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이야기

벨기에가 남긴 증오의 제국: '분할 통치'가 낳은 르완다 대학살

벨기에는 고대부터 전해지는 통치 원칙, "분할 통치(divide and rule)"를 완벽하게 체득한 나라였다. 무력만으로 아프리카 식민지를 장악하는 데 한계를 느낀 그들은, 대신 식민지 백성들에게 스스로가 '지배 인종'과 '열등한 인간'으로 나뉘어 있다고 믿게 만드는 길을 택했다. 브뤼셀의 이러한 의도적인 정책은 수십 년 후 20세기 최악의 참극 중 하나이자 백만 명이 넘는 목숨을 앗아간 비극으로 이어졌다.

식민 지배 이전의 르완다 사회

르완다는 아프리카 중부, 콩고의 동쪽이자 탄자니아의 서쪽에 자리한 내륙국이다. 두 대양에서 모두 멀리 떨어져 있어 잔혹한 식민지 쟁탈전의 첫 물결은 피할 수 있었다. 유럽 열강이 아프리카 해안을 하나씩 잠식해 가던 시기, 르완다에서는 중세 유럽의 봉건 공국과 흡사한 독립 국가가 성장하고 있었다.

사회 피라미드의 정점에는 국왕(음와미(Mwami))이 있었고, 그 아래 관직과 토지를 보유한 귀족 계층인 투치(Tutsi)가 있었다. 최하층에는 예속된 민중 후투(Hutu)와 소수의 장인 카스트 트와(Twa)가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인종적 구분이 아니라 사회적 위계였다. 투치와 후투는 옛 폴란드의 귀족과 농민처럼 같은 혈통을 공유했고, 같은 언어를 사용했다.

독일: 모범적인 식민 지배자?

19세기 말 식민 세력으로 르완다를 접수한 독일인들은 이처럼 질서 잡힌 체계를 발견했다. 사실상 독일의 주권은 명목에 불과했다. 그들은 원주민들의 내정에 간섭하지 않았고, 현지 권력의 권위를 훼손하지도 않았다. 통치자와 피지배자의 경계선에서 필연적으로 생겨나는 투치와 후투 사이의 반감을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이용하려 들지도 않았다.

벨기에가 남긴 증오의 제국:  분할 통치 가 낳은 르완다 대학살

1930년대 벨기에 엽서에 담긴 아프리카 식민지 원주민들의 모습. 브뤼셀의 식민지 정책은 '분할 통치' 격언의 정수 그 자체였다.

그러나 독일은 르완다에 오래 머물지 못했다. 이미 1916년, 제1차 세계대전 중 식민지는 벨기에의 손에 넘어갔다. 벨기에는 곧바로 질서를 재편하기 시작했다. 르완다 사회가 깊이 분열되어 있다는 사실, 즉 인구의 80%는 후투인데 권력은 20%에 불과한 투치가 쥐고 있다는 점은 쉽게 눈에 띄었다. 새로 온 유럽인들은 이를 자신들의 목적에 최대한 활용하기로 결심했다.

상상 속의 지배 인종

『르완다: 전쟁과 집단학살』의 저자 야체크 레기냐-자하르스키(Jacek Reginia-Zacharski)는 이렇게 설명한다. "군사력을 대규모로 투입할 수도 없고 원하지도 않았던 벨기에는 (...) 일부 집단을 다른 집단에 맞서 지원하는 방식으로 권력을 행사하려 했다. 그들은 잠재적 보복에 대한 두려움에 크게 기반한, 식민지 당국에 대한 전면적 의존이라는 단순한 체계를 만들어냈다."(33쪽)

분명히 해두자면, 투치와 후투는 실제로 서로 다른 민족 집단이 아니었다. 하지만 벨기에는 개의치 않았다. 두 카스트 사이의 차이가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깊다고 백성들을 납득시키기만 하면 됐으니까. 새로운 지배자들은 르완다의 통치 계급인 투치의 편에 섰고, 끝없는 충성의 대가로 그들을 '지배 인종'으로 선포해 주었다.

벨기에가 남긴 증오의 제국:  분할 통치 가 낳은 르완다 대학살

1925년의 공식 문서는 이렇게 규정했다. "투치는 별개의 인종이다. 물론 혈통이 더 이상 순수하지 않은 타락한 [개인]들을 제외하면, 육체적으로 후투와 닮지 않았다. 반면 순수한 인종인 투치에게는 피부색 외에 흑인의 것은 아무것도 없다."(34쪽)

몇 년 뒤에는 더 구체화되었다. "투치는 지도자의 자질을 갖추고 있다. 원시 민족에서는 놀랍게도 나타나는 뚜렷한 지능과 심지어 더 높은 감성까지 특징이다. ... [이런 까닭에] 투치는 자연스럽게 후투를 지배한다."(35쪽)

증오의 폭발

이 백퍼센트의 이론은 그대로 실천으로 옮겨졌다. 오직 투치만이 관직에 오를 수 있었고, 오직 투치만이 지도자가 되었으며, 오직 투치만이 토지를 소유하고 부를 축적할 수 있었다. 이전에는 적지 않았던 후투 지주들은 브뤼셀의 전폭적인 지원 아래 토지를 빼앗겼다. 게다가 교육 역시 투치의 완전한 독점 영역이었다. 급성장하던 현지 가톨릭 교회마저 사회의 인종적 분단을 적극 지지했다.

나치 독일의 인종법, 그리고 그보다 앞선 아파르트헤이트에 앞서 이 분리 체계의 정점은, 투치 혹은 후투 소속 정보를 기재한 특별 신분증의 도입이었다. '후투'라는 기록 하나면 교육, 좋은 직업, 재산, 나아갈 삶의 가능성으로 가는 모든 길이 막혔다. 그리고 그것은 인구의 압도적 다수에 해당하는 처우였다.

벨기에가 남긴 증오의 제국:  분할 통치 가 낳은 르완다 대학살

후투와 투치 갈등이 남긴 비극적 결말.

벨기에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조용히 자신들의 인종 실험에서 물러났다. 제3제국조차 부끄러워했을 법한 증오 정책에 동참하는 것은 더 이상 어울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르완다의 독립 선언은 약 7만 명의 목숨을 앗아간 피비린내 나는 내전과 함께 이루어졌다. 갈등은 이후에도 끝나지 않았다. 오히려 1990년대 초 다시 폭발하며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최대의 집단학살로 치달았다.

투치와 후투의 분쟁에서 백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 희생자는 주로 투치였다. 먼 식민지를 다스리기 편하도록 수십 년 전 벨기에가 지배자로 추켜세웠던 사람들이 말이다.

출처

  • Jacek Reginia-Zacharski, Rwanda. War and Genocide, Polish Scientific Publishers PWN, 바르샤바 20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