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이야기

노인과… 스탈린. 문호 헤밍웨이가 NKVD 요원이었다는 충격적인 사실

'중국행을 앞두고, 그는 이념적 신념에 따라 우리 일에 동참했다.' 미국 문학의 거장이자 노벨 문학상 수상작가 어니스트 헤밍웨이에 관해 소련 비밀첩보기관 NKVD 파일에 남겨진 기록입니다. 세계적인 작가는 왜 소련의 정보 요원이 되기를 승낙했으며, 외국 첩보기관과의 협력은 어떻게 전개되었을까요?

비밀 문서가 세상에 나오기까지

헤밍웨이가 NKVD와 접촉했고 심지어 협력에 동의하기까지 했다는 사실이 밝혀진 것은 러시아인 알렉산드르 바실리예프 덕분이었습니다. 그는 러시아 언론인이자 전직 KGB 요원으로, 1990년대 초 러시아 연방 대외정보국(SVR)의 의뢰를 받아 NKVD와 KGB의 기록 보관소를 조사했습니다. 이를 바탕으로 서구 역사학자들을 위한 연구 자료를 준비하는 임무였고, 러시아 정부는 이 과정에서 추가 자금도 확보할 계획이었습니다.

그러나 프로젝트는 곧 중단되었고, 주변 분위기가 급변하면서 위기를 느낀 바실리예프는 해외로 도피합니다. 다만 조사 중 작성해둔 필기를 몰래 반출하는 데에는 성공했습니다. 그 필기에는 미국의 저명한 소설가에 관한 내용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헤밍웨이 평전 『동료 헤밍웨이: 작가, 선원, 군인, 스파이』(Comrade Hemingway)의 저자 니컬러스 레이놀즈는 "이 문서들이 비밀로 유지될 예정이었다는 점이 오히려 신빙성을 높여준다"라고 말합니다.

"그는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할 것이다"

헤밍웨이를 소련 측으로 끌어들인 인물은 뉴욕에서 활동하던 NKVD 요원 야코프 골로스였습니다. 두 사람은 1940년에서 1941년 사이 여러 차례 만났으며, 아마도 공통 지인을 통해 소개받았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당시 미국의 대문호는 세 번째 결혼 생활을 시작한 참이었습니다. 새 아내 마사 겔혼의 권유로 중국 방문 허가를 타내던 그는, 덩달아 재무부 장관 헨리 모건소 주니어의 비공식 요청을 받아 중국 상황에 대한 정보를 ... 미국 재무부에 제공하는 일도 맡게 됩니다.

노인과… 스탈린. 문호 헤밍웨이가 NKVD 요원이었다는 충격적인 사실

헤밍웨이는 1941년 중국행을 앞두고 포섭되었습니다.

바실리예프가 수집한 자료에 따르면 골로스 역시 꽤 운이 좋았습니다. 이 뉴욕의 요원은 헤밍웨이(훗날 암호명 '아르고')를 영입하는 데 그치지 않고, 해외에 있는 NKVD 담당자들과 연락하는 방식까지 함께 정했습니다. 신분 확인 수단은 작가가 넘겨준 우표였습니다. 골로스는 모스크바로 보낸 보고서에 이렇게 적었습니다.

며칠 전 어니스트 헤밍웨이가 소련을 경유해 중국으로 간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소련 입국 비자를 신청할 수 있을 것이다. 그가 뉴욕에 머문 시간은 단 하루라 만나지 못했다. 대신 우리 사람이 중국에서 그를 만나 그가 넘겨준 우표를 보여주기로 합의했다. 사전에 정해둔 암호를 사용해 중국 또는 소련에서 그와 접촉해야 한다. 그는 우리와 협력할 것이며,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할 것이라 확신한다.

"공화파 스페인을 위해 도움을 호소하다"

소련 첩보기관은 어떻게 재능 있고 성공적인 작가에게 눈독을 들였을까요? 니컬러스 레이놀즈는 『동료 헤밍웨이』에서 그가 이미 1935년부터 주목받았다고 지적합니다. 당시 헤밍웨이는 미국 공산당의 비공식 논단이었던 잡지 '뉴 매시스(New Masses)'에 미국 지배층에 대한 통렬한 비판 글을 실었는데, 플로리다 키웨스트의 자택 근처를 강타한 폭풍의 참사 이후 편집부가 그의 논평을 요청한 것이 계기였습니다. 헤밍웨이의 글은 본질적으로 루스벨트 행정부가 참전 용사들을 살해했다는 고발이었고, 이 폭풍의 최대 희생자가 바로 참전 용사들이었습니다.

이후 몇 년간 작가는 소련의 잠재적 동맹으로도 이름을 알리게 됩니다. 헤밍웨이를 감시하던 크렘린 측 인물들은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1937년 스페인 체류 당시 '아르고'는 자신의 기사들에서 인민전선을 옹호하고 공화파 스페인을 위한 지원을 호소했다."

