. 랄리는 아우터뱅크스 섬에 백여 명과 함께 요새를 짓고 주거용 가옥들을 세웠습니다. 처음에 정착민들은 우유와 꿀이 흐르는 땅이라며 영국에 열광적인 보고를 보냈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잔혹했습니다. 해외에서의 식량 수송이 지연되자 개척자들은 굶주리기 시작했고, 결국 절박한 나머지 프랜시스 드레이크 경의 배를 타고 본국으로 돌아갔습니다. 그 전에 그들은 원주민들 사이에 원수를 만들어 두었지요.

개척자들 뒤에는 나무에 새겨진 CRO라는 글자만 남았고, 이는 CROATOAN으로 해독되었습니다.
영국의 두 번째 아메리카 정착 시도는 사실상 실패가 예정되어 있었습니다. 보급품이 다시 차질을 빚자 화이트는 식민지를 버리고 지원을 받기 위해 본국으로 항해했습니다. 문제는 스페인의 침공이 막 시작되어 그가 로어노크 항해에 필요한 배를 구할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결국 식민지는 운명에 내맡겨졌습니다.
"로어노크의 영국 식민지에 관한 모든 정보는 사라졌다. 화이트가 마침내 1590년 돌아왔을 때, 그는 영국인도, 자신의 딸도, 처녀왕 엘리자베스를 기리기 위해 버지니아라 이름 지어진 손녀 아기도 찾을 수 없었다."
"정착지에 남은 것은 나무줄기에 새겨진 CRO라는 세 글자가 거의 전부였다. 이 표식은 화이트와 개척자들이 사전에 약속한 것으로, 정착민들이 짐을 꾸려 더 나은 곳을 찾아 내륙으로 떠났다는 의미였다. 세 글자, 그게 전부다. 그들의 소식은 완전히 끊겼다."
총독의 부재 기간에 요새에서 실제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는 오늘날까지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좋은 일이었으리라고는 기대하기 어렵습니다.
출처
이 글은 질 레포어의 저서 『우리, 국민: 미국의 새로운 역사』를 바탕으로 작성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