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단의 마흐디, 아흐메드 압달라
모하메드 아흐메드 압달라(Mohamed Ahmed Abdallah)는 수단에서 태어났습니다. 당시 수단은 이집트의 한 지방으로, 명목상으로는 카이로에 자리한 튀르크계 파샤가 멀리서 통치하고 있었지만, 실질적으로 이 거대한 지역을 다스리는 이는 영국인 관리였습니다.
1843년에 태어난 아흐메드는 이슬람교에서 가장 신비주의적인 흐름인 수피즘의 엄격한 규율 속에서 자랐습니다. 그는 튀르크 지배층이 신성한 교법을 경시하는 태도를 도저히 참지 못했고, 예언자 무함마드의 추종자들의 운명을 기독교인이 좌우한다는 사실은 더욱 용납할 수 없었습니다. 1871년, 그는 세속 권력과 인간 군중으로부터 물러나기로 결심하고 수단 서부, 나일강 상류의 아바 섬(Aba Island)으로 은둔했습니다. 그곳에서 그는 모스크와 함께 학문과 기도를 위한 중심지를 세웠습니다.
백성들과 함께한 여행, 그리고 계시
이후 아흐메드는 가난한 백성들과 함께 자신이 받은 가르침을 전하기 위해 여행을 시작했습니다. 그는 청나일강을 따라 내려간 뒤 수단을 동에서 서까지 횡단하며, 마을 곳곳에 번진 탄식과 절망에 귀를 기울이고 '곧 구세주가 강림할 것'이라는 믿음을 퍼뜨렸습니다. 구세주가 오면 아프리카에서 가장 넓은 이 지방을 방치해 온 튀르크의 통치도 끝날 것이라는 희망이었습니다.
기록에 따르면 아흐메드는 사람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긴 인물이었습니다. 명망 높은 성인이라는 평판뿐 아니라 그의 존재감 역시 남달랐습니다. 큰 키에 마른 체형, 검은 피부에 단정하게 기른 수염, 타고난 우아함을 지녔으며, 말은 절제되면서도 언제나 굳건했고 누구에게도 고함을 지르는 법이 없었습니다. 선택받은 자의 분노와 열정은 그의 눈빛에서 드러났다고 전해집니다.
어느 날, 닳아버린 샌들을 신고 섬으로 돌아온 아흐메드는 홀로 폐문하고 긴 금식과 기도, 명상으로 몸과 마음을 단련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확신했습니다. 어째서 이제야 알았을까? 자신이야말로 메시아, 곧 대망의 '마흐디'라고 말입니다. 그의 신성한 사명은 분명했습니다. 수단을 뒤흔들고, 파샤의 대리인들을 권좌에서 내쫓으며, 수도 하르툼을 떠돌고 있는 기독교인 백인 이교도들을 몰아내는 것. 그는 알라가 기름을 부은 자, 즉 자신에게 온 수단 백성을 향해 호소했고, 하나님께서 지하드(성전)를 명령했다고 선포했습니다.
비참한 자들의 군대, 영국군을 격파하다
1883년, 데르비시(Dervish, 가난한 수단인들이 스스로를 부른 이름) 군대가 도시 엘오베이드를 점령했습니다. 이에 영국은 중국과 러시아 등지의 식민지 전쟁에서 이름을 떨친 전설의 장군 찰스 고든(Charles Gordon)을 하르툼에 파견합니다. 그러나 허사였습니다. 1884년, 앵글로-이집트 연합 수비대는 포위망에 갇히고 말았습니다. 320일간의 공성전 끝에 하르툼은 함락되었고, 고든은 명장다운 최후를 마쳤습니다. 그의 머리는 창 끝에 꽂혔습니다. 온 수단은 창과 방패를 휘두르며 자유를 만세했습니다. 예언은 실현되었고, 예언자의 백성은 불신의 악마 '다잘'을 처단했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아흐메드 본인은 발진티푸스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의 추종자들은 13년 뒤인 1898년, 움두르만 전투에서 궤멸적인 패배를 당합니다. 영국군은 데르비시의 막대기와 돌멩이를 상대로 최신식 유탄포와 기관총을 쏟아부었고, 이른바 '제1세계 대 제4세계'의 대결에서 수단인 25,000명이 목숨을 잃은 반면 영국군의 사망자는 불과 48명에 그쳤습니다.
흥미로운 사실
- 아흐메드 압달라는 1885년 6월 사망했지만, 그가 세운 마흐디 국가는 후계자 칼리파 압둘라히 이븐 무함마드의 통치 아래 1898년까지 존속했습니다.
- 움두르만 전투에는 당시 젊은 기병 장교였던 윈스턴 처칠도 참전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 전투 후 영국군은 움두르만에 있던 마흐디의 영묘를 파괴했으며, 현재의 영묘는 1947년에 재건된 것입니다.
출처: 슈퍼 인테레산테(Super Interessante) 매거진 172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