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이야기

거리의 기사부터 야쿠자까지, 일본 문신 예술의 숨겨진 역사

문신은 일본에서 오랜 역사를 지닌 예술입니다. 시대에 따라 장식품이 되기도, 형벌의 도구가 되기도, 의식의 요소가 되기도 했으며, 강하게 결속된 사회 집단에 속한다는 상징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많은 일본인과 서구인들이 전통 일본 문신을 야쿠자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것으로 여기지만, 문신은 결코 야쿠자만의 전유물이 아니었습니다.

서기 300년 이전에 편찬된 중국의 정사 『삼국지(三國志)』에는 왜국(日本)의 일부 주민들이 자신의 사회적 지위를 드러내기 위해 몸에 문신을 새겼다는 기록이 등장합니다. 또한 700년경에 쓰여진 일본 최고(最古)의 문자 기록 중 하나인 『고지키(古事記)』에서 발견되는 단서들에 따르면, 일본에서 문신은 의식적 혹은 주술적인 의미를 지녔습니다. 참고로 『고지키』에는 태양이 뜨는 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스트립쇼 묘사도 담겨 있는데, 안타깝게도 그 무희였던 여신에게 문신이 있었는지는 기록에 없습니다.

신분의 상징으로서의 문신

역사학자들이 모두 같은 견해를 공유하는 것은 아니지만, 수 세기 동안 일본에서 문신은 사회적 지위의 상징이자 범죄 경력 기록의 역할을 했다는 정황이 많습니다. 당시의 문신은 구글보다 더 정확하고 최신 정보를 제공하는 '살아있는 전과 기록'이었고, 법을 어긴 자들을 평생 따라다녔습니다. 문신은 또한 세습 신분을 나타내는 표지이기도 했습니다.

거리의 기사부터 야쿠자까지, 일본 문신 예술의 숨겨진 역사

일본의 문신 예술은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습니다

일본에는 인도처럼 복잡한 카스트 제도나 노예제는 없었지만, 엄격한 신분 제도가 존재했습니다. 특정 계급에 속하는지는 개인이 종사하는 직업과 황실과의 친족 관계의 정도에 따라 결정되었습니다. 가장 낮은 계급이었던 히닌(非人)은 문자 그대로 '인간이 아닌 자'를 뜻하며, 옥졸, 처형 집행인, 매장꾼처럼 가장 더럽고 불쾌한 일을 하거나 범죄자를 다루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불교가 일본에서 번성하면서 부라쿠민(部落民, '마을 사람')이라 불리는 새로운 사회 배척 계층이 등장했습니다. 이들은 가축 도축과 가죽 제품 생산처럼 불교에서 죄악으로 여기는 활동에 종사했으며, 상류층이 꺼리던 더럽고 위험한 일도 맡았습니다. 다른 일본인들과 격리된 폐쇄적 공동체에서 살았기 때문에 '마을 사람'이라 불렸고, 일본의 일부 외딴 지역에서는 지금까지도 그런 방식으로 생활하고 있습니다. 이 두 최하층 계급의 사람들은 팔뚝에 십자가나 선이 새겨진 문신을 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는 그들을 감시하고 사회로부터 격리하기 위한 조치였습니다.

범죄 연대기

일본 최고(最古)의 역사서 중 하나이며 신화적 요소를 포함한 『일본서기(日本書紀)』에는 아즈미노무라지라는 인물이 반역죄로 얼굴에 문신을 새기는 형벌을 받았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이치로 모리타는 저서 『이레즈미: 일본 문신(Irezumi: Japanese Tattooing)』에서 서기 460년에는 게이멘(黥面), 즉 눈 주변에 문신을 새기는 것이 한 형태의 형벌이었다고 기술합니다. 이후 이 형벌은 더 가혹한 낙인 찍기로 대체되었고, 새로운 '육체형'에는 손가락, 귀, 코를 절단하는 방식이 포함되었습니다.

눈 주변 문신 형벌은 1672년에 부활했고, 1720년에는 일종의 고귀한 인도주의적 조치로 육체형이 몸의 여러 부위에 새기는 문신으로 대체되었습니다. 문신 형벌은 특히 온화한 형벌로 간주되었습니다. 이 제도에는 장단점이 있었습니다. 주변 사람들은 문신을 본 즉시 그가 범죄 전력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지만, 반면에 문신은 이런 개인들이 사회로 복귀하는 것을 어렵게 만들었습니다.

