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이야기

볼셰비키 포로수용소의 지옥: 잊혀진 폴란드 포로들의 비참한 운명

잊혀진 진실: 볼셰비키 포로수용소에 갇힌 폴란드 군인들

최근 몇 년간 폴란드가 1919~1920년 포로로 잡은 붉은군대 병사들을 고의적으로 학대했다는 주장이 끊이지 않고 있습니다. 러시아 측은 심지어 폴란드가 자국 병사들에게 집단학살(제노사이드)을 자행했다고 주장하기까지 합니다. 그러나 정작 러시아는 같은 시기 볼셰비키에게 포로로 잡힌 폴란드 군인들의 처참한 운명에 대해서는 '잊어버린' 듯합니다. 그들의 운명은 결코 밝지만은 않았습니다.

볼셰비키 포로수용소의 지옥: 잊혀진 폴란드 포로들의 비참한 운명

바르샤바 전투에서 포로로 잡힌 붉은군대 병사들. 러시아는 이들이 이후 폴란드 포로수용소에서 집단학살의 희생자가 되었다고 주장하지만, 정작 자신들이 포로로 잡은 폴란드 군인들에게 어떤 운명을 안겨주었는지는 기억하려 하지 않습니다.

정확한 숫자조차 알 수 없는 포로들

믿기 어렵지만, 100년 가까이 전 볼셰비키에게 포로로 잡힌 폴란드 군인의 정확한 숫자는 아직까지도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1921년 2월 24일 폴란드, 소련 러시아, 우크라이나 인민공화국이 체결한 포로 및 인질 교환 협정에 따르면, 러시아 측은 4만 명이 넘는 폴란드 군인을 송환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돌아온 이들은 겨우 2만 5천여 명에 불과했습니다. 다만 이 수치만으로 전체 포로의 규모를 단정하기는 어렵습니다.

첫째, 붉은군대는 포로로 잡은 폴란드군 병사들을 반복적으로 살해했습니다. 특히 장교와 부사관에 대한 학살이 극심했는데, 가장 참혹한 상황이 벌어진 곳은 부됸니(Budyonny) 기병집단과 가칸(Ga-Khan)이 지휘하는 제2기병군단(1920년 7월부터 제3기병군단)의 작전 구역이었습니다.

둘째, 간신히 목숨을 부지해 포로수용소에 도달한 이들조차 즉각적인 죽음의 위험에 놓여 있었습니다. 그들의 처우는 '빈약하다'는 표현으로도 부족할 만큼 참담했습니다.

볼셰비키 포로수용소의 지옥: 잊혀진 폴란드 포로들의 비참한 운명

볼셰비키에게 포로로 잡힌 폴란드 군인들은 좋은 대우를 기대할 수 없었습니다. 구타당하고, 과중한 노역에 시달렸으며, 많은 경우 살해되기까지 했습니다.

오물, 악취, 그리고 전염병

포로들은 광활한 제국 곳곳에 흩어져 있는 최종 수용소에 도착하기 전까지 여러 개의 중간 거점을 거쳐야 했습니다. 그중 하나였던 지토미르(Zhytomyr) 감옥의 상황을 포병 하사관 브와디미르 가르보비아크(Włodzimierz Garbowiak)는 이렇게 회고했습니다.

“상태는 말로 표현할 수 없었습니다. 빵 한 덩이(4러시아 파운드 미만, 약 1.6kg)를 25명이 나눠 먹어야 했습니다(러시아 파운드는 409.511g). 게다가 하루 한 번 역겨운 국물이 조금씩 배급되어 우리는 극심한 허기에 시달렸습니다. 그런 가혹한 형편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짐을 내리는 노역에 몰려갔고, 체력이 바닥난 상태에서도 많은 작업량을 요구받았습니다.”

“우리에게 유일한 구원은 현지 주민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때때로 연민의 마음에서 빵 한 조각과 따뜻한 음식을 가져다주었습니다.”

“숙소 문제는 차라리 덜 비참한 편이었습니다. 오물이 가득하고 축축하며 사람으로 과밀해 있던 감방, 악취가 김처럼 서리던 공간, 게다가 속옷이 없다는 점은 전염병의 최적 온상이 되었습니다. 의료 지원이 전무한 상황에서 전염병은 무섭게 번져 하루에도 여러 명의 포로가 목숨을 잃었습니다.”

목적지 수용소에 도착한 뒤에도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습니다. 우선 포로들은 철저한 신체 검색을 당했습니다. 1920년 여름 옴스크(Omsk) 수용소에서 탈출에 성한 안토니 구위비치(Antoni Gługiewicz) 소위는 당시를 이렇게 증언했습니다.

“우리는 소유물을 완전히 빼앗겨 겨우 옷 한 벌과 속옷 한두 벌, 담요 한 장 또는 코트 한 벌만 남겨졌습니다.”

