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틴 학살의 가장 비참한 단면
1940년 봄, 소련군 포로수용소에 갇혀 있던 폴란드 장교들은 처형장으로 향하는 첫 수송열차에 몸을 실으려고 애썼습니다. 굶주림과 질병, 끊임없는 심문과 강제 노동에 시달리던 그들에게 '떠난다'는 소식은 유일한 희망이었고, 결국 그 희망은 죽음으로 이어졌습니다.
스탈린이 1940년 3월 5일 내린 결정에 따라, 소련은 불과 두 달 남짓한 기간인 4월과 5월 사이에 폴란드 장교, 교사, 공무원, 군·경 관계자, 성직자 등 2만 명이 넘는 사람들을 살해했습니다. 희생자 대부분은 그 전에 코젤스크, 스타로벨스크, 오스타시코프 인근의 포로수용소를 거쳐갔습니다.
수용소의 환경은 극도로 열악했습니다. 굶주리고 병들고 반복적으로 심문당하고 강제 노동에 동원된 포로들은 소련 선전에 의해 지속적으로 세뇌당했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생존할 수 있는 어떤 기회라도 놓치지 않으려 했습니다. 그런데 왜 수송이 시작되자 그들은 그토록 열심히 죽음을 향해 나아갔을까요?
먼저 온 자가 먼저 간다?
카틴 학살 당시 소련 수용소에 갇혔던 포로들의 삶을 증언하는 기록은 오늘날까지 거의 남아 있지 않지만, 알려진 몇몇 기록은 충격적입니다. 수송이 시작되자 포로들은 오히려 죽음의 품으로 밀려 들어갔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파트리크 플레스코트(Patryk Pleskot)는 저서 『카틴의 사제들(Księża z Katyn)』에서 이렇게 전합니다. "장교들은 떠나기를 간절히 원했고, 첫 번째 수송대에 자신이 배정되기를 바랐다. 아픈 사람과 다친 사람조차 마차 한자리를 잡기 위해서라면 건강한 척했다." 과연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요?
연구자들은 이러한 현상이 인간 심리가 최악의 상황을 무의식적으로 외면하려는 경향 때문이기도 했다고 강조합니다. 여기에 더해, 가해자들이 희생자들을 '달래기' 위해 활용한 허위 정보와 선전도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소련은 교묘하게 조절된 소문(첩보망까지 동원하여)을 통해 포로들이 자신들의 미래에 대해 갖는 생각에 영향을 미쳤다. 수송이 시작된 후 퍼진, 장교들이 독일인에게 넘겨지거나 중립국으로 보내질 것이라는 소문(후자가야말로 가장 좋은 해결책이었겠지만) 모두 저절로 생겨난 것은 아니었다. 소련은 어디에서도 '살해'라는 말이 사용되지 않도록 하려 들었다.

장교들의 집단 매장지 — 1943년 발굴 조사
폴란드 장교들은 끝까지 운명이 반전되어 자유를 되찾거나, 적어도 당시 그들이 상대적으로 '문명화된' 적으로 여기던 나치에게 넘겨지기를 바랐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일부는 자신이 어떻게 끝날지 어렴풋이나마 짐작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아무도 별다른 저항을 하지 않았을까요?
수용소에서 최대한 멀리
파트리크 플레스코트는 어두운 결론을 내립니다. "모든 변화는 악몽 같은 수용소 생활보다는 나아 보였다. 돌이켜보면 우리는 그렇지 않았음을 잘 알고 있다." 그렇다면 수감자들의 일상은 어떠했을까요? 스타로벨스크 수용소에서 포로들은 이가 기생하는 막사, 다층 침대로 빼곡히 채워진 공간에 수용되었습니다.
목조 건물 8호동은 천장 높이가 겨우 2.5미터였는데도, 소련은 폭 35~40센티미터, 길이 1.5미터에 불과해 '침대'라고 부르기도 어려운 작은 선반을 3단으로 쌓아 올렸습니다. 그럼에도 자리가 부족해 일부 포로는 진흙바닥에 직접 눕게 되었습니다.
