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이야기

소련에도 '영부인'이 있었나? 소련 최고 권력자들의 아내 이야기

소련에는 '영부인'이라는 개념이 없었다

소련에서는 '영부인(first lady)'이라는 용어가 사실상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정치는 남성의 전유물로 여겨졌고, 당 고위 인사들의 가정생활은 철저히 비밀에 부쳐졌기 때문에 굳이 관심을 가질 사람도 없었습니다.

실제로 소련 시민들의 기억 속에 남은 여성은 단 두 명뿐입니다. 소련 국가의 창시자 레닌의 아내 나데즈다(나디아) 크룹스카야, 그리고 소련의 초대이자 마지막 대통령 고르바초프의 아내 라이사 고르바초바가 바로 그들입니다. 다른 지도자들의 배우자 이름을 기억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이제 소련 정치에 얽힌 여성들의 역사를 되짚어볼 때입니다.

'독재자' 나데즈다 크룹스카야

1898년부터 레닌의 동반자였던 나데즈다 크룹스카야가 이 명예로운 역할을 처음으로 맡았습니다. 물론 남편 레닌조차 그녀를 "나라 제1의 누더기"라고 불렀습니다. 나이아는 낡고 해진 옷을 입었고, 단추가 떨어져도 꿰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레닌은 그녀에게 교육인민위원부 차관의 자리를 맡겼습니다.

이 직책에서 나데즈다는 정교회를 비롯한 종교 세력과의 투쟁을 시작했습니다. 그녀의 활동은 주로 아동을 대상으로 했습니다. 그녀는 "반종교 선전은 학령기부터 일찍 시작해야 한다. 젊은이들은 이런 문제에 빠르게 흥미를 갖기 때문이다"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소련에도  영부인 이 있었나? 소련 최고 권력자들의 아내 이야기

▲ 레닌과 나데즈다 크룹스카야

러시아 언론인 올레그 스미르노프의 표현을 빌리면, 레닌의 아내는 "소련 검열 분야의 개척자"였습니다. 크룹스카야는 도서관 직원들에게 "이념적으로 유해하고 시대에 뒤떨어진 문헌", 즉 플라톤, 데카르트, 니콜라이 레스코프, 아르투어 쇼펜하우어의 저작을 철거하라고 명령했습니다. 도서관 직원들이 장서 폐기를 꺼리자, 펠릭스 제르진스키가 지휘하던 악명 높은 비밀경찰 체카 요원들이 서적 압수 작업에 동원되었습니다.

『크렘린의 아내들』의 저자 라리사 바실리예바는 그녀를 독재자로 규정했습니다. "운명이 나데즈다 크룹스카야에게 최고 권력을 안겼다면, 그녀는 스탈린보다 교양이 뛰어난 인물이었기에 어쩌면 문화 종교재판을 더 능숙하게 도입했을지도 모른다."

레닌 사후 나이아는 교육인민위원부에서 일했으며 그곳에서 존경을 받았습니다. 그녀는 남편에 대한 회고록을 집필하여 그의 흠 없는 이미지를 만들어냈습니다. 그녀는 1939년 7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보이지 않는 존재, 스탈린의 아내

소련의 노동자들이 요셉 스탈린의 아내가 누구인지 알고 있었는지조차 확실하지 않습니다. 당시 언론과 공식 문서에서 그녀는 "나데즈다 알릴루예바 동지"로만 지칭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녀는 결혼 후에도 성을 유지했습니다.

볼셰비키가 여성의 노동을 장려하던 시절, 나이아는 가정주부가 되기를 원하지 않았습니다. 1919년 그녀는 레닌의 비서가 되었고, 레닌 사후에는 민족문제위원회에서 일한 뒤 『프라우다』와 『혁명과 문화』 편집국으로 옮겼습니다. 1929년에는 산업아카데미에 입학해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관용차로 학교에 갈 때 그녀는 운전기사에게 건물에서 한 블록 떨어진 곳에 세워달라고 부탁했고, 경호원이 따라붙는 것도 거부했습니다.

소련에도  영부인 이 있었나? 소련 최고 권력자들의 아내 이야기

▲ 스탈린과 나데즈다의 결혼 생활은 순탄하지 않았다

알릴루예바와 스탈린의 가정생활은 이상적이지 못했습니다. 독재자는 자신보다 22살 어린 아내에게 복종을 기대했지만, 뼈아픈 실망을 겪었습니다. 레닌의 비서였던 나이아는 최고 기밀 문서에 접근할 수 있었지만, 남편이 아무리 강요해도 내용을 누설하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청소나 요리처럼 전통적으로 여성에게 할당된 역할도 수행하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스탈린에게 "인민의 적" 재판에 반대한다는 생각을 숨기지 않았고, 그래서 그들의 아파트에는 늘 긴장감이 감돌았습니다. 독재자의 전 비서 보리스 바자노프의 회고에 따르면, 스탈린은 집안에서 "폭군처럼 행동했고, 하루 종일 침묵하며 아내와 아들의 질문에 답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는 공개석상에서 여성의 열등함에 대해 언급하기까지 했습니다.