“신분증, 사진, 모든 종류의 돈을 압수당하고 소련 화폐 250루블만 남겨졌습니다. 반지(결혼반지까지), 시계, 메달, 옷, 속옷, 면도기, 주머니칼, 심지어 비누, 성냥, 커피까지 빼앗겼습니다. 이는 우리가 이송 도중 국제주의자들에게 지급받은 물품들이기도 했습니다.”

그 후 포로들은 대부분 인간의 존엄성을 짓밟는 조건의 숙소에 수용되었습니다. 가장 흔한 수용처는 난방이 되지 않는 낡고 썩어가는 목재 막사, 혹은 황폐해진 옛 수도원 건물이었습니다. 1921년 8월 말 폴란드 외무부 보도국의 통신문에는 이렇게 적혀 있습니다.

“포로들은 침구가 없어 자기 옷을 깔고 다락침대에서 잔다. 더러운 원시적 변소, 그 바닥은 오염되어 있다. 빈대가 상당히 많고, 소독기는 고장 나 있다. 목욕은 한 달에 두 번, 비누 대신 엉뚱한 세척 분말을 지급한다.”

“세탁은 스스로 하거나 수용소 세탁부에 돈을 내고 해야 한다. 목욕 후에는 아주 저질의 속옷 한 벌만 교환해준다.”

여기서 강조할 점은, 이것이 폴란드 대표단의 방문이 허용된 모스크바의 장교용 '시범 수용소' 중 하나에 대한 보고서였다는 사실입니다. 다른 수용소에서는 상황이 훨씬 더 나빴음이 틀림없습니다.

볼셰비키 포로수용소의 지옥: 잊혀진 폴란드 포로들의 비참한 운명

볼셰비키에게 살해당한 폴란드 포로들.

형편없는 식사와 일요일도 없는 강제 노역

열악한 숙소 조건 외에도 폴란드 포로들은 또 다른 고통, 즉 암울하기 짝이 없는 수용소 식사와 씨름해야 했습니다. 볼셰비키 포로수용소에서 또 한 번 탈출에 성한 체스와프 프시보로프스키(Czesław Przyborowski) 소위는 심문한 폴란드군 제2국 장교들에게 다음과 같이 진술했습니다.

“하루 배급은 기장 겨가 50% 섞인 빵 3/4파운드, 설탕 3즐롯트(1즐롯트=4.266g), 커피 2즐롯트, 그리고 청어 반 마리와 거친 호밀 열두 알이 들어 있어야 하는 얇은 국물로 된 점심이다. 점심은 불규칙하게 제공되는데, 한 번은 오전 11시, 또 한 번은 오후 4시에 받는다. 때로는 점심 대신 도시락이 주어지거나 아예 아무것도 주어지지 않는다.”

볼셰비키는 포로들이 '심심해하지 않도록' 하는 데에도 신경을 썼습니다. 그 방안은 흔히 인체의 한계를 넘는 육체노동이라는 형태의 '오락'이었습니다. 앞서 언급한 구위비치 소위의 증언입니다.

볼셰비키 포로수용소의 지옥: 잊혀진 폴란드 포로들의 비참한 운명

“우리는 일요일과 공휴일도 예외 없이 매일, 병사들의 강력한 호위 아래 무거운 강제 노역에 동원되었습니다. 무덤을 팠고, 선착장에서 배에 실릴 짐을 나랐으며, 철도 작업장과 창고에서 일했습니다. 또한 옛 콜차코프(Kolchak) 정부 관계자를 재판하기 위해 철도 차고에 설치된 특별법정을 위해 단상과 벤치 등을 만들었고, 마당의 쓰레기와 분뇨 치우기, 심지어 하수구와 변소 청소까지 했습니다. 탈출하기 직전에는 이르티시(Irtysh) 강의 철교 공사장에서 일하고 있었습니다.”

짐작하기 어렵지 않듯이, 과중한 노동과 형편없는 식사는 포로들의 건강에 끔찍한 결과를 낳았습니다. 당시 유행하던 발진티푸스, 이질, 스페인 독감 등의 전염병이 큰 희생자를 냈고, 여기에 괴혈병, 빈혈, 심지어 결핵까지 포로들을 괴롭혔습니다.

이러한 실태는 폴란드 정보기관이 이르쿠츠크(Irkutsk)에 수용된 시베리아 사단(제5폴란드소총사단) 포로들의 처우에 대해 작성한 보고서에서도 확인됩니다. 보고서는 “포로의 30~40%가 발진티푸스 유행병에 걸려 있으며, 그중 20%가 사망한다. 즉 700~1,000명이 티푸스로 사망했다”고 추산했습니다.

러시아 아카이브에 대한 접근이 제한된 상황에서 볼셰비키 수용소에서 생존하지 못한 폴란드인의 정확한 숫자를 밝히는 것은 아직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아마도 수만 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그곳에서 목숨을 잃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출처

  • 「소련 포로수용소의 폴란드 포로 1919~1921」(Polish POWs in Soviet captivity 1919-1921), 『군사기록보관소 업무 통보』(Bulletin of the Military Archive Service), 1995년, 제18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