생존자들의 기억 속에서 가장 지옥 같았던 것은 혼잡함도, 곳곳에 만연한 해충도 아니라 압도적인 굶주림이었습니다. 『카틴의 사제들』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식사 규정은 이랬다. 신선하지 못한 통밀빵 약 200그램, 약간의 마멀레이드, 그리고 '커피'가 한 끼 분량으로 주어졌는데, 이는 보통 여러 명이 나눠 먹어야 하는 양이었다. 점심은 형편없는 감자나 죽, 한 조각의 생선으로 대신했고, 저녁은 곡물 커피로 대체되었다.
일주일에 한 번, 포로들은 소량의 차와 설탕, 담뱃괴 하나를 받기로 되어 있었다. 다만 이러한 상급 지침이 실제로 어떻게 집행되었는지는 확실치 않다.
또 다른 문제는 물 부족이었습니다. 수용소 우물에는 생명수보다 진흙이 더 많았습니다. 소련 당국은 두 번째 우물을 파도록 명령했지만, 너무 얕게 판 탓에 물은 다시 부족해졌습니다.

카틴의 매듭 — 등 뒤로 묶인 희생자의 손
빈대와 이에 시달리며 지친 포로들은 감염성 질환에 취약했습니다. 수감자들 사이에서 이질이 퍼졌고, 발진티푸스 환자도 발생했습니다. NKVD가 자신들마저 감염될 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예방 접종 캠페인을 실시하기로 동의하지 않았더라면, 전염병 대유행은 불가피했을 것입니다. 그러니 포로들이 수용소를 떠날 수 있다는 희망이 생기는 순간 잠재적 목적지를 생각하기는커녕 오직 현 상황의 변화에만 집중했던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비를 피해 도랑으로
수송 방식 자체도 그들에게 불리하게 작용했습니다. 1940년 4월 5일 스타로벨스크 수용소의 '언로딩(razgruzka)', 즉 수용소 비우기가 결정되었을 때, 포로들은 자신들이 하르키우, 키이우, 스몰렌스크의 세 개 환승 거점으로 이송될 것이며, 거기서부터 제2차 폴란드 공화국의 옛 국경 지역, 즉 독일이 점령한 영토로 서쪽으로 더 이동할 것이라는 안내만 받았습니다.
한 번에 수십 명에서 260여 명의 수감자가 수송대에 배정되었습니다(흔히 이 숫자는 65의 배수였는데, 한 대의 호송 열차 칸에 그만큼의 인원이 들어갈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특별한 선발 기준을 찾아내기란 어려웠습니다. 모스크바의 결정권자들은 마치 열쇠 없이 이름을 무작위로 고르는 듯했지만, 개별 명단에서 각 계급의 장교와 민간인의 비율을 대체로 유지하려 했고, 그 결과 각 동(棟)에서 거의 비슷한 수의 사람들이 꾸준히 빠져나갔습니다.
'선발된' 사람들은 작은 위병소를 통과하며 한 명씩 수용소에서 끌려 나왔습니다. 위병들은 그들이 다른 포로들과 어떤 식으로든 연락하지 못하도록 감시했습니다. 초소에서는 보이지 않는 곳, 문 밖에는 호송 부대가 대기하고 있었습니다. 화물칸에 오르는 희생자들은 자신이 도살장으로 향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깨닫지 못했습니다.
살해 자체는 소련이 완벽하게 조직적으로 준비했습니다. 이미 도착을 기다리는 참호가 파여 있었습니다. 집행자들은 희생자들에게 반응할 시간조차 주지 않았습니다. 대부분의 희생자는 뒤통수에 한 발의 총탄을 맞고 숨을 거두었습니다. 일부 시체에서만 몸부림이나 제압의 흔적이 발견되었습니다. 파트리크 플레스코트는 이렇게 요약합니다.
1940년 10월, 카틴 학살을 준비하고 조직한 공로로 남녀 NKVD 장교 100여 명이 포상을 받았다.
그중 몇 명이 폴란드 장교들을 직접 쏘았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다만 그들이 받은 금전적 보상이 빵 2킬로그램 값에 해당한다는 사실은 정확히 확인할 수 있습니다. 스탈린 체제에게 살해된 폴란드인들의 목숨은 그만한 가치였던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