1932년 11월 8일 밤부터 9일로 넘어가는 새벽, 나데즈다는 머리에 총을 겨눠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스탈린은 충격에 빠졌지만, 그의 절망은 아내에 대한 그리움이 아니라 분노 때문이었습니다. 나이아가 자살함으로써 자신의 명예를 훼손했다고 느꼈기 때문입니다! 그는 제3자가 개입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의심에도 불구하고 알릴루예바의 죽음에 대한 조사를 명령하지 않았습니다.

브레즈네프의 아내 빅토리야 역시 조용히 지냈습니다. 레오니드 브레즈네프가 잦은 해외 공식 방문을 다녔지만, 배우자가 동행한 것은 인도와 프랑스 두 번뿐이었습니다. "나는 그런 여행이 좋지 않았어요. 갈 수 없을 때는 집에 있었죠." 그녀는 훗날 이렇게 털어놓았습니다. 그녀는 차라리 해외 순방과 정상회담에서 얻은 레시피로 남편이 좋아하는 요리를 만드는 일을 즐겼습니다. 레오니드도 아내의 요리 솜씨를 높이 평가했습니다. "비치보다 잘 요리하는 사람은 없어."

유리 안드로포프(1982~1984년 집권)의 배우자에 대해 알려진 것은 이름이 류드밀라이며 남편보다 28살 어렸다는 사실뿐입니다. 콘스탄틴 체르넨코(1984~1985년 집권)의 아내 안나 역시 공적인 삶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습니다. 게다가 병약한 남편은 대부분의 시간을 병원에서 보내며 그곳에서 나라를 통치했습니다.

서양식 영부인의 등장

국가 정책의 자유화와 함께 영부인의 역할도 커졌다고 감히 말할 수 있습니다. 그 전환점은 니키타 흐루쇼프 집권기에 찾아왔습니다. 그의 아내 니나가 해외 방문에 동행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서구의 눈에 화장기 없이 무난치 못한 몸매와 유행 뒤떨어진 옷차림의 이 여성은 역설적으로 탈스탈린 해빙기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니나는 외교 의전을 익혔고 영어도 구사했습니다. 폴란드어도 할 줄 알았는데, 그녀는 폴란드 왕국 루블린 현 출신이기 때문입니다. 흐루쇼프의 미국 방문 당시 그녀는 록펠러와 직접 대화를 나눴는데, 록펠러는 그녀의 경제 문제에 대한 지식에 감탄하며 남편보다 더 교양이 있다고 평가했습니다.

소련에도  영부인 이 있었나? 소련 최고 권력자들의 아내 이야기

▲ 왼쪽부터 니나 흐루쇼바, 매미 아이젠하워, 니키타 흐루쇼프,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라이사 고르바초바 역시 남편의 국내외 방문에 함께했습니다. "왜 저 여자를 끌고 다니는가?" 사람들은 호의적이지 않았습니다. 왜 그녀는 그토록 많은 부정적 감정을 불러일까요? 무엇보다 소련의 사회·정치 생활이 남성 중심이었기 때문입니다. 흥미롭게도 가장 신랄한 비판은 아내의 자리는 살롱이 아니라 집이라고 믿던 여성들로부터 나왔습니다. 시민들은 30년 넘게 결혼한 부부가 여전히 손을 잡고 공공장소에서 애정을 드러내는 것에도 분노했습니다.

고르바초프는 모든 국정 현안을 아내와 상의한다는 사실을 숨기지 않았습니다. 라이사의 공적 참여는 서구인들을 환희에 빠뜨렸지만, 인기가 높아질수록 동포들의 반감도 깊어갔습니다. 그들 눈에 고르바초프는 "여자의 영향"에 너무 많이 휘둘렸고, 심지어 그녀의 "통치"가 소련을 붕괴시켰다는 비난까지 받았습니다.

시민들의 태도가 바뀐 것은 1999년 여름, 라이사가 백혈병 진단을 받고 나서였습니다. 고르바초프 부부에게 연민과 위로가 쏟아졌습니다. 독일의 최고 수준 클리닉에서 치료를 받았지만 그녀는 끝내 세상을 떠났습니다. 미하일은 이후 "내 인생은 끝났다"고 선언했습니다.

참고 문헌

  1. L. 바실리예바, 『크렘린의 아내들(Kremlin Wives)』, 바르샤바, 1998.
  2. V. 비에르니츠카, 『소비에트 국가의 비밀(Secrets of the Country of Soviets)』, 우치, 2020.
  3. "라이사의 별("Звезда Раиса")", 라디오 "스보보다" 방송, 2019년 10월 27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