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봉기가 실패한 지 5년 후, 아담 미츠키에비치는 봉기 부대를 이끈 영웅적인 여성 에밀리아 플라테르를 노래한 시 「대령의 죽음」을 발표했습니다. 그러나 실제 에밀리아는 대령이 아니었고, 숲속 오두막에서 부상으로 목숨을 잃지도 않았습니다. 다만 그녀는 실제로 봉기에 참전했으며, 명예 대위의 계급을 받기도 했습니다. 몸은 연약하고 건강하지 못했지만, 그녀는 군인의 고난을 놀랄 만큼 용감하게 견뎌냈습니다.
플라테르 양에 대해 알려진 것은, 그녀가 어머니와 외삼촌의 손에서 오늘날 라트비아에 해당하는 디나부르크 근교의 영지에서 자랐다는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녀가 태어난 곳은 빌뉴스로, 1806년 11월 13일의 일이었습니다. 아버지는 프란치셰크 크사베리 백작, 어머니는 안나 폰 데어 몰이었습니다. 아버지는 깡패 기질에 실패한 인물이자 도박꾼이었고, 반면 어머니는 남편보다 지적으로 뛰어난 듬직한 여인이었습니다. 결국 1815년 안나는 남편을 떠나 딸과 함께 친척 집으로 향했습니다.
낭만주의적 영혼
에밀리아는 당시 귀족 가문의 처녀들에게 일반적이던 가정 교육을 받았습니다. 훗날 플라테르 양의 행보를 이해하려면 그녀가 자란 시대의 분위기를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에밀리아는 낭만주의를 마음껏 흡수했습니다.
1831년, 낫을 들고 봉기에 나선 에밀리아 플라테르
한편으로 낭만주의는 민중 문화와 향토 의식, 그 신비로움과 미스터리로의 회귀로 나타났습니다. 에밀리아는 이를 열정적으로 수집하고 기록했습니다. 다만 낭만주의자들이 주로 관심을 둔 것은 민중의 풍습이었지, 민중 그 자체, 즉 그들의 처지와 비참한 현실은 아니었습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자유를 위해 싸우는 낭만적 영웅, 박해받는 음모가들의 전통이 있었습니다. 에밀리아가 동일시하고 본받고 싶어 했던 여걸들은 잔 다르크(15세기 백년전쟁에서 중요한 승리를 거둔 프랑스의 국민적 영웅)와 부불리나(그리스 독립전쟁 당시 재산을 봉기군에 바치고 직접 전투에 참여한 인물)였습니다.
단검과 권총을 차고 남장을 한 채, 에밀리아는 동료 곁에서 봉기군 속 자신의 자리를 찾아 나섰습니다.
에밀리아는 평생 결혼하지 않았습니다. 그녀의 연애사에 대해 알려진 것은 거의 없습니다. 전설에 따르면 한 부유한 러시아인이 그녀에게 구혼했다고 합니다. 같은 전설은 점령국 출신 남성의 청혼을 플라테르 양이 거절했다고 덧붙입니다.
폴란드의 잔 다르크
회화나 판화 속 플라테르 양의 모습은 머리칼을 늘어뜨린 가녀린 젊은 처녀입니다. 『여전사들』의 저자 이보나 킨즐러는 에밀리아의 친구 이그나치 도메이코가 남긴 묘사를 인용합니다.
"창백했고 미인은 아니었지만 둥글고 상냥한 얼굴, 푸른 눈, 단정하지만 강인하지는 않은 체구였다. 그녀는 진지했으며, 말수가 적고 눈빛으로 자신에 대한 존중과 예의를 요구하는, 다정하기보다 엄격한 사람이었다."
울란 기병대 선두에 선 에밀리아 플라테르
1830년 11월 29일, 11월 봉기가 일어났습니다. 폴란드의 잔 다르크가 되겠다는 에밀리아의 꿈이 눈앞에 다가왔습니다. 친척들은 그녀를 막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역시 봉기에 참여한 사촌들이 이 결심을 지지해 주었습니다.
