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이야기

템플 기사단의 저주? 프랑스 왕가를 집어삼킨 피비린내 나는 연쇄 참극

14세기 초, 프랑스는 전성기를 누리고 있었다. 필리프 4세 '미남왕'은 교황마저 굴복시키며 유럽 최강의 군주로 군림하는 듯했다. 그런데 갑자기 패배와 비극, 굴욕의 행진이 시작되었다. 짧은 시간 안에 왕권은 거의 모든 것을 잃어버렸다. 이것은 우연인가, 아니면 저주인가? 그리고 템플 기사단은 이 모든 참극과 대체 무슨 관계가 있는 것일까?

987년 위그 카페가 왕위에 오른 이후 3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프랑스의 왕들은 왕의 가장 기본적인 의무를 모범적으로 수행해 왔다. 바로 아들을 남기는 일이다. 이를 통해 그들은 당대 어떤 왕국도 경험하지 못한 국가적 안정을 이루어냈다. 게다가 왕가의 차남들은 수많은 공국과 백작령을 물려받았고, 심지어 외국의 왕관까지 차지하기도 했다. 왕조의 번영은 확실해 보였다. 정말 그랬을까?

심판대에 오른 템플 기사단

1314년, 7년에 걸친 유명한 템플 기사단 재판이 막을 내렸다. 부와 함께 커져간 기사단은 이단, 소돔주의 등 여러 금기 행위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

사법 제도의 치부를 드러낸 이 촌극 같은 재판은 수석 검찰관 윌리암 드 노가레와 프랑스 국왕 필리프 4세 본인이 직접 주도했다. 모든 과정은 수도승들을 심판할 유일한 권한을 가진 인물, 즉 교황 클레멘스 5세의 승인 아래 진행되었다. 오늘날까지 지배적인 견해는 이렇다. 템플 기사단의 유일한 죄는 돈이 급했던 왕의 눈을 찌른 그들의 막대한 재산이었다는 것.

템플 기사단의 저주? 프랑스 왕가를 집어삼킨 피비린내 나는 연쇄 참극

재판이 시작되기 전 템플 기사단은 존경받는 기사단이었다. 사진은 프랑수아 마리우스 그라네가 그린 자크 드 몰레의 서임 장면 (출처: 퍼블릭 도메인).

템플 기사단의 대수장 자크 드 몰레는 3월 18일 화형에 처해졌다. 전설에 따르면 불길 속에 선 그 수도승은 자신의 결백을 외치며 박해자들을 향해 저주를 퍼부었다고 한다.

교황 클레멘스여, 국왕 필리프여, 기사 윌리암이여! 해가 지나기 전에 우리는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다시 만나리라!

문제는 재판의 주역들만 저주의 영향을 받은 것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일부 기록에 따르면 저주는 프랑스 왕의 후손들에게 13대에 걸쳐 미쳤다고 전해진다.

핏빛으로 물든 수확

저주의 첫 번째 희생자로 꼽히는 윌리암 드 노가레는... 이미 저주가 시작되기도 전에 세상을 떠난 상태였다. 죽음은 그를 1313년에 찾아갔다.

템플 기사단의 저주? 프랑스 왕가를 집어삼킨 피비린내 나는 연쇄 참극

보르도 근교 위제스트의 교회에 안치된 교황 클레멘스 5세의 묘비. 그는 드 몰레가 화형당한 지 단 한 달 만에 세상을 떠났다 (사진: Xabi Rome-Hérault, CC BY 3.0).

동시대 사람들을 더 크게 뒤흔든 것은 교황 클레멘스 5세의 급작스러운 죽음이었다. 그는 드 몰레가 처형된 지 단 한 달 만에 급성 설사로 사망했다.

1314년 11월 초, 46세의 필리프 4세는 사냥 중 뇌졸중 발작을 일으켜 말에서 떨어졌고, 몇 주간의 고통 끝에 숨을 거두었다. 이처럼 잇따른 시신들은 사람들에게 깊은 생각을 안겨주었다. 1314년이 저물기 전에 저주의 핵심 무대는 이미 완성된 셈이었다.

저주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필리프 4세의 뒤를 이어 장남 루이 10세 '말다툼쟁이'가 즉위했다. 그런데 이 젊은 군주의 첫 번째 아내는 아버지가 생전에 간통죄로 유폐시켰다가, 의심스러울 정도로 빠른 속도로 요절했다. 루이는 두 번째 결혼을 올렸고... 1316년 6월 5일 사망했다. 나이 겨우 26세, 재위 기간은 1년 반에 불과했다. 사인은 폐렴으로 추정된다.

그는 첫 결혼에서 얻은 딸과 임신 중이던 두 번째 왕비를 남기고 떠났다. 왕위 계승은 출산이 끝날 때까지 보류되었다. 루이 사후 5개월 만에 왕비는 아들을 낳았다. 그러나 요한 1세 '유복왕'은 단 5일을 살았다.

2년 사이에 세 왕이 연달아 요절하고 왕조는 계승 위기에 빠졌다. 이것은 분명 하나님의 벌처럼 보였다. 그리고 이것이 끝이 아니었다...

