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이야기

핵무기 경쟁의 숨은 주역 – 영국은 어떻게 원자폭탄을 만들었나

영국은 원자폭탄의 탄생으로 끝난 군비 경쟁에 적극적으로 참여했습니다. 영국 과학자들의 참여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는가에 대한 논쟁은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처칠은 더 빨리 핵보유국이 될 기회를 놓친 것일까요?

원자폭탄 개발이 시간문제라는 사실이 분명해지자,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국가들은 즉각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1939년 여름, 우라늄 핵연쇄반응을 이용한 무기가 상대적으로 가볍고 실용적일 수 있다는 사실이 입증되었습니다. 그러나 더욱 불안한 점은 이 계산을 베를린의 과학자 루돌프 파일스(Rudolf Peierls)와 오토 프리슈(Otto Frisch)가 수행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독일은 이미 몰래 연구를 진행하고 있는 것일까요?

폭탄 제작 가능성을 알리는 서한은 헨리 티저드(Henry Tizard)가 이끄는 MAUD 위원회로 전달되었습니다. 위원회의 이름은 닐스 보어가 자신의 청소부 '모드 레이(Maud Ray)'를 언급한 기묘한 전문에서 유래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1942년 위원회의 과학자들은 보고서에서 다음과 같이 밝혔습니다.

"설령 폭탄이 완성되기 전에 전쟁이 끝나더라도 이러한 노력은 헛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만큼 중요한 무기를 갖추지 못하는 위험을 감수할 국가는 없기 때문입니다."

어려운 협상

과학자들이 낙하산으로 투하된 두 개의 포신을 마주 보게 하여 그 안에서 두 조각의 우라늄을 충돌시키는 방식, 즉 실제 최초의 핵무기 계획의 초기 설계를 진행하는 동안, 정치인들에게는 전혀 다른 고민거리가 있었습니다. 처칠의 고문 프레더릭 린데만(Frederick Lindemann)은 총리에게 핵 프로그램을 지체 없이 진지하게 받아들이라고 촉구했습니다.

"우리는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독일이 우리보다 먼저 이 프로그램을 완수해 우리를 패배시키게 된다면, 그것은 용서받을 수 없는 일이 될 것입니다."

동시에 그는 미국이 큰 도움이 될 수 있지만 100% 신뢰할 수는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미 그때부터 적성 국가의 첩보 활동이 두려워졌고, 미국과 영국 양국 모두 스파이를 포섭하고 있었습니다.

핵무기 경쟁의 숨은 주역 – 영국은 어떻게 원자폭탄을 만들었나

프레더릭 린데만과 윈스턴 처칠, 1941년

그래서 린데만은 이 작업을 국내에서 수행해야 한다고 판단했고, 처칠도 존 앤더슨 경(Sir John Anderson)을 핵무기 담당 장관 후보로 삼으며 이에 동의했습니다. 반대 입장이었던 사람은 바로 헨리 티저드 본인이었습니다. 그는 전술적 관점에서 이를 터무니없는 일이라 여겼습니다. 폭탄이 전쟁 중이고 공습 위협에 항시 노출된 나라에서 만들어진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영국 국민들은 적의 침공에 대한 공포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로그램은 처칠의 권고에 따라 시작하기로 결정되었고, 곧이어 MAUD 위원회는 미국 측에 첫 번째 보고서를 넘겼습니다.

오해와 어긋남

작업은 매우 더디게 진행되었습니다. 보고서는 미국 군사 핵연구 국립위원회 의장 밴네버 부시(Vannevar Bush)에게 전달되어 곧바로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올라갔습니다. 1941년 가을, 미국의 수장은 영국 총리에게 공개적인 협력과 경험 교환을 제안했습니다. 그런데 거기서 일은 끝나 버렸습니다. 미국은 처칠의 회신을 무려 두 달이나 기다려야 했기 때문입니다!

많은 역사학자들은 영국 정치인이 회신을 늦춤으로써 절호의 기회를 놓쳤다고 평가합니다. 회신이 더 빨랐다면 영국은 협상에서 유리한 조건을 확보할 가능성이 컸을 것입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았고, 미국의 과학자들은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핵 프로젝트의 선구자처럼 보였던 영국은 어느새 비상 차선으로 밀려나고 말았습니다.

