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이야기

폴란드 인민공화국의 성생활: 금기 뒤에 숨겨진 성혁명의 역사

폴란드 사회는 성에 관해서는 상당히 보수적이면서도, 남의 침실을 들여다보는 것은 좋아한다. 정치 체제가 무엇이든 간에 말이다. 인민 폴란드 시대, 우리 동포들의 은밀한 삶은 과연 어떠했을까?

폴란드인의 성에 관해 연구하고 집필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중세를 다루든, 르네상스를 다루든, 오늘날을 다루든 마찬가지다. 지금도 폴란드에서 은밀한 삶은 공론화되기 어려운 금기 주제다. 최근 몇 년간 발표된 소수의 역사학자들의 저작들은 대개 관대한 미소를 자아낼 뿐이다. 정치인들의 행동만이 성 문제를 거리로 끌어내었다.

인민 폴란드 시대의 섹스는 어떠했을까? 역사학자 마르친 쿨라(Marcin Kula) 교수는 저서 『인민 폴란드의 성 문제』 서문에서 이렇게 적었다.

모든 것을 포괄하려 했던 공산주의 체제는 흔히 사적인 것으로 여겨지는 문제까지 모든 주제에 입을 열었다. 공식적인 수준에서는 매우 도덕적이었다. (...) 그러나 현실은 물론 전혀 달랐다. 당의 요직 인사들 사이에서도, 평범한 사람들 사이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공산주의는 (...) 겉으로는 모든 것이 잘 돌아가고 섹스조차 거론되지 않는 닫힌 공동체 같았다. 반면 숲속에서는 온갖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인민 폴란드의 현실 속 섹스도 바로 이러했다. 국가 권력의 대변인들과 사회 모두가 위선적인 파사드 도덕을 유지했다. 통치자들의 제약에도 불구하고 매우 강력했던 폴란드 가톨릭교회의 입장이 이를 더욱 강화했다. 게다가 전간기 세대의 청교도적 도덕관은 성을 잘못된 것으로 인식하게 만들었다.

베누스의 아들과 딸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마자 공산 정권을 감시한 것은 우익 지하조직, 일반 강도단, 우크라이나 무장세력뿐이 아니었다. 당시 폴란드는 실제로… 성병이라는 유행병과 싸우고 있었다.

1947년에는 매독, 임질, 옴에 감염된 사람이 전쟁 전보다 네 배나 많았다. 보건부는 이 '역병'을 종식시키기 위한 'W 작전'을 개시했다. 팸플릿이 제작되고 의사들을 위한 지침이 하달되었으며, 선전 영화가 만들어져 저녁 상영 시간에 극장에서 상영되었다. 1948년 여름까지 약 50만 부의 전단지가 인쇄되었다.

폴란드 인민공화국의 성생활: 금기 뒤에 숨겨진 성혁명의 역사

1946년, 볼레스와프 비에루트가 성병 퇴치에 관한 법령을 공포하다

강연과 교육만으로는 만연한 역병을 막을 수 없자 법적 제재가 동원되었다. 1946년 볼레스와프 비에루트(Bolesław Bierut)는 성병 퇴치에 관한 법령을 공포했는데, 여기에는 '자신의 성병을 숨기거나, 의무 검사를 받지 않거나, 치료를 중단하는 자는 범죄를 저지른다'고 명시되어 있었다. 처벌은 2주간의 구류 또는 벌금에 결혼 금지 조치가 더해지는 것이었고, 이미 혼인한 감염자의 경우 법원이 이혼을 명령할 수 있었다.

낙태 문제

폴란드 입법에서 낙태 문제는 독립 회복 이래 계속 미결 상태로 남아 있었다. 상호 배타적인 이해관계를 가진 집단이 너무 많아 사실상 누구도 현행 법률에 만족하지 못했다. 이 문제는 전후 폴란드로 그대로 이어졌다.

인민 폴란드에서의 낙태 논쟁은 매우 오랫동안 이어졌고, 1956년 4월 27일에야 법이 통과되었다. 이 법은 모든 상황에서 낙태를 허용했다. 이는 1920년대부터 시행되어 온 보수적 규정에서의 탈피였다. 인민 폴란드 당국은 이것이 여성 평등을 향한 매우 중요한 한 걸음이라고 믿었다.

