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는 승자가 기록한다고들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북아메리카에서 원주민을 처음 마주한 유럽인들이 그들을 어떻게 바라보았는지에 대해서는 거의 모든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정작 초대받지도 않은 손님들, 즉 유럽인들을 아메리카 원주민이 어떻게 생각했는지 말하기는 훨씬 어렵습니다. 다행히 몇몇 사료가 남아 있는데, 이에 따르면 많은 원주민의 눈에 유럽인은 잔혹하고 미개한 야만인이었다고 합니다.
신으로 맞이했다는 전설, 사실일까?
위대한 탐험가들과 바다 항해의 개척자들이 겸손하지 않았다는 점은 부정하기 어렵습니다. 새 대륙에 대한 원정기를 기술할 때 언제나 자신들을 최대한 좋게 보이려 했던 것이 당연했습니다. 이를 위해 그들은 원주민들의 평가를 활용하기도 했는데, 그중에서 가장 유리한 것들만 골라 인용했습니다. 그렇기에 오늘날까지 "인디언들은 유럽인을 오랫동안 기다려온 신으로 여겼다"는 전설이 퍼져나간 것입니다.
떠다니는 섬, 피를 마시는 야만인
물론 일부 부족은 실제로 자신들의 믿음과 연결 지어 유럽인의 도래를 해석했을 수 있습니다(다만 그들을 엄격하게 '신'으로 인식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견해란 사람마다 다른 법입니다. 남아 있는 기록과 회고를 보면, 적어도 원주민들이 유럽인을 경외하는 것만큼이나 우월감, 혐오, 당혹감을 담아 바라본 경우가 많았습니다.
바다 건너 야만인들의 '떠다니는 섬'
1633년, 한 어린 이누이트 소년이 예수회 선교사들에게 수십 년 전 프랑스인이 처음 방문했을 때 할머니가 들려준 이야기를 전했습니다. 자기네 카누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거대한 배를 보고 원주민들은 그것이 움직이는 섬에 틀림없다고 확신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마을 사람들이 배에 탄 이들을 발견하자, 관습에 따라 그들을 맞이할 웅집(원주민 가옥)을 준비하기 시작했습니다. 동시에 남편들은 네 척의 카누에 나눠 타고 낯선 이들을 맞으러 나섰습니다. 첫인상은 그리 좋지 않았습니다. 『콜럼버스 이후: 식민지 시대 북아메리카의 민족사 에세이』의 저자 제임스 액스텔(James Axtell)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프랑스인들은 그들에게 배에 싣고 온 비스킷 한 통을 주었고, 아마 포도주도 함께 주었을 겁니다. 그러나 원주민들은 이 '피를 마시고 나무를 먹는' 사람들을 보고 공포에 떨었습니다."
캐나다를 탐험한 프랑스인 자크 카르티에가 처음 인디언들을 만나는 장면... 첫인상이 그리 좋지 못했을 것으로 짐작됩니다.
미크마크족(Mi'kmaq)도 비슷하게 반응했습니다. 그들은 건네진 비스킷을 자작나무 조각으로 여겼지만, 무엇보다 초대받지 않은 손님들의 거의 식인에 가까운 습관에 경악했습니다.
"포도주가 권해지자 원주민들은 이 낯선 이들이 '잔혹하고 비인간적인 존재'라고 확신했습니다. 자신들의 유희를 위해 (...) 저항 없이 피를 마신다는 것 때문이었습니다. (...) 그래서 [미크마크족]은 한동안 그들의 음식을 받아들이지 않았을 뿐 아니라, 자신들의 생각에 피와 폭력으로 살아가는 사람들과는 어떤 접촉도, 어떤 교류도 맺기를 거부했습니다."
때로는 더 우스꽝스러운 오해도 있었습니다. 더 서쪽에 살던 오지브웨족(Ojibwe)은 유럽인 자체보다 그들이 남긴 흔적을 먼저 접했습니다. 완전히 개간된 숲을 보고 그들은 그곳에 크고 날카로운 이빨을 가진 거대한 비버가 출몰했다고 결론 내렸습니다.