거리의 기사부터 야쿠자까지, 일본 문신 예술의 숨겨진 역사

오랫동안 일본 문신은 낙인이자 형벌의 수단이었습니다

1720년 이후에는 죄인에게 자신이 저지른 범죄와 출신 지역을 상징하는 기호를 새겼습니다. 예를 들어 다마 지방에서는 죄인의 이마에 '개'를 뜻하는 한자를 문신했고, 다른 지역에서는 어깨에 두 개의 평행선을 새기거나 그 밖의 표식을 사용했습니다. 그러나 영리한 낙인 찍힌 남자들은 이 제도를 속이는 방법을 찾아냈습니다.

모리타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문신으로 낙인 찍힌] 남자들은 화려하고 예술적인 문신 사이에 자신의 낙인을 숨기기 시작했습니다. 어쩌면 이것이 최초의 야쿠자들이 문신을 하게 된 계기일지도 모릅니다. 결국 그들 중 일부는 자신의 문신을 갈취 및 기타 범죄 피해자들을 위협하는 데 사용했습니다. 그들은 자신에게 새겨진 형벌의 낙인을 자산으로 만들어 이익을 위해 활용한 것입니다.

다시 말해 문신은 당국이 의도한 기능 대신 야쿠자의 다이몬(家紋, 문장)과 같은 역할을 하게 되었고, 마을 사람들과 도시민들의 마음을 겁주어 돈을 내놓게 만드는 도구가 된 것입니다. 1870년 9월 25일, 메이지 정부는 형사 범죄에 대한 형벌로서의 문신을 폐지했습니다.

문신한 거리의 기사들

당국이 문신을 통해 사람들을 계급별로 분류하고, 범죄자를 처벌하고, '살아있는' 범죄 기록을 유지하는 데 활용하는 동안, 에도 시대에는 일본 서민들 사이에서 문신이 점점 인기를 얻었습니다. 1750년 이후, 일본어로 번역되어 폭넓게 읽힌 중국 소설 『수호전(水滸傳)』의 영향을 받아 문신은 일본 하층 계급 사이에서 유행하게 되었습니다.

정의감 넘치는 용맹한 전사들의 이야기를 담은 이 소설은 여러 차례 번역되고 재출판되었습니다. 작중 많은 영웅들은 부패한 관료들과 맞서 싸우는 문신한 로빈 후드 같은 존재였습니다. 그들의 모험을 묘사한 수많은 삽화에는 용 문신으로 뒤덮인 그들의 몸이 온전히 드러나 있었습니다.

수호전의 영웅들은 초라케(町人)라 불리는 신흥 일본 중산층에게 영감을 주었습니다. 초라케 중에서는 오토코다테(男伊達, 거리의 사무라이)라 불리는 자칭 법의 수호자들과 새로운 직업 집단인 소방수들이 배출되었습니다. 소방수의 일본어 이름은 히케시(火消し)로, 문자 그대로 '불을 끄는 자'를 의미합니다.

거리의 기사부터 야쿠자까지, 일본 문신 예술의 숨겨진 역사

문신은 하층 사회에서 큰 인기를 얻었습니다

소방수든 거리의 무사든, 그들은 명예의 규율을 따르며 봉건 영주가 아닌 서민의 이익을 지키는 변형된 기사 이상을 구현했습니다. 스타워즈에 빗대어 에도 시대의 일본을 묘사하자면, 사무라이는 다스 베이더의 명령에 따라 열정적으로 전투에 임하고 불평 없이 죽는 제국의 맹렬한 돌격병이라 할 수 있고, 거리의 무사들과 소방수들은 요다 휘하의 반군에 해당합니다.

사무라이는 억압의 도구였고, 갑옷을 입었으며 몸에 문신을 하지 않았습니다. 반면 거리의 기사들과 소방수들은 문신을 하고 반항적이었지만, 약자를 보호하고 불의에 맞서 싸울 것을 맹세했습니다. 그들이 대중문화의 단골 영웅이 된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당시 소방수들은 우리가 흔히 이 직업과 연관 짓는 기술을 갖추고 있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알던 유일한 진화 방법은 인접 건물을 철거하여 불길이 번지는 것을 막는 방화선을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의 영웅적이고 볼거리가 풍부한 활약은 사람들의 감탄을 자아냈고, 그들은 화려한 문신을 통해 자신의 신분과 직업적 연대의 유대를 과시했습니다.

