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이야기

마리아 차르토리스카, 남편과 아들이 모두 반역자가 된 불행한 공작부인

애국자의 집안에 나타난 '검은 양'들

아담 예지 차르토리스키(Adam Jerzy Czartoryski)는 폴란드의 애국자이자 정치가로, 평생의 최대 목표는 조국의 행복이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매제는 프로이센과 러시아를 편들었고, 조카는 11월 봉기 당시 무려 차르 군대에서 싸웠습니다. 고귀한 폴란드 명문 가문에 이런 '검은 양'들은 대체 어디서 온 것일까요?

반역자로 드러난 이들은 바로 아담 예지의 누나인 마리아 비르템베르스카 공주(처녀 시절 성은 차르토리스카)의 남편과 그 아들 아담이었습니다. '파밀리아(Familia)'로 불린 차르토리스키 가문에게 가장 아픈 일은, 11월 봉기 중 사랑하는 푸와비 저택을 마침 비르템베르스키 공작이 이끄는 부대에 항복해야 했다는 사실이었을 것입니다.

연줄 좋은 사위 후보

이야기는 1784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당시 이자벨라 차르토리스카 공작부인은 16세 딸 마리아를 위해 연줄 좋은 남편감을 물색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자벨라의 기대를 초과하는 후보가 나타났으니, 바로 비르템베르크 공자 루트비히였습니다. 그의 형제가 작은 독일 공국 비르템베르크를 통치하고 있었고, 자매 중 한 명은 오스트리아 왕세자의 아내, 또 다른 한 명인 마리아는 대공 파벨(훗날의 차르 파벨 1세, 예카테리나 2세의 아들)의 아내였습니다. 외숙부는 프로이센 국왕 프리드리히 2세였습니다.

이자벨라 차르토리스카의 전기를 쓴 가브리엘라 파우셰르클론스카는 루트비히 공자에 대해 “모험가이자 말썽꾸러기로, 교양과 교육이 전혀 없는 인물(...). 그는 아내를 찾은 것이 아니라 지참금을 찾고 있었다”고 적었습니다. 파밀리아는 부유하기로 유명했기에 비르템베르크 공자는 상트페테르부르크로 가는 길에 차르토리스키 가문을 방문했고, 이 자리에서 이자벨라에게 마리아와의 결혼을 논의했습니다. 공작부인은 독일 손님이 재산을 도박으로 탕진하는 무뢰한이자 술꾼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그녀는 딸의 손길을 내주었는데, 강력한 연줄을 지닌 이상적인 사위였기 때문입니다.

마리아 차르토리스카, 남편과 아들이 모두 반역자가 된 불행한 공작부인

어머니의 계획을 알게 된 마리아는 절망에 빠졌습니다. 그녀는 시인이자 자신의 스승이었던 프란치셰크 디오니지 크니아지닌이라는 다른 남자와 플라토닉하게나마 사랑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녀는 루트비히에게 서신까지 보내, 자신에게 그를 향한 감정이 없으므로 두 사람의 결혼은 의미가 없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러나 신랑감은 차르토리스카 양의 호소를 무시했고, 마리아는 전횡을 부리는 어머니의 뜻에 굴복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결혼식과 결혼 생활

1784년 10월 28일, 마리아와 루트비히는 결혼했습니다. 곧 부부는 이자벨라 공작부인을 동반하여 프로이센 국왕 프리드리히 2세의 초청으로 베를린으로 떠났습니다. 국왕은 조카의 젊은 아내에 대한 감탄을 숨기지 않았습니다. 차르토리스카 공작부인에게 “당신은 우리에게 천사를 주었군요”라고 말한 뒤, 이어 덧붙였습니다. “그녀는 천사지만, 저놈은….”

마리아 비르템베르스카는 유럽 각국 궁정에서 빠르게 인기를 얻었습니다(“우리 마린냐는 높이 평가받고 있다” — 1787년 이자벨라가 아들 아담에게 보낸 편지). 안타깝게도 모두에게 사랑받았지만, 남편만은 아니었습니다.