그 시점부터 이미 은밀한 포섭 시도가 있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그는 최소한 두 명의 공산주의자와 가까운 친구였습니다. 네덜란드 출신 영화감독 요리스 이번스, 그리고 스페인 국제여단의 독일인 정치위원 구스타프 레글러가 그 주인공입니다. 당시 그가 소련의 이념에 가장 가까웠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다만 작가는 전형적인 '신봉자'는 아니었습니다. 스페인 주재 NKVD 첩보망의 수장이었던 알렉산드르 오를로프는 1938년 그를 "개인주의자이자 스포츠맨"이라 평가하며, 공산주의보다 공화정에 더 충실한 인물로 보았습니다.

노인과… 스탈린. 문호 헤밍웨이가 NKVD 요원이었다는 충격적인 사실

모스크바가 헤밍웨이에게 주목한 데에는 스페인에서 공화파를 지지한 그의 행보가 한몫했습니다.

이후 3년간 상황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스페인 내전 참전 용사였던 헤밍웨이가 NKVD와 손잡은 이유는, 그것이 파시즘에 맞서는 현명한 방법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레이놀즈는 『동료 헤밍웨이』에서 이렇게 해석합니다.

헤밍웨이는 이념적으로 영입된 인물이었다. 하지만 다른 '진심 어린 신봉자들'과 달리 마르크스주의나 레닌주의 자체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는 반파시스트 진영에 합류함으로써 더 효과적으로 싸울 수 있다고 믿었고, 적어도 그렇게 NKVD를 이해하고 있었다.

노인과… 스탈린. 문호 헤밍웨이가 NKVD 요원이었다는 충격적인 사실

헤밍웨이는 위험한 모험을 즐겼다. 그래서 NKVD와의 협력에 동의했던 걸까?

레이놀즈는 작가가 이 비밀 협력을 일종의 '동업 관계'로 여겼다고 덧붙입니다. 그는 자신이 미국을 배반한다고 생각하지 않았고, 모스크바에서 내려오는 명령을 무비판적으로 따를 생각도 없었습니다. 혹은 스파이 역할 자체가 마음에 들었는지도 모릅니다. 실제로 이후 제2차 세계대전 중에도 그는 특별한 '특사' 역할을 자처했지만, 이번에는 미군을 위해서였습니다.

"트로츠키주의자를 지지한다더라"

'아르고'의 협력이 오래가지 못했다는 점은 레이놀즈의 추측, 즉 이것이 미국인 작가에게 일시적인 동맹에 불과했다는 판단을 뒷받침합니다. 중국이나 소련에서 열리기로 예정된 만남은 이유 불명의 사정으로 끝내 무산되었고, 작가가 골로스에게 건넨 우표도 한 번도 사용되지 않았습니다.

이후 몇 년간 접촉 재건 시도가 이어졌으나 번번이 실패했습니다. 1945년에는 NKVD의 특별 '요원'이 이 목적으로 쿠바의 헤밍웨이를 찾아가기까지 했지만, 뚜렷한 성과를 거두지 못했습니다.

작가의 소련 파일에 남은 마지막 기록은 1950년의 것입니다. 이 무렵이면 요원들은 '아르고'에게 유용한 정보를 기대하는 것을 포기한 상태였을 겁니다. 그들은 이렇게 적었습니다. "그가 트로츠키주의자들을 지지한다고 하며, 기사와 팜플렛에서 소련을 공격했다고 한다." 소련의 뉴스피크(신조어 정치언어)에서 이보다 더 심한 모욕은 없었습니다.

노인과… 스탈린. 문호 헤밍웨이가 NKVD 요원이었다는 충격적인 사실

헤밍웨이와 NKVD의 협력은 특별히 결실을 맺지 못했다. 그러나 냉전이 심화되면서 작가는 FBI의 추적을 걱정하게 된다.

이토록 시원찮은 협력 성과라면 FBI가 끝내 작가의 '요원' 신분을 밝혀내지 못한 것도 놀랍지 않습니다. FBI는 그의 파일을 수년간 간헐적으로 취합했을 뿐이었고, 1947년 하원이 설립해 국내 공산주의자들을 추적한 반미활동조사위원회(HUAC) 역시 그를 색출하지 못했습니다. 그럼에도 헤밍웨이는 생애 마지막까지 안심하지 못했습니다. 미국 정보기관이 자신을 쫓고 있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있었고, 이것이 정신 질환을 악화시켜 1961년 스스로 목숨을 끊는 비극으로 이어졌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니컬러스 레이놀즈는 『동료 헤밍웨이』에서 이렇게 결론짓습니다. "헤밍웨이는 자신이 생각하는 만큼 정치와 음모에 능숙하지 않았고, 자신과 타인을 통제하는 능력을 오랫동안 과대평가했다." 소련 첩보기관과의 '모험'이 노벨상 수상작가를 압도했던 것은 아마 사실일 겁니다. 다만 거의 아무런 후폭풍 없이 그 모험에서 빠져나오는 데 성공했다는 점에서, 그의 승리였다고도 할 수 있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