또한 미시간호 주변에 살던 포타와토미족(Potawatomi)과 메노미니족(Menominee)은 유럽인이 인간이 아니라 미지의 다른 종에 속한다고 단언했습니다. 문제는 옷이나 피부색이 아니라, 새로 온 이들의 몸이 털로 덮여 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가난뱅이와 살인자의 나라에서 온 사람들
물론 첫인상이 반드시 옳은 것은 아닙니다. 프랑스인들이 북아메리카에 영구히 머물 뜻임을 깨달았을 때, 그들은 원주민에게 깊은 인상을 남기기로 했습니다. 목표는 원주민들이 순순히 복종하고, 더 나은 도덕과 참된 종교를 받아들이도록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나무를 먹고 피를 마시는' 백성의 또 다른 위풍당당한 모습
이를 위해 그들은 몇몇 원주민을 유럽으로 데려갔습니다. 특별히 마련된 '견학 여행'을 마친 이들이 부족으로 돌아가 자신들이 목격한 놀라운 것들을 이야기하도록 하려는 계획이었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또다시 계획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1562년, 프랑스 국왕 샤를 9세의 궁정으로 끌려간 투피남바(Tupinambá) 부족 세 명은 무엇보다도 프랑스에 만연한 사회 불평등에 주목했습니다. 액스텔의 기록에 따르면, 그들은 "프랑스인 중 절반은 모든 것을 누리며 사치를 부리는 반면, 나머지 절반은 굶주림과 가난과 싸우며 그들의 문 앞에 웅크리고 있는" 것을 알아차렸습니다. 이러한 부의 분배는 아메리카의 '야만인'들에게 극도로 불공정하게 보였습니다.
반세기 후, 비슷한 목적으로 프랑스에 파견된 열여덟 살의 휴런(Huron) 청년 사비뇽(Savignon) 역시 똑같이 부정적인 인상을 받았습니다. 그는 비겁하고 참으로 여성스러운 남자들의 말다툼과, 프랑스인들이 곤경에 처한 이웃을 돕기를 꺼리는 탓에 생긴 수많은 빈민과 거지에 대해 혐오감을 느꼈습니다.
티무쿠아 추장이 프랑스 탐험가 르네 굴렌 드 로동니에르를 맞이하는 장면. 과연 그도 야만인으로 여겨졌을까요?
그러나 그를 가장 분노하게 한 것은 프랑스에서 사람들이 죄가 있든 없든 채찍질당하고, 교수형에 처하고, 사형까지 당한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이런 잔혹함을 들은 사비뇽의 동포들은 이후 퀘벡의 프랑스 학교에 자녀를 보내는 일을 거부했습니다.
바다 건너에서 온 미개인들과 거지들
원주민들은 유럽인의 도덕(혹은 무도함)을 경멸했을 뿐 아니라, 바다 건너의 수많은 발명품과 무기에 감탄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의 우월성을 확고히 믿었습니다.
앞서 언급한 사비뇽은 프랑스인들이 가난과 기본 원자재의 부족 때문에 자신의 고향으로 쫓겨왔다고 의심의 여지 없이 확신했습니다. 이런 견해는 그만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제임스 액스텔은 이렇게 설명합니다. "인디언들—흔히 야만적이고 가난하며 문자를 모른다고 여겨진 사람들—은 강렬한 우월감을 지니고 있었다"고요.
예컨대 미크마크족은 프랑스인을 처음 만났을 때 자신들이 그들보다 더 뛰어나고 용감하며 심지어 더 부유하다고 판단했습니다. 이후 80년 동안 그들은 이 견해를 바꾸지 않았습니다. 17세기 이 부족의 추장은 간결하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프랑스인보다 자신이 더 행복하고 더 강력하다고 여기지 않는 인디언은 없다."
출처
- James Axtell, After Columbus: Essays in the Ethnohistory of Colonial North America, Oxford University Press, 198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