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이야기

전쟁 전 폴란드와 아프가니스탄, 여성의 삶은 어디가 더 나았을까?

여성 장관. 국가 비용으로 유학을 떠난 소녀들. 최고 권력층의 지원을 받는 강력한 여성 단체. 이것이 바로 두 차례의 세계대전 사이, 전간기의 한 나라 모습이었습니다. 놀랍게도 그 나라는 아프가니스탄이었습니다.

명목에 그친 폴란드의 평등

재건된 폴란드는 여성에게 선거권을 부여했습니다. 하지만 실질적인 권력을 쥐여 줄 생각은 전혀 없었습니다. 입법 의회에는 남성 436명과 겨우 여성 8명만이 앉아 있었고, 여성 총리는커녕 장관조차 단 한 명도 배출되지 못했습니다. 전간기 내내 여성이 대통령 후보로 추천되는 일은 없었습니다. 폴란드인들이 여성 통치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있었는지 생각해 보면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1920년 잡지 '므실 니에포들글라(Myśl Niepodległa)'는 만약 여성이 국가 원수로 선출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경고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정말로 마지막 시간이 다시 우리를 덮칠 것이며, (...) 약 백 년 동안 우리를 노예 상태와 속박, 그리고 끔찍한 억압으로 몰아넣으려 할 것이다."

1920~30년대에도 여성의 대학 진학 여부를 두고 논란이 계속됐습니다. 변호사계 전체가 여성 판사 양성에 반대했고, 최초의 여성 검사는 1936년에야 임명되었는데 이 결정은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고 많은 계층에서는 스캔들이라 불릴 정도였습니다. 여성이 의료 행위를 하는 것 역시 늘 경이롭게 여겨졌습니다. 게다가 오직 독신 여성만 종사할 수 있는 직업도 있었습니다. 폴란드인들의 눈에 결혼한 여성은 하녀나 교사로서 적합하지 않다고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전쟁 전 폴란드와 아프가니스탄, 여성의 삶은 어디가 더 나았을까?

전쟁 전 폴란드에서 여성이 장관이 되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사진은 유제프 피우수트스키(Józef Piłsudski) 뒤 두 번째 열의 모습입니다.

형식적인 평등은 결국 허구로 드러났고, 국가는 이런 상황을 개선하기 위해 거의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았습니다. 이처럼 어두운 폴란드의 배경과 비교하면, 20세기 초에 독립을 쟁취한 또 다른 나라가 놀랄 만큼 유리한 면모를 보입니다. 바로 아프가니스탄입니다.

동쪽에서 온 진보

"독립은 우리 모두의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이를 축하합니다.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우리 민족을 위해 남자들만이 봉사해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여성도 역할을 해야 합니다. 우리 역사의 시작에서, 그리고 이슬람의 시작에서 그랬던 것처럼요. 선조들의 본보기에서 우리는 배워야 합니다. 민족의 발전을 위해 일하는 것은 우리 모두의 의무이며, 그 일은 올바른 지식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사회에 제대로 봉사할 수 있도록 가능한 한 많은 지식을 습득해야 합니다."

이 연설은 1926년, 영국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뒤 독립 7주년을 맞아 아프가니스탄의 소라야 타르지(Soraya Tarzi) 왕비가 한 연설입니다. 그녀는 서양식 옷차림에 얼굴을 드러낸 채 공개 석상에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전쟁 전 폴란드와 아프가니스탄, 여성의 삶은 어디가 더 나았을까?

그녀의 호소는 깊이 숙고된 것으로, 전통과 신앙의 원칙들을 의도적으로 인용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소라야는 결코 근거 없는 주장을 펼친 것이 아니었습니다. 선조들의 유산을 언급했다면 그럴 만한 확실한 이유가 있었던 것입니다. 여성의 권리를 위한 투쟁은 19세기와 20세기가 교차하는 무렵부터 시작되었고, 극도로 엄격하고 가부장적인 아프가니스탄 문화에 놀라운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1880년부터 1901년까지 통치한 압두르 라흐만 칸(Abdur Rahman Khan)은 모든 미망인이 죽은 남편의 가장 가까운 남성 친척과 재혼하도록 강제하던 낡은 법을 폐지했습니다. 또한 최소 결혼 연령을 상향해 신부가 어린아이에 불과한 경우를 줄였고, 마지막으로 여성에게 이혼의 권리를 부여했습니다. 제한적이었지만, 참고로 같은 시기 폴란드 제2공화국에는 이와 유사한 규정이 도입된 적이 한 번도 없었습니다.

