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화 속 인물처럼 아름다운 이름을 지닌 그녀는 미모만으로 사람들을 압도했습니다. 그녀의 문 앞에는 구혼자들의 긴 행렬이 늘어섰고, 그중에는 몸이 허약하고 심지어 성적 무능하다는 소문까지 돌던 알렉산데르 야기에워치크도 있었습니다. 과연 그는 어떻게 헬레나의 남편이 되었을까요? 그리고 저명한 미녀였던 헬레나는 실제로 모스크바가 리투아니아 궁정에 심어놓은 밀정이었을까요?
'엄격한 이반 3세'는 비잔티움 황실의 후손과의 결혼을 통해 네 명의 자녀를 두었습니다. 어린 나이에 요절한 맏딸, 차녀 헬레나, 그리고 아들 바실리와 유리였습니다.
아름다운 헬레나
학식이 깊었던 어머니 조피아는 외동딸의 교육에 각별히 신경을 썼습니다. 덕분에 공주는 읽고 쓰는 것은 물론 그리스어까지 익힐 수 있었습니다. 고귀한 출신에 뛰어난 미모까지 갖춘 그녀는 순식간에 유럽에서 가장 매력적인 신부 후보가 되었고, 그 미모에 관한 소문은 국경을 넘어 빠르게 퍼져나갔습니다.
혼기를 맞추자마자 구혼자들이 몰려들었습니다. 물론 설령 그녀가 11월 밤처럼 추하고 어두운 외모였다 해도 세계의 강자들은 여전히 모스크바 궁정으로 중매꾼을 보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름다움은 분명 그녀를 더욱 돋보이게 하는 추가 매력이었습니다.
야기에워 왕조와 중앙유럽의 패권을 다투던 합스부르크 가문 역시 이 아름다운 공주를 탐내는 시선으로 지켜보았습니다. 당시 야기에워 가문의 영토는 폴란드와 리투아니아뿐 아니라 체코와 헝가리까지 포함하고 있었기에, 이 혼사는 합스부르크에게 전략적으로도 매력적인 카드였습니다. 1490년에는 제국 사절 예르그 폰 투른이 모스크바를 방문해 헬레나를 막시밀리안 1세에게 시집보내 달라고 요청하기까지 했는데, 이는 곧 야기에워 왕조에 대항하는 동맹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막시밀리안이 부르고뉴의 마리아와 대리 결혼(per procura)을 한 상태였다는 사실이 이 일에 더욱 화룡점정을 찍어주었다는 것입니다.
또 다른 구혼자로는 키예프 공작부인 바르바라 올렐코브나의 아들, 마조비아 공작 '붉은이' 콘라트 3세가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혼사 계획을 위해 튜턴 기사단의 지원을 받아냈지만, 이미 튜턴 기사단의 전성기는 오래전에 저물었기 때문에 큰 도움이 되지 못했습니다.
바벨 왕궁에서도 아름다운 공주와 왕자들 중 한 명의 혼사가 거론되었습니다. 이 안건은 리투아니아 궁정 원수 얀 자브제진스키가 처음 제안했고, 그에게 이 생각을 건네준 이는 리투아니아 보야르 이반 파트리키예프였다고 전해집니다. 그러나 카지미에시 야기에워치크 국왕은 크게 열의를 보이지 않았고, 왕비는 정교회 신자를 가문에 들이는 일 자체를 논의조차 하지 않으려 했습니다.
그러나 합스부르크 가문의 움직임에 대한 소문이 왕의 귀에 닿으면서 국왕의 마음은 변했습니다. 이미 1490년 4월, 왕자들의 스승 칼리마코스는 조피아 공작부인에게 서신을 보내 혼약을 제안했지만, 답장은 오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그 결심을 허락하지 않겠다”
이 문제는 모스크바 대공국이 리투아니아 영토를 공격하면서 다시 수면 위로 올라왔습니다. 1492년 6월 시작된 이 공격은 모스크바 대공국과 리투아니아 간 전쟁의 서막이었습니다. 같은 해 10월, 리투아니아 세임(의회)은 대공 알렉산데르와 이반 3세의 딸 헬레나의 혼인을 결정했는데, 이를 통해 양국 관계가 개선되기를 기대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휴전 체결과 혼사 협상을 담당할 공식 사절단이 모스크바로 떠난 것은 2년 뒤 가을이 되어서였습니다.
연대기 작가들의 기록을 믿는다면, 장차 군주의 신부가 될 여인을 본 사절들은 그 비범한 아름다움에 눈부셔 말을 잇지 못했고, 공주를 천사처럼 아름답다고 여겼다고 합니다.
혼전 협상은 2주 넘게 이어졌고, 협상이 마무리된 뒤 합의서가 작성되었습니다. 그 결과 1494년 2월 6일, 스타니스와프 키에즈가일로가 알렉산데르 공작을 대신하여 헬레나와 약혼식을 거행했습니다.
의외로 협상에서 가장 민감한 쟁점은 알렉산데르의 미래 아내의 종교 문제였습니다. 이반은 외동딸이 정교회 신앙을 지키기를 간절히 바랐고, 폴란드 측에 그녀의 미래 남편이 “로마(가톨릭)식 전례를 강요하지 않고, 그녀가 그리스(정교회)식 전례를 지키도록 하겠다”는 약속을 요구했습니다. 사절단이 만에 하나 헬레나가 자발적으로 종교를 바꾸고 싶어하면 어떻게 할 것이냐고 조심스럽게 묻자, 공작은 “우리는 그런 결심을 허락하지 않을 것”이라고 답했습니다. 또한 약혼녀의 아버지는 딸을 위해 빌뉴스 성에 정교회 성당을 짓도록 강력히 요구했습니다.
결국 모두가 협상 결과에 만족했습니다. 저 아름다운 처녀가 빌뉴스로 시집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리투아니아인과 폴란드인은 알렉산데르와 헬레나의 결혼으로 모스크바와의 관계가 개선되기를 바랐고, 한편 교활한 이반은 딸을 리투아니아 궁정의 밀정으로 만들려는 속셈을 품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역사는 그 소녀가 부모의 노여움을 무릅쓰고 남편과 새 조국에 대한 충성을 선택했다는 사실을 증명해 주었습니다.
한편 당시 18살이 채 되지 않았던 약혼녀는 종교 문제 외의 이유로도 자신에게 내려진 결혼 계획이 마음에 걸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약혼자 알렉산데르는 몸집이 상당히 큰 편이었지만 건강에 심각한 문제가 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었습니다. 그는 몹시 허약하고 병약하며, 더 나쁘게는 성적 무능하다는 소문까지 돌았습니다.
참고로 이 혼약은 1495년 2월 빌뉴스에서 실제 혼례로 이어졌고, 1501년 알렉산데르가 폴란드 국왕으로 즉위하면서 헬레나 역시 폴란드의 왕비가 되었습니다. 그녀는 평생 정교회 신앙을 굳게 지켰으며, 1513년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후 동방 정교회 측에서는 그녀를 축복자로 추대하려는 시도가 있기도 했다고 전해집니다.
출처
이 글은 이보나 키엔츨러(Iwona Kienzler)의 저서 『폴란드 통치자들의 외국 출신 아내들과 어머니들』의 발췌입니다. 해당 도서는 벨로나(Bellona) 출판사에서 새롭게 출간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