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이야기

가장 부유한 유대인들의 잔치와 오락의 장소? 독일인이 그려낸 바르샤바 게토의 삶

독일의 위선이 정점에 달한 순간

1942년 5월, 점령된 바르샤바에 게토 촬영을 위해 파견된 촬영팀의 책임자가 바로 빌리 비스트(Willy Wist)였다. 이것은 독일의 위선이 극에 달한 사건이었다.

게토 벽 안에 처음 들어선 사람이라면 단 한 문장만 떠올릴 수 있었을 것이다. 바로 '지상의 지옥'이라는 말이다. 거리에는 시신이 널려 있었고, 굶주려 죽어가는 아이들, 형언하기 어려운 고통이 도처에 가득했다. 그러나 가해자들은 희생자들을 조롱하듯, 문자 그대로 그들을 절멸시키던 바로 그곳에서 번영하고 행복한 삶을 담은 영상을 촬영하기로 결심했다.

무덤터가 되어버린 게토

독일은 1940년 10월 바르샤바 게토를 설립했다. 나치가 점령한 유럽 전역에서 가장 큰 규모의 게토였으며, 총 40만 명이 넘는 유대인이 이곳에 갇혔다. 처음에는 다가올 비극을 예고하는 징조는 없어 보였다. 독일인들이 단순히 도시의 구획을 정리하려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고립된 게토에서의 생활이 실질적인 악몽이라는 사실은 금방 드러났다.

배고픔, 사람으로 가득 찬 과밀한 주거 환경, 부실한 위생 상태, 발진티푸스의 유행, 도처에 널린 오물. 이러한 조건 속에서 외부 세계와 완전히 차단된 채 월평균 사망자는 약 5,000명에 달했다. 벽 뒤에 갇힌 이들을 돕기로 한 유일한 집단은 폴란드인들이었다. 그들은 게토 안으로 약품과 식량을 몰래 전달했다. 서구는 독일의 잔혹함을 보지 못했거나, 보고 싶지 않아 했다. 그럼에도 끊임없이 죽음과 마주한 상황 속에서도 사람들은 최소한의 일상 모습이라도 지키려 애썼다. 다비드 세라노 블랑케르(David Serrano Blanquer)는 저서 『캐리어를 든 소녀』에서 이렇게 기록한다.

"(...) 감옥 같은 환경, 비좁은 공간, 전염병, 도처에 있는 죽음에도 불구하고 게토 주민들은 살아남으려 노력했습니다. 문화 행사가 열렸고, 예술가와 창작자들은 자신들이 겪은 비극을 망설임 없이 드러냈습니다. 도서관이 문을 열었고, 온에그 샤바트(Oneg Shabbat)【지하 사회 조직 – 편집자 주】가 설립되었으며, 연극이 공연되고 오케스트라가 연주했으며 비밀 청소년 조직이 만들어졌습니다. 삶은 계속되어야 했기에 사람들은 그것을 이어갈 방법을 찾았습니다."

가장 부유한 유대인들의 잔치와 오락의 장소? 독일인이 그려낸 바르샤바 게토의 삶

1940년부터 1942년 사이 바르샤바 게토에서는 배고픔, 추위, 질병으로 약 9만 2천 명이 목숨을 잃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게토는 대규모 무덤터처럼 변해갔다. 바로 이런 상황 속에서 카메라를 든 제복 입은 나치들이 이곳에 나타났다.

영화로 만든 선전

전쟁이 끝난 후, 숲속에 숨겨진 독일군 벙커 하나에서 수천 건의 문서와 함께 수많은 필름 자료가 발견되었다. 그중 하나가 특별히 주목받았다. 네 개의 릴이 담긴 것으로, 포장지에는 "게토(Ghetto)"라는 문구 하나만 적혀 있었다.

독일인이 촬영한 이 필름에는 시장에서 신나게 물건을 사는 게토 주민들의 모습이 담겨 있다. 거리에는 음식점이 늘어서 있고 멋쩍게 차려입은 여성들이 눈에 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골목 곳곳에서 드러나는 가난과 죽음과는 극명한 대비를 이룬다.

가장 인상적인 장면 중 하나는 게토의 광대 루빈슈타인(Rubinstein)의 춤이다. 그 주위로 인파가 모여들었지만, 동시에 바로 곁에서 한 남자가 죽어가고 있었다. 또 다른 장면에서는 가난하고 굶주린 유대인 아이들이 잘 차려입은 웨이트리스에게 손을 내밀지만, 그들은 음식을 나눌 생각이 전혀 없었다. 이 장면은 당시의 목격자이자 바르샤바의 교사였으며, 훗날 독일 점령하 폴란드 유대인의 운명을 기록한 기관의 일원이 된 아브라함 레빈(Abraham Lewin)이 증언으로 남겼다. 그의 말에 따르면 모든 촬영은 연출된 것이었다. 그는 그중 한 장면을 이렇게 회고했다.

"[독일인들은] 멋쩍게 차려입은 전형적인 유대인들을 데려왔습니다. 그들을 탁자에 앉힌 뒤, 공동체 명의로 가장 값비싼 요리와 술, 고기, 생선, 리큐르, 흰 빵 등 진수성찬을 차려내라고 명령했습니다. 유대인들이 먹는 동안 독일인들은 촬영했습니다. 그 목적이 무엇인지는 짐작하기 어렵지 않습니다. 이 추악한 장면들은 몇 시간이나 계속되었습니다."

