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성애와 소년애, 엄격히 구분되던 두 개념
수 세기 동안 전문가들은 '동성애(homosexuality)'와 '소년애(pederasty)'를 엄격하게 구분해 왔다. 전자는 인간의 의지와 무관한 일종의 일탈 혹은 질병으로 간주되었고, 후자는 단순히 항문 성교에 대한 선호 경향을 가리키는 용어였다. 그리고 이들 학자들은 대다수 동성애자들이 이런 의미의 소년애에 대해 깊은 혐오감을 느낀다는 점에 의견을 모았다.
현대 성과학의 아버지 중 한 명이자 성적 지향을 본격적으로 연구한 최초의 학자인 마그누스 히르슈펠트(Magnus Hirschfeld)는 원래 신중한 판단으로 유명한 인물이었다. 그러나 이 문제에 대해서만큼은 그도 확신에 차 있었다. 그는 "소년애는 진정한 동성애와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명확히 적었다.
20세기 초 폴란드의 의사들 역시 같은 입장이었다. 이들은 폴란드 최초의 동성애 인권 옹호자이기도 했던 레온 바흐홀츠(Leon Wachholz)와 안토니 미쿨스키(Antoni Mikulski)였다. 두 사람 모두 실제 사례를 근거로 제시했다.
천 명에 달하는 성적 파트너
미쿨스키의 저서 『의학과 법의 관점에서 본 동성애』(1920)에는 어느 동성애자의 이야기가 등장한다. "그가 관계를 가진 스물일곱 명의 남성 중 소년애에 해당하는 사람은 단 한 명뿐이었으며, 친구가 관계를 맺은 구백예십오 명의 남성 중에서도 오십칠 명만이 소년애를 주장했다"고 저자는 전했다.
![전쟁 전 동성애자들의 은밀한 성생활 [18세 이상]: 초기 성과학자들이 기록한 진실](https://www.historyback.com/article/uploadfiles/202207/2022072018492423.jpg)
안토니 미쿨스키. 폴란드에서 동성애를 최초로 연구한 학자 중 한 명이자, 동시에 다른 성적 지향을 가진 사람들의 권리 옹호자였다(퍼블릭 도메인).
파트너가 거의 천 명에 달한다는 수치는 과장으로 보였지만, 그는 관계 자체를 부정할 생각은 없었다. 다만 이 숫자 속에서 동성애자들의 과장된 서술 습관, 즉 "자신의 지향이 매우 널리 퍼져 있다고 묘사하려는 경향"을 읽어냈다.
바흐홀츠는 좀 더 현실적인 사례를 들었다. 그는 소책자 『우라닌 성감에 대한 비판적 고찰』에서 평범한 우르닝(전쟁 전 어휘로는 동성애자를 뜻함)의 일기를 인용했다. 그 일기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이 모든 관계 속에는 진짜 소년애는 없었다… 그런 남자라면 역겨울 것이다. 나는 그들을 모두 타락한 존재로 여기며, 경멸하고 혐오한다."
구강 성교인가, 아니면 항문 성교인가?
파베우 클링게르(Paweł Klinger)는 1930년 출간된 베스트셀러 안내서 『비타 섹슈알리스: 인간 성생활의 진실』에서 이 데이터를 정리했다. 이는 수년에 걸쳐 무려 만 명의 독일 우르닝에게 접근했던 마그누스 히르슈펠트의 연구에 기반한 것으로 보인다. 클링게르는 이렇게 설명했다. "동성애자 100명 중 40%는 상호 자위에서 성적 만족을 찾고, 40%는 구강 성교(coitus per os)를 하며, 나머지 12%는 대퇴 성교(coitus inter femora)를 활용한다."
![전쟁 전 동성애자들의 은밀한 성생활 [18세 이상]: 초기 성과학자들이 기록한 진실](https://www.historyback.com/article/uploadfiles/202207/2022072018492640.jpg)
그의 견해로는 단 8%만이 항문 성교를 했다. 정확히는 '임미시오 페니스 인 아눔(immissio penis in anum)'을 행했는데, 1930년 당시에는 성과학 교과서에서조차 폴란드어로 쓰기에 적절하지 않았던 용어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인용된 수치는 저자에게 어떤 의심도 불러일으키지 못했다. 그는 수년간 대부분의 법전에서 처벌 대상은 동성애라는 지향 자체가 아니라 오직 '항문 삽입 행위'였다는 사실을 고려하지 않았다.
솔직함인가, 자유인가?
제2공화국 시대 폴란드에서는 1932년까지 분할 지배 시절의 법규가 그대로 시행되었다. 자유 도시 포즈난에서는 독일 점령지와 마찬가지로 소년애자들이 처벌받았다. 법원이 판단하는 한도 내에서 감옥살이를 해야 했다. 바르샤바에서는 차르 통치 시절처럼 최소 3개월의 징역형이 선고되었다. 오직 말기 갈리치아에서만 남성뿐 아니라 여성도 처벌을 받을 수 있었다. 다른 지역에서는 특정 성행위가 입증될 경우 남성만이 처벌 대상이었다.
![전쟁 전 동성애자들의 은밀한 성생활 [18세 이상]: 초기 성과학자들이 기록한 진실](https://www.historyback.com/article/uploadfiles/202207/2022072018492924.jpg)
피우스 벨론스키(Pius Weloński)의 '남성 누드 연구'(퍼블릭 도메인).
성과학자들이 실시한 설문조사가 익명이었을지라도, 여전히 이 문제에 대해 명확한 답변이 필요했다. 즉, "네, 나는 법을 어기고 있습니다"라고 선언하는 것이었다. 아마 모든 사람이 그런 고백을 할 준비가 되어 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사회적 인식도 한몫했다. 폴란드 전문가들은 오랫동안 다양한 사랑의 형태에 대한 관용과 이해를 호소해 왔지만, 타블로이드 언론은 이에 거의 보탬이 되지 못했다.
언론인들은 우르닝을 떠올릴 때면 남성 매춘부, 초라한 창관, 도심 골목 어둠 속에서의 항문 성교를 상상했다. 물론 이 모든 것이 범죄와 위선적 분노라는 자극적인 소스에 버무려졌다. 바로 이렇게 왜곡된 현실의 이미지를 그들은 수백만 독자들에게 전달했다…
출처
이 글은 저자가 책 『위선의 시대: 전쟁 전 폴란드의 섹스와 에로티시즘』 집필 과정에서 수집한 문헌과 자료를 바탕으로 작성되었다. 이 책은 '역사의 진기한 것들(Curiosities of history)' 브랜드로 출간된 첫 번째 책이다.
『위선의 시대』에서는 전쟁 전 폴란드 동성애자들의 풍습과 두려움뿐 아니라, 사회가 그들을 어떻게 인식했는지도 읽을 수 있다. 동성 결혼 권리를 위한 투쟁의 잊혀진 일화, 가장 유명한 폴란드 레즈비언의 이야기, 심지어 보수 언론인들의 시각에서 본 폴란드를 휩쓴 '동성애 유행'에 대한 이야기까지 담겨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