소방수들은 현대 야쿠자와 비슷하게 쿠미(組)라 불리는 조직으로 나뉘었고, 각 조직의 구성원들은 비슷한 문신을 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러나 초기 일본 소방수들은 임무를 너무나 무자비하고 공격적으로 수행해서 당대의 기록가들은 종종 누가 더 큰 피해를 입혔는지 궁금해했습니다. 불인지, 불을 끄는 사람들인지 말입니다.

붕어처럼 물과 관련된 상징성을 지닌 문신을 즐기던 이 강인하고 거친 소방수들은 그 두려움 없는 용기와 위험을 즐기는 성향 덕분에 현대 야쿠자의 선구자로 간주되기도 합니다(적어도 많은 야쿠자는 그렇게 생각하고 싶어 합니다). 이윽고 소방수와 거리의 기사들뿐만 아니라 도박꾼, 건설 노동자, 장인들도 정교한 문신으로 몸을 장식하기 시작했는데, 아마도 책에서 읽은 허구의 영웅들을 흉내 내고 싶었던 것입니다. 새로운 고객들의 몸에 문신을 새기던 문신사들은 종종 수호전 판화에서 영감을 얻었습니다.

그들은 우키요에(浮世絵) 판화 제작자들이 사용하던 기법들도 일부 차용했습니다. 인체가 목재보다 훨씬 부드럽고 유연하다는 점을 빼면, 심지어 같은 도구를 사용하기도 했습니다.

문신 금지와의 싸움

권력자들은 유희와 반항이 헤아릴 수 없이 위험하다는 것을 자연스럽게 깨닫고 1812년 문신을 금지했습니다. 그러나 이 관행은 특히 사회 하층민들 사이에서 계속 번성했습니다. 개인주의와 자유의 표현으로서의 문신은 권력층에 불안을 안겨주었습니다. 수호전의 전복적인 분위기 또한 그들을 짜증 나게 했습니다. 문신은 일본 도덕의 얼굴에 낙인 찍힌 검은 얼룩이었습니다.

앞서 언급한 금지령에도 불구하고 문신의 꺾이지 않는 인기를 보여주는 증거는 덴포 시대(1830~1844)에 공개 문신 대회를 금지하는 또 다른 금지령이 내려졌다는 사실입니다. 메이지 시대(1868년 9월~1912년 7월)에 일본은 역동적인 근대화의 시기를 겪었지만, 이 나라의 국민들은 여전히 공식적으로 몸에 문신을 새길 수 없었습니다. 전통 일본 문신의 뛰어난 예술적 가치는 서구에서 온 손님들에 의해 높이 평가받았습니다. 외국 선원들뿐만 아니라 훗날 조지 5세가 되는 요크 공작과 그의 형조차 문신을 했습니다. 요크 공작의 팔뚝을 장식한 용의 실루엣은 고베 출신의 유명한 문신 명장 호리초의 작품이었는데, 고베는 야마구치구미의 발상지이기도 합니다. 미래의 차르, 왕족들(그리스의 올가 왕비 포함)을 비롯한 수많은 이들이 일본 문신 명장들의 서비스에 기꺼이 값을 지불하며 삶에 색채와 동양의 신비를 더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발발로 치닫던 긴장의 시기에 문신은 너무 경박하고 반항의 표현이라 여겨져 환영받지 못했습니다. 몸을 장식하는 관습은 야쿠자 조직원, 일부 장인, 노동자들 사이에서 명맥을 유지했지만, 문신의 화려한 부활은 전쟁이 끝난 후에야 일어났습니다. 국가의 혼란을 틈타 야쿠자가 그 어느 때보다 크게 번성하면서 말입니다.

본문은 야기엘론스키 대학교 출판사에서 간행한 『야쿠자 맨: 일본 지하 세계의 비밀(The Yakuza Man. Secrets of the Japanese underworld)』의 발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