단검과 권총을 차고 남장을 한 채, 에밀리아는 동료 곁에서 봉기군 속 자신의 자리를 찾아 나섰습니다. 리투아니아와 사모기티아에서는 소규모이고 무장도 열악하며 훈련되지 않은 귀족 무리, 이른바 '파르티잔'들이 싸움에 뛰어들었습니다. 정면 대결로 러시아군에 맞설 형편이 되지 못했기에 이들은 게릴라전을 벌였습니다. 에밀리아 플라테르도 바로 그런 봉기 부대에 속해 있었습니다.
11월 봉기의 전설
기록에 따르면 플라테르 양은 봉기 자원병 모집에 매우 적극적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여기서부터 전설은 사실과 조금씩 어긋납니다. 에밀리아가 거의 300명 규모의 부대를 직접 창설하고 그 지휘관으로 수차례 의미 있는 승리를 거두었다는 이야기는 의심스럽습니다. 애초에 에밀리아에게 어디서 군사적 역량, 특히 지휘 능력이 생겼겠습니까? 그녀가 어떤 부대를 지휘했을 가능성은 낮습니다. 전설에 등장하는 전투들 또한 사료로 확인되지 않습니다.
다만 확실한 것은, 에밀리아가 군인의 삶의 고난을 용감하게 견뎠다는 사실입니다. 킨즐러는 이렇게 기록합니다.
"에밀리아는 몸이 연약하고 건강이 크게 나빴다. 지휘관들과 전우들은 그녀를 부대에서 빼내고 싶어 했다 — 말에서 떨어질 때마다, 심지어 기절할 때마다 그녀를 보호하고 구해 주어야 하는 일이 너무 잦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그녀의 강인함과 고집은 더욱 존경스러웠습니다. 그녀는 좀처럼 포기하지 않았고, 부대가 와해된 후에도 다른 부대를 찾아 나섰습니다.
데지데리 흐와포프스키 장군 휘하의 폴란드 정규군이 리투아니아에서 기울어가던 봉기를 지원하기 위해 출진했습니다. 에밀리아 플라테르는 즉시 장군을 찾아갔습니다. 흐와포프스키는 용감한 이 병사에게 명예 대위 계급을 수여했지만, 동시에 집으로 돌아가라고 명령했습니다 — 그러나 그녀는 그 명령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출발하라!
흐와포프스키 군단이 절망적인 상황 속 프로이센 국경을 넘어 해산하자 그녀는 큰 실망을 겪었습니다. 리투아니아의 봉기는 잦아들었지만 바르샤바는 아직 자유였고, 에밀리아는 여전히 싸우고 싶어 했습니다. 그녀는 두 명의 전우와 함께 농부 차림으로 수도를 향해 길을 나섰습니다.
그러나 도중에 그녀는 병을 심하게 얻었습니다. 한 저택에서 몸을 의탁했으나 보살핌에도 회복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1831년 12월 23일, 그녀는 세상을 떠났습니다. 코프치우 마을 공동묘지에 안장되었으며, 그 무덤은 오늘날까지 남아 있습니다.
폴란드 지휘관들의 무능으로 폴란드군은 오스트롤렌카 전투에서 패배했고, 이 전투는 봉기의 전환점, 즉 끝의 시작이 되었다
전설은 종종 실존 인물로부터 멀어져 제멋대로 살아갑니다. 전설은 어떤 목적을 위해 태어나기 때문입니다. 플라테르 양의 경우, 그 목적은 독립을 위한 투쟁 속에서 민족 정신을 지키는 것이었습니다. 무기를 들어야 할 때마다 그녀의 모습은 기억되었고, 소련에서 창설된 폴란드군 여성 대대는 그녀의 이름을 따랐습니다. 폴란드 인민공화국 시대에도 그녀는 기억되었지만, 지금은 잊힌 듯합니다. 어쩌면 이것이 하나의 정상화일지도 모릅니다. 이제 진짜 에밀리아 플라테르를 만나야 할 때입니다.
참고 문헌
- Iwona Kienzler, 『여전사들』, Bellona 출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