1942년 6월, 워싱턴에서 열린 루스벨트와 처칠의 회담에서 양국 정치인은 "즉시 모든 정보를 모으고, 대등한 조건으로 함께 행동하며, 모든 성과를 공정하게 나눈다"는 데 합의했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전혀 달랐습니다. 보안 조치가 끊임없이 강화되면서 영국 본토의 과학자들은 업무에서 배제되기 시작했습니다. 1943년 밴네버 부시는 영국과의 협력을 완전히 중단할 것을 제안했지만, 루스벨트는 협력을 지속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처칠은 자국 영토 내에서 핵 프로젝트를 다시 추진하는 방안을 검토했지만, 경제적으로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핵무기 경쟁의 숨은 주역 – 영국은 어떻게 원자폭탄을 만들었나

맥켄지 킹, 프랭클린 D. 루스벨트, 윈스턴 처칠. 퀘벡, 1943년

같은 해 말 그는 루스벨트를 다시 만났지만 역시 진전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1943년 8월과 9월, 양국 정치인은 퀘벡에 있는 루스벨트의 저택에서 회담을 이어갔고, 마침내 영국과 미국의 폭탄 개발 성과를 통합하기로 합의했습니다. 단, 미국이 프로젝트 비용의 대부분을 부담하는 만큼, 영국은 공동 프로젝트에서 파생되는 모든 상업적·산업적 기회를 미국 대통령과 영국 총리가 정한 조건에 따라 활용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이 합의는 비공식적인 것이었고, 양국 모두 자국 대표단에게 서운함을 품게 되었습니다. 더 심각한 문제는 전쟁이 끝난 직후 이 합의가 깨져 버렸다는 사실입니다.

풀리지 않는 의문

영국 과학자들이 원자폭탄 개발에 얼마나 기여했는지에 대해서는 오랫동안 논쟁이 이어졌지만 결론은 나오지 않았습니다. 처칠은 자국민들이 실험실에서 주역을 맡았다고 주장한 반면, 맨해튼 프로젝트 총책임자였던 그로브스(Groves) 장군은 그들이 도움은 되었지만 결정적이지는 않았다고 평가했습니다. 케네디 대통령의 고문이었던 맥조지 번디(McGeorge Bundy)는 영국이 없었다면 1945년에는 폭탄이 완성되지 않았을 것이라 믿었습니다.

전쟁이 끝난 후, 윌리엄 G. 페니(William G. Penney)의 주도 아래 영국에서 새로운 핵 프로그램이 시작되었습니다. 애틀리(Attlee) 총리는 핵무기 제작 또는 구매 작업의 재개를 허용했으며, 이 사실은 1948년에 공식적으로 공개되었습니다. 같은 해 원자력 연구 센터 건설이 착수되었고, 할웰(Harwell)에 설치된 최초의 원자로에는 BEPO(Britain Experimental Pile Zero)라는 이름이 붙었습니다.

1953년, 영국 최초의 핵무기인 '블루 다뉴브(Blue Danube)'(Smallboy, Special Bomb로도 알려짐)가 탄생했습니다. 당시, 즉 최초의 수소폭탄 실험이 이루어지기 전까지 영국은 1957년까지 200발을 조립하고 궁극적으로 유사한 탄두 800발로 무기고를 확장할 계획을 세웠습니다. 그러나 곧 더 강력한 변형 무기가 존재한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영국도 다른 강대국들과 마찬가지로 새로운 모델 개발에 착수하게 되었습니다.

참고 문헌

  1. Braithwaite, R., 『Armageddon and Paranoia』, Znak Horyzont, 크라쿠프, 2019.
  2. Kubowski, J., 『History of the Atomic Bomb: United States, German Reich, Soviet Union』, Poligraf 출판사, 브로츠와프, 2014.
  3. Frisch-Peierls 메모와 MAUD 보고서 원문: P. Hennessy, 『Cabinets and the Bomb』, Oxford, 2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