이 필름이 전하려는 메시지는 단순했다. 유대인들은 사치 속에 살면서도 굶주려 죽어가는 공동체 구성원들과 아무것도 나누지 않는다는 것. 가장 부유한 자들은 동포들이 고통받는 와중에도 연회에 참여해 배를 채운다는 것. 게토 내 삶의 극단적 대비를 보여주는 이런 장면들이 독일 선전 영화에서 가장 많이 등장했다. 다비드 세라노 블랑케르는 저서에서 이런 모순을 이렇게 묘사한다.

"(...) 태평한 게토 주민들은 배수구에 나뒹군 앙상한 시신을 무심코 지나칩니다. (...) 세련된 유대인들은 화려한 파티를 벌이는 반면, 가난한 자들은 구걸을 하거나 거리에서 죽어갑니다. 이 조작은 서구가 무엇을 믿어야 할지 혼란스럽게 만들었습니다. 수년이 지난 후에야 (...) 우리는 스스로에게도 경악하며 깨달았습니다. 그 즐거운 장면들이 모두 연출된 것임을, 배우를 동원해 감독하고 세트장까지 준비해 촬영한 것임을. 이 모든 것은 강력한 나치 선전 기계에 부역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다만 게토에 부유한 유대인이 전혀 없었다고 말하는 것 역시 왜곡일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전체 유대인 인구 중 극소수에 불과했다. 대부분은 하임 룸코프스키(Chaim Rumkowski, 우치 게토 유대인 총책임자) 같은 협력자, 유덴라트(Judenrat, 1939년 독일이 설립한 게토 내 유대인 평의회) 의원, 혹은 독일에 협조한 유대인 경찰 소속 인물들이었다. 평범한 유대인은 매일 죽음과 배고픔, 굴욕 속에서 살아가야 했다.

가장 부유한 유대인들의 잔치와 오락의 장소? 독일인이 그려낸 바르샤바 게토의 삶

멋쩍게 차려입고 집에서 놀며 음식점에서 식사하는 부유한 유대인들은 거리의 거지들에게 무심하다. 독일인은 바로 이런 식으로 게토의 삶을 그려냈다. 동정받을 자격이 없는 민족의 절멸을 정당화하기 위해서였다.

바르샤바 게토 촬영의 주 카메라맨은 빌리 비스트였다. 그는 전후 거리의 배설물까지 촬영하라는 지시를 받았다고 증언했다. 필름에는 가게 앞에 선 유대인 아이에게 인사하는 독일군 병사의 장면도 담겨 있다. 반면 할례 의식과 굴욕적인 의례 목욕 장면도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공개용으로 편집된 영상에는 주로 마당에서의 즐거운 순간이나 선반 위에 도자기를 꽂아둔 깔끔하게 꾸며진 아파트 모습이 담겼다. 남는 의문은 이것이다. 이 냉혹한 필름 뒤에 숨겨진 진짜 목적은 무엇이었을까?

'미완성 영화'

이 필름은 훗날 독일 영화관에서 상영될 선전 영화 제작에 사용될 예정이었다. 제3제국 선전부 장관 요제프 괴벨스(Joseph Goebbels) 본인이 그 실행을 책임졌다. 메시지는 분명했다. 영상을 본 관객은 게토의 생활 환경이 훌륭하니 유대인들이 불평할 자격이 없다는 확신을 품고 극장을 나서야 했다.

동시에 유대인 공동체 자체가 가장 가난한 구성원들을 착취하는 불의의 법칙에 지배되어 있으며, 부유층은 그들에게 어떤 공감이나 연민도 느끼지 않는다는 믿음을 심어주려는 의도였다. 그렇다면 무감각하고 무자비한 유대인을 '처리'해야 하지 않겠는가? 비슷한 목적을 추구한 영화가 『하임케어(Heimkehr, 귀향)』다. 나치는 이 영화에서 폴란드인을 독일인의 피를 갈구하는 짐승처럼 그렸다. 이는 물론 제3제국 시민들의 눈에 히틀러의 폴란드 침공을 정당화하기 위한 것이었다.

가장 부유한 유대인들의 잔치와 오락의 장소? 독일인이 그려낸 바르샤바 게토의 삶

독일 영화의 일부 장면은 여러 번 반복 촬영되기도 했다. '배우'들에게 제공되는 음식값은 독일인들이 직접 부담했다. 오직 유대인을 가장 추악한 민족 중 하나로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사진은 1941년 게토 주민들의 모습이다(굶주림에 시달리는 이가 보인다).

결국 바르샤바 게토의 선전 영화는 완성되지 못했다. 편집 작업이 중단된 이유는 알려져 있지 않다. 아마도 제3제국 최고위층의 결정이었을 것이다. 1942년 나치는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Reinhard Heydrich)의 주재로 반제 회의를 열어, 유럽 전역의 유대인을 대량으로 동쪽으로 강제 이송해 학살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1943년 독일은 그 범죄적 의도를 실행에 옮기기 시작했고, 그 첫 단계 중 하나가 바르샤바 게토의 청산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빌리 비스트의 영화는 더 이상 필요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의 필름은 여전히 많은 이들에게 미스터리로 남아 있다. 가족을 게토에서 잃은 감독 얄 헤르손스키(Yael Hersonski)가 이 자료를 연구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비스트의 필름을 바탕으로 다큐멘터리 『미완성 영화(A Film Unfinished)』를 제작했다. 작업 과정에서 그녀는 독일인이 촬영한 영상을 바르샤바 게토 생활의 시련을 견뎌낸 생존 유대인 여성 한 명에게 보여주었다. 아름답게 꾸며진 아파트와 꽃이 꽂힌 꽃병을 본 그녀는 단 한마디를 남겼다. "그곳에서는 꽃병에 꽂힌 꽃 따위 볼 수 없었어요. 우리는 그걸 먹었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