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직 최고의 자들만이 이 정예 부대에 들어설 수 있었다. 조건은? 뛰어난 체력과 용맹함, 그리고 동성애적 성향까지. 사랑하는 사람과 나란히 싸운 테베 전사들은 무시무시한 존재였다. 그들은 유명한 스파르타군마저 격파했다...
아테네와 스파르타는 서로 다른 국가이자 상이한 삶의 방식을 지닌 도시였다. 두 도시 모두에서 전사들 사이에는 다양한 관계가 존재했으며, 그곳만 한 것도 아니었다. 크세노폰은 아름다운 청년들로 구성된 분대를 이끌고 싸우며 어린 소년을 위해 죽음을 각오하던 올린토스 출신의 용사 에피스테네스 이야기를 남겼다. 하지만 전장에서 남자와 남자의 관계를 옹호한 세력 중 가장 유명한 이들은 기원전 4세기에 스파르타를 정복한 테베인들이었다.
생사를 함께하는 부대
지휘관 중 한 명인 고르기데스는 자신의 목숨과 사랑하는 사람의 목숨을 위해 싸우는 자보다 더 헌신적으로 싸울 사람은 없다고 확신했다. 그는 철학자들의 의견을 경청했고, 동료 지휘관 팜메네스 역시 호메로스의 네스토르가 전술을 몰랐던 게 분명하다고 주장했다. 네스토르는 그리스 군대를 부족과 혈연별로 나누어 편성했는데, 에라스테스(연상 애인)와 에로메노스(연하 애인)가 나란히 싸우도록 배치해야 했다는 것이다.
바로 이런 배경에서 고르기데스는 신성한 부대, 즉 전사 연인들로 구성된 호플리테스 부대 창설을 구상했다. 명문 출신의 테베인 150쌍, 총 300명이 생사를 함께 맹약하고 입대했다. 인원이 300명이었던 것은 스파르타의 레오니다스 업적에 대한 감상 때문이 아니라, 단순히 그리스 도시 국가들의 선발 부대가 대개 그 정도 규모였기 때문이다.

신성한 부대 전사 254명의 유해가 안치된 사자상.
조직적·전술적으로 신성한 부대를 더욱 강화한 인물은 펠토피다스와 에파미논다스라는 두 테베 지도자였다. 특히 에파미논다스가 도입한 소위 '사선 진형' 덕분에 테베는 기원전 371년 류크트라 전투에서 스파르타군을 상대로 유명한 승리를 거두었다. 이후 스파르타는 사실상 예전의 위신과 권력을 되찾지 못했고, 스파르타인들은 더 이상 무적의 존재로 여겨지지 않았다.
윗선에서 시작된 본보기
에파미논다스와 펠토피다스가 신성한 부대 내 연인 관계를 높이 평가한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통설에 따르면 두 사람 자신도 한때 연인 관계였다고 한다. 둘이 아직 평범한 호플리테스였던 시절, 만티네이아 전투에서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의 목숨을 구해냈다.
일곱 번이나 부상당한 펠토피다스가 쓰러졌지만, 그보다 어린 친구 역시 부상을 입은 상태에서 그를 구해내는 데 성공했다. 이런 일은 전장에서 드문 일이 아니었다(소크라테스가 델리온 전투에서 크세노폰을 구했다는 일화도 있다). 이는 용맹함과 담력의 증거일 뿐 반드시 감정적 유대를 의미하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흥미로운 점은 에파미논다스가 끝내 결혼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바쁜 일정 탓인지, 생활 방식 탓인지, 아니면 다른 성향 때문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신성한 부대의 커플들은 전형적인 그리스식 원칙, 즉 에로메노스와 에라스테스의 관계를 따랐지만, 이 관계를 맺은 남성들의 나이 차이는 아테네 커플들과 달랐다. 18세가 지나면 연하는 애인에게 갑옷을 받았다. 스무 살 전후의 젊은이들이 부대에 입대했고, 가장 나이 많은 이들도 30세쯤 복무를 마쳤다.
에파미논다스의 에로메노스 두 명을 우리는 알고 있다. 스파르타와의 전투에서 이름을 떨친 아소피코스, 그리고 기원전 362년 지휘관과 함께 전사한 카피소도로스다.
동성애의 수도
신성한 부대의 공적이 과장되었는지, 아니면 실제로 묘사된 형태로 존재했는지조차 의심하는 역사학자들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테베는(서펠로폰네소스반도의 엘리스와 함께) 남색 문화에 가장 우호적인 폴리스로 여겨졌다. 그곳에서 에라스테스와 에로메노스는 마치 부부처럼 서로를 대해왔다.
대표적인 예가 코린트의 귀족 필롤라오스와 기원전 728년 올림픽 경주에서 우승한 아테네 출신 디오클레스다. 두 사람은 수년간 함께 살았는데, 오늘날의 표현을 빌리자면 '게이 프렌들리'였던 테베를 선택한 것으로 보인다. 그들이 죽자 서로 곁에 묻혔다. 디오클레스의 무덤에서는 테베인들이 소년들을 위한 키스 대회를 열었는데, 시인 테오크리토스(기원전 4~3세기)의 표현대로 "가장 부드럽게 입술을 대는 자"를 가리는 대회였다.
또한 현지의 또 다른 무덤, 즉 헤라클레스의 친구이자 신화 속 영웅인 이올라오스의 무덤 앞에서는 신성한 부대 전사들을 포함한 연인들이 맹세를 했다. 해체된 지 수백 년 후, 키케로는 성적 금기를 갖지 않았던 테베인과 엘리스인을 더욱 절제된 스파르타인과 비교하기도 했다.
그렇다면 신성한 부대를 멸망으로 이끈 것은 무엇이었을까? 기원전 338년 카이로네이아 전투다. 마케도니아군이 마케도니아의 패권에 맞선 그리스 도시 연합군을 완파하면서 신성한 부대는 궤멸했다. 이후 패배한 전사 연인들을 기리는 사자상 아래에서 254명의 유해가 발견되었다.
출처
이 글은 CiekawostkiHistoryczne.pl 출판사에서 출간한 아담 벵글로프스키(Adam Węgłowski)의 저서 수치심 없는 시대: 고대의 성과 에로티시즘에 수록된 내용을 바탕으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