고무우카(Gomułka)의 견해를 보면, 왜 그가 그렇게 자유로운 규정에 동의했는지 의문이 들 수 있다. 답은 매우 간단했고, 그 이유는 그의 실용주의였다. 바로 그런 결정이 당시 폴란드를 강타한 경제적 어려움에서 비롯된 것이다. 폴란드 통일노동자당(PZPR) 중앙위원회 제1서기는 … 일자리를 걱정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중에 이 자유로운 법은 더욱 자유로워졌다! 흥미롭게도 이것이 낙태 붐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오히려 시행된 수술 건수는 줄어들었다. 특히 불법 시설에서 그랬다.

1950년대와 1960년대에 성장한 여성들이 회상하듯, 피임 수단이 없어 낙태는 꽤 흔한 일이었다. 콘돔을 살 수는 있었다. 하지만 젊은 남자에게는 매우 창피한 외출이었고, 여자가 콘돔을 사는 것은 거의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대체로 젊은이들에게 이런 지식을 알려주는 것은 부모의 책임이 아니었다. 섹스는 늘 금기 주제였다.

성교육

1950년대에 정보 팸플릿이 등장했는데, 이는 1990년대 초까지 초등학교에서 '모든 소년이 알아야 할 것', '모든 소녀가 알아야 할 것'이라는 제목으로 배포되었다. 많은 사람들에게 이것이 주된 지식의 원천이었다.

이 책들은 체격 차이, 사춘기, 월경, 수정, 임신, 성병, 그리고 정상에서 벗어난 일탈로 제시된 자위행위를 다루었다. 다행히 1980년대 판부터는 이런 표현이 사라졌다.

폴란드 인민공화국의 성생활: 금기 뒤에 숨겨진 성혁명의 역사

그 세대와 그 이후 많은 세대에게 컬트 교과서가 된 미할리나 비스워츠카의 『사랑의 기술』

그렇기에 가장 큰 지식은 집에서 얻어졌다. 가정에서 소녀들은 '소년들은 하나만 원하며, 결코 그것을 주어서는 안 된다', '정조가 여성의 최고 덕목'이라는 사실을 주입당했다. 섹스는 즐거움이 아니라 남성의 욕망을 충족시켜야 하는 여성의 의무였다. 그것도 결혼 후에만 가능했다. 그 전에 섹스는 악이자 죄였다. 대부분의 소년들은 아예 아무런 교육도 받지 못했다. 음경이 다른 용도로도 사용될 수 있다는 것은 우연히 알게 되었다.

'숲속에서는 온갖 일이 벌어진다'

대체로 젊은이들은 부모의 명령과 금지에 그저 순종하지 않았다. 10대들은 때때로 도시나 다른 마을에서 놀기 위해 자전거를 타거나 걸어서 수 킬로미터를 이동하기도 했다. 그곳에서 '이론이 실천으로 옮겨졌다'. 비록 섹스에 대해 직접적으로 말하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그들은 신체적 측면이 아니라 감정에 대해 서로 이야기를 나눴다.

사람들은 스스로 지침과 지식을 찾았다. 그 세대와 그 이후 많은 세대에게 컬트 교과서가 된 것은 미할리나 비스워츠카(Michalina Wisłocka)의 『사랑의 기술』이었다. 처음에는 몰래 읽다가, 작은 폴란드 성혁명 이후에는 공공연하게 읽히기 시작했다.

성혁명

다가올 변화의 첫 징후는 1972년 후브네르(Huebner)의 영화 『섹솔라트키(Seksolatki)』였다. 이 영화는 함께 살며 공공연하게 동거하는 두 10대의 이야기를 담고 있으며, 주변 사람들을 충격에 빠뜨렸다. 섹스와 피임에 대해 그토록 공개적으로 이야기한 최초의 영화였을 것이다. 이후 특히 기에레크(Gierek) 집권기, 서방에 개방되던 시절에 상황은 술술 풀려나갔다.

섹스는 점점 더 자연스러운 것으로 묘사되었다. TV 화면에서 나체가 등장했고, 학교에서는 인간의 성에 대해 더 폭넓게 논의되었다. 비록 은밀한 삶은 여전히 이데올로기적 포장지에 갇혀 있었지만, 이번에는 당과 국가의 선을 위해 봉사해야 했다. 그러나 완전한 해방은 아직 멀었다…

참고 문헌

  1. Barański P., Czajkowska A., Fiedotow A., Wochna-Tymińska A., 『인민 폴란드의 성 문제. 온전히 인간답지 못한 출산, 낙태, 질병, 타자성』, WUW·IPN, 2013.
  2. Tomasik K., 『게예렐. 인민 폴란드의 성소수자들』, 크리티카 폴리티치나, 2012.
  3. Werblan A., 『브와디스와프 고무우카. 폴란드 노동자당 총서기』, Book and Knowledge, 198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