마리아 차르토리스카, 남편과 아들이 모두 반역자가 된 불행한 공작부인

부부는 푸와비에서 600km 떨어진 트셰비아투프의 성에서 살았습니다. 마리아는 고향에서 오는 편지를 간절히 기다렸지만, 이는 루트비히의 짜증을 샀고, 그는 아내가 외부와 접촉하는 것을 제한했습니다. 그는 아내를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학대했습니다. 나탈리아 킷카는 회고록에서 비르템베르크 공자가 “재미로 공작부인에게 낡은 두카트 동전을 세탁하게 했다”고 적었습니다. 아들 아담을 출산한 직후 산욕기에 있던 공작부인을 루트비히는 분노의 발작으로 죽일 뻔하기도 했습니다.

수년이 지난 후에야 마리아는 부모에게 자신의 고난을 털어놓았고, 부모는 딸의 결혼을 '구하려' 애썼습니다. 트셰비아투프 궁전 개보수 비용을 대주고 사위의 도박 빚을 정리해 주는 등의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실패한 부부 관계에 대한 처방전은 루트비히를 폴란드로 데려와 군 경력을 도와주는 것이었습니다.

폴란드-러시아 전쟁과 배신

마리아의 아버지 아담 카지미에시는 루트비히에게 장군 겸 소폴란드 사단 사령관이라는 자리를 '선사'했습니다. 1792년 폴란드-러시아 전쟁이 발발하자 비르템베르크 공작은 자신을 증명할 기회를 얻었지만, 그는 러시아군과 맞서 야전에 나가는 일을 계속 미루었습니다. 그의 수치스러운 행동은 바르샤바 상류 사회에 이미 공공연한 비밀이었습니다. 율리안 우르신 님체비치는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모두가 비르템베르크가 바르샤바를 떠나기를 꺼리는 태도에 놀라고 경악했다. 그는 맨 마지막에 출발했지만, 임무지로 가는 대신 장인의 영지인 볼친으로 향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리투아니아군을 소집하는 대신 연대들에 명령만 보내, 서로 멀리 떨어지도록 흩어놓았다.”

“그런 특이한 행동의 소식이 바르샤바에 전해지기도 전에, 비르템베르크 공자가 프로이센 국왕의 장관 중 한 명에게 보낸 편지가 탈취되었다. 그 편지에서 그는 약속대로 리투아니아군을 흩어놓아, 어떤 부대든 모스코바인(러시아인)에게 쉽게 포획되도록 만들었다고 보고하고 있었다.”

치용을 당한 마리아는 즉시 이혼을 청원하고 성사를 받아 수녀원에 몸을 숨겼습니다. 절망한 이자벨라는 남편에게 이렇게 썼습니다. “이건 내 잘못입니다. 내가 딸이 미워하던 남자와의 관계로 밀어 넣은 제 잘못입니다.” 이혼은 성립되었지만, 마리아에게는 남편뿐 아니라 아들마저 떠나버렸습니다. 법원이 어린 아담은 아버지가 키우도록 판결했기 때문입니다. 젊은 어머니는 프로이센 국왕에게 아들을 위한 중재를 간청했지만 헛수고였고, 아이는 푸와비를 떠나 비르템베르크로 향했습니다.

11월 봉기, 아들의 포격

루트비히에게 자란 아담은 어머니와 폴란드에 대해 오직 증오만 품고 자랐습니다. 젊은 비르템베르크 공자의 유일한 꿈은 군인의 삶이었고, 이 분야에서 성공하는 가장 확실한 길은 차르 군대에 들어가는 것이었습니다.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아담은 가장 권위 있는 러시아 부대 중 하나인 근위 후사르 연대에서 복무했으며, 어머니 쪽 친척들과는 연락을 끊은 채 지냈습니다.

마리아 차르토리스카, 남편과 아들이 모두 반역자가 된 불행한 공작부인

11월 봉기가 발발하자 비르템베르크 공자는 자신의 부대와 함께 폴란드 왕국으로 진입했습니다. 1831년 3월 초 그는 푸와비에 접근하여 포격을 개시했습니다. 당시 85세의 이자벨라와 딸들인 마리아, 조피아는 차르토리스키 영지에 있었습니다. 곧 누군가 포격 명령을 내린 지휘관의 이름을 전해왔습니다. “내 가련한 언니는 몹시 괴로워했다. 그녀의 아들은 사악하고 야만적이었다.” 조피아는 남편에게 보낸 편지에 이렇게 적었습니다.

늙은 공작부인은 딸들과 하인들을 데리고 푸와비를 떠나 갈리치아의 자신들의 영지로 피신했습니다. 한편 아담 비르템베르스키는 할머니의 재산을 강탈하고, 3만 권이 넘는 장서를 가져가 버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