왕좌는 누구의 것인가

루이 10세의 뒤에는 첫 결혼에서 얻은 미성년 딸만 남았는데, 그녀는 사생아라는 비공식적인 의혹에 시달리고 있었다. 한편 루이의 동생, 23세의 필리프는 야망 있고 성숙했으며 무엇보다 아들이 있었다. 1317년 초, 그는 정당한 계승자라기보다는 찬탈자처럼 보일 만큼 서둘러 스스로 대관식을 거행했다.

템플 기사단의 저주? 프랑스 왕가를 집어삼킨 피비린내 나는 연쇄 참극

조카가 죽은 지 두 달 만에 서둘러 치러진 필리프 5세 '장신왕'의 대관식 (출처: 퍼블릭 도메인).

새 왕 필리프 5세는 그 후에야 파리 삼부회의 지지를 얻었다. 학자들이 새로 파헤친 살리카 법의 억지스러운 해석에 따르면, 왕권은 오직 남계를 통해서만 계승될 수 있다며 조카디의 계승권을 부정한 것이다.

상속자를 둔 필리프 5세는 왕조에 다시 안정을 가져올 수 있었다. 그러나 그에게는 허락되지 않았다. 그의 아들은 1년도 살지 못했다. 1322년 1월 3일, 필리프 5세는 5년간의 통치를 마치고 세상을 떠났다. 나이 겨우 28세였고, 우물의 오염된 물을 마신 뒤 이질에 시달리다 사망했다. 당시 그에게는 네 명의 딸이 있었지만... 아버지의 왕좌로 가는 길을 열어준 바로 그 법 때문에 그들은 상속권이 없었다. 보다시피 필리프는 자신의 논리를 너무나 효과적으로 펼친 셈이다.

왕좌는 막내 동생, 27세의 샤를 4세 '미남왕'에게 넘어갔다. 자녀가 없던 그는 곧바로 아내와 이혼했다. 두 번째 왕비는 2년 뒤, 며칠을 살다 죽은 아들을 낳다 세상을 떠났다. 세 번째 아내 사이에서는 두 딸을 두었다. 그녀가 세 번째 임신 중이던 1328년 2월 1일, 샤를 4세는 겨우 33세로 사망했다. 두 달 뒤 태어난 아이는 딸이었다.

이렇게 해서 단 14년 동안 무려 다섯 명의 프랑스 왕이 세상을 떠났다. 카페 왕조는 단절되었고, 적법한 계승자의 부재는 백년전쟁의 도화선이 되었다.

우연이 아니라면 무엇이었을까

보다시피 수백 년간 프랑스 왕조를 비껴갔던 재앙들이, 불운한 템플 기사단장이 화형당한 직후 전례 없는 위력으로 몰아닥쳤다. 순수한 우연일까? 미신을 믿던 프랑스인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당대에는 강력한 인물들의 돌연사를 초자연적인 힘의 개입으로 설명하는 경우가 흔했다. 이미 1305년에 세상을 떠난 필리프 4세의 왕비는 부두 인형과 비슷한 물건을 이용한 흑마술의 희생자였다는 소문이 돌았다. 루이 10세와 필리프 5세의 죽음 역시 사악한 힘의 소행으로 여겨졌다.

템플 기사단의 저주? 프랑스 왕가를 집어삼킨 피비린내 나는 연쇄 참극

불길한 시작: 발루아 왕조의 첫 왕은 왕좌의 최대 경쟁자였던 잉글랜드의 에드워드 3세로부터 신속히 경의를 받았지만, 곧 두 사람 사이에 백 년 넘게 이어질 전쟁이 터졌다 (장 프로아사르의 미니어처, 출처: 퍼블릭 도메인).

또 다른 대표적인 설명은 독살이었다. 교황 클레멘스 5세와 필리프 4세, 루이 10세, 요한 1세가 모두 독으로 살해되었다는 의혹이 널리 퍼져 있었다.

과연 저주였을까

오늘날까지 전해지는 이 저주 이야기 자체가, 우연을 믿고 싶지 않았던 사람들의 전형적인 해석으로 보인다. 게다가 그 몇몇 부분은 납득하기 어렵다.

첫째, 윌리암 드 노가레는 드 몰레보다 먼저 죽었다. 다만 대수장이 그 사실을 알지 못했을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

템플 기사단의 저주? 프랑스 왕가를 집어삼킨 피비린내 나는 연쇄 참극

생드니 대성당에 안치된 필리프 4세의 묘. 조각가가 이 통치자의 후손들의 운명을 두고 한 고민을 담아내려 한 것일까 (사진: PHGCOM, GFDL).

'13대에 걸친 저주'라는 설정도 논란의 여지가 크다. 열세 대면 대략 400년에 해당한다. 프랑스가 그토록 오랜 세월 내내 저주받았다는 말인가? 300년 뒤에 활약한 리슐리외 추기경이라면 아마 고개를 저었을 것이다. 아니면 운명이 필리프 4세의 모든 후손들 위에 걸려 있었던 걸까? 하지만 그의 후손은 매우 많았고, 그중 상당수는 행복하고 번영하며 오히려 평화로운 삶을 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