규정의 자유화 이면에는 통치자의 아내 보보 자안(Bobo Jan)이 있었습니다. 학자 낸시 H. 듀프리(Nancy H. Dupree)가 기록했듯, 그녀야말로 공개 석상에 모습을 드러낸 최초의 아프가니스탄 군주였습니다. "그녀는 유럽식 옷을 입고 얼굴을 드러낸 채 공개 석상에 등장했습니다. 말을 탔고, 신하들과 함께 군사 훈련에도 참여했습니다. 정치에 깊은 관심을 보였으며, 심지어 경쟁하던 정파들 사이에서 일련의 섬세한 협상을 주도하기도 했습니다."

전쟁 전 폴란드와 아프가니스탄, 여성의 삶은 어디가 더 나았을까?

아프가니스탄의 통치자 압두르 라흐만 칸. 바로 그가 아내의 설득에 따라 여성을 차별하던 낡은 법을 폐지했습니다.

아프가니스탄 여성의 평등권

여성주의 흐름은 영향력 있는 지식인이자 정치가인 마흐무드 타르지(Mahmoud Tarzi)에 의해 더욱 힘을 얻었습니다. 이 활동가는 여성에게 남성과 동등한 완전한 시민권을 부여할 것을 주장했습니다. 그가 발행하던 잡지에는 그의 아내 아스마 타르지(Asma Tarzi)가 편집을 맡은 '세계의 여성들을 소중히 여기자'라는 코너가 실렸습니다.

타르지의 영향 아래 아프가니스탄 최초의 여학교가 문을 열었고, 영어가 교육 언어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저명한 정치가의 진정한 업적은 자신의 딸들을 제대로 길러낸 일이었습니다. 그중 한 사람이 바로 소라야였습니다. 새 국왕 아마눌라(Amanullah)의 아내이자 1926년부터 아프가니스탄을 다스린 인물입니다.

소라야는 남편의 조언자였지만, 정부에 대한 비공식적인 영향력만으로는 만족하지 않았습니다. 배우자의 동의를 받아 교육부 장관으로서 정부의 일원이 되었습니다. 그녀는 국왕이 아프가니스탄의 현대적 헌법을 마련하는 작업을 지원했고, 두 사람은 함께 당시 나라에 만연했던 일부다처제에 반대하며 소녀 교육을 위해 싸웠습니다. 수도 카불뿐 아니라 깊은 지방까지 말입니다. 여성들의 유학도 장려되었는데, 왕실 부부는 스스로의 비용으로 열다섯 명의 젊은 여성들을 튀르키예에 고등교육을 받게 보냈습니다.

전쟁 전 폴란드와 아프가니스탄, 여성의 삶은 어디가 더 나았을까?

소라야 왕비(사진에서 3번)의 폴란드 방문. 1928년 4월.

왕비는 아프가니스탄 최초의 여성 잡지를 창간했습니다. 또한 시누이인 코브라(Kobra)는 낡은 관습, 편견, 차별 행위에 공개적으로 맞서 싸우는 여성 보호 기구를 설립했습니다. 그 밖에도 수십 명의 여성들이 공직과 궁정에서 활동하며, 모든 사람이 평등하고 자유로운 존재가 되는 아프가니스탄을 꿈꾸었습니다.

이들의 노력은 국가 정점에 분명한 흔적을 남겼습니다. 그러나 대중 문화를 바꾸는 데에는 실패했습니다. 위대한 변혁은 내전으로 중단되었고 왕실 부부는 추방당했습니다. 이 사건들로 인해 아프가니스탄의 역사는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지만, 이 나라에서 세기 초에 일어난 도약이 얼마나 컸는지는 기억할 가치가 있습니다. 그토록 컸기에, 우리 증조모들도 아프가니스탄 여성들의 열정과 결단력, 그리고 성과를 부러워했을 정도입니다.

참고 자료

이 글은 레예스 몬포르테(Reyes Monforte)의 소설 『사랑의 부르카(The Burka of Love)』(WAM 출판사, 2017)에서 영감을 받아 작성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