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2년 10월, 이탈리아에서 쿠데타가 일어났고 그 결과 베니토 무솔리니가 권력을 장악하여 새로운 파시스트 국가의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의 '위대한 승전국' 중 하나였던 이탈리아는 어떻게 불과 4년 만에 서방 연합국과 등을 돌리고, 아돌프 히틀러에게 영감을 준 인물을 탄생시켰을까요?
참전을 둘러싼 갈등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했다고 해서 이탈리아인들이 즉각 무기를 들지는 않았습니다. 국내 여론은 첨예하게 갈라져 있었습니다. 내셔널리즘 우파와 공화파는 참전을 주장했고, 사회주의자들과 자유주의자들은 중립 유지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이러한 분위기도 변해갔습니다. 베니토 무솔리니를 포함한 일부 사회주의자들은 프랑스와 영국 편에 서서 전쟁에 개입하는 것을 지지하게 되었습니다.
1914년 무솔리니는 이미 사회주의 기관지 '아반티(Avanti!)'의 편집장으로서 처음에는 이탈리아의 참전에 반대하는 글을 썼습니다. 그러나 같은 해 말 그는 노선을 급선회했고, 그 결과 직장은 물론 사회당 내 자신의 자리마저 잃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이 좌절이 그의 행보를 멈추게 하지는 못했습니다. 자신의 견해를 알리기 위해 그는 일간지 '일 폐폴로 디탈리아(Il Popolo d'Italia)'를 창간하고 이탈리아 국민에게 협상국의 행동을 지지할 것을 호소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른 뒤 밝혀진 사실은 이것이 결코 순수한 신념의 행동이 아니었다는 점입니다. 프랑스와 영국은 프랑스 사회주의자들의 지원을 받아 장차 '두체'가 될 인물의 활동을 비밀리에 자금 지원하고 있었습니다.
깨진 약속
이탈리아가 초기에 중립을 선택한 데에는 이중적인 의도가 숨겨져 있었습니다. 교전 양 진영 모두와 비밀 협상을 진행할 수 있는 문을 열어두고, 더 좋은 조건과 행동 계획을 제시하는 쪽을 선택하기 위한 발판이었던 것입니다.
빈과 런던을 상대로 한 긴 비밀 협상 끝에 협상국이 승리했습니다. 비밀 조약은 영국 수도에서 1915년 4월 26일에 체결되었습니다. 이에 따라 이탈리아는 전쟁이 끝난 후 트렌토, 남티롤, 이스트리아, 달마티아를 받고, 알바니아에 대한 보호령 지위와 도데카네스 제도 및 소아시아 일부에 대한 권리를 얻기로 했습니다. 미국이 참전하기만 하지 않았다면 모든 것이 이탈리아의 계획대로 진행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상처 입은 승리, '비토리아 무틸라타'
런던 조약은 이탈리아에 큰 동기부여가 되었지만, 안타깝게도 미국의 참전으로 그 가치는 상쇄되고 말았습니다. 당시 미국 대통령 우드로 윌슨은 전쟁이 끝난 후 펼쳐질 '새로운 세계관'을 구상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1918년 1월 8일 "승리 없는 평화"를 담은 14개조 항목을 제시했습니다. 이 지침들은 다음 대전의 발발로부터 세계를 지키기 위한 것이었으며, 어떠한 비밀 협정도 인정하지 않는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습니다.

베니토 무솔리니는 오랫동안 아돌프 히틀러가 본보기로 삼은 지도자였습니다
그리하여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 이탈리아는 승전국 진영에 속했지만, 실제로는 패배자나 다름없는 처지에 놓였습니다. 런던 조약이 약속했던 것보다 훨씬 적은 영토만을 확보한 것입니다. 이탈리아인들은 이를 '비토리아 무틸라타(Vittoria Mutilata)', 즉 '절단된 승리'라고 불렀습니다.
베르사유 조약의 처리 결과는 이탈리아인들 사이에서 큰 불만을 샀습니다. 대전은 60만 명이 넘는 이탈리아인의 목숨을 앗아갔고, 국가 경제에 심각한 부담을 안겼습니다. 나라는 빚과 인플레이션에 허덕였고, 노동자들의 임금은 초라한 수준에 머물렀으며, 군대 동원 해제와 함께 실업률이 치솟았습니다. 이탈리아의 분위기는 승전국답지 못했고, 해마다 악화되는 위기는 상황을 더욱 어렵게 만들었습니다.
큰 변화의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파시즘의 탄생
사회적 불만은 전국 곳곳에서 반복적으로 터지는 파업으로 표출되기 시작했습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1919년 3월 23일, 베니토 무솔리니는 회합을 열어 참전 용사 단체들이 '이탈리아 전투 파시(Fasci Italiani di Combattimento)'를 창설하도록 이끌었습니다. 200명이 채 되지 않는 이 작은 조직은 불과 3년 만에 이탈리아에 새로운 기준을 제시하는 정당으로 성장할 토대를 마련했습니다.
특정 계급의 이익보다 국가의 이익을 우선시하겠다는 파시스트들의 강령과 볼셰비키 및 이탈리아 사회주의자들에 대한 공공연한 적대감은 처음에는 널리 호응을 얻지 못했습니다. 1919년 말 치러진 전후 첫 총선에서 그들은 사회당에 크게 패배하며 참담한 결과를 맞이했습니다.

무솔리니는 이른바 '로마 진군'의 결과로 권력을 잡았습니다
그러나 시간은 그들의 편이 되기 시작했습니다. 이탈리아 사회주의자들이 당에 가입하지 않으려는 사람들에게 무자비해진 것이 그들의 몰락을 부르고, 역설적으로 베니토 무솔리니의 승리의 씨앗이 되었습니다.
선거 이후 나라는 사회주의적 광기에 휩싸였습니다. 노동자들은 공장과 대지주의 농장을 잇달아 점거했고, 무당파 인사들은 정부의 도움을 기대할 수 없었습니다. 파시즘은 사회주의자들의 폭주에 대한 대안으로 자신을 내세우기 시작했습니다.
파업 중인 노동자들이 산업 시설을 점거했을 때, 공장주들은 국가 기관에 도움을 요청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정부가 자신들을 돕지 않을 것임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파시스트 민병대로 눈을 돌렸습니다. 당원증이 없는 노동자와 농민은 사회주의자들이 독점한 공장이나 토지에서 일할 수 없었고, 파시스트들은 자신들이 지원하는 공장에서 일하거나 지주로부터 방치된 땅을 임대받아 경작하는 대안을 내걸었습니다. 이러한 행보는 사회의 주목을 점점 더 끌었고, 끊임없는 파업과 거리 충돌로 이어지는 사회주의 진영의 무능하고 격앙된 통치는 무솔리니 조직의 입지를 더욱 강화시켰습니다.
기업가, 지주, 반사회주의 시민들의 지원과 검은 셔츠단 민병대의 무력을 배경으로 무솔리니는 자신의 기회를 포착했습니다. 1922년 10월, 그는 로마로 진격하여 쿠데타를 통해 이탈리아의 운명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