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인 노예들은 여성을 살해하고 아이들을 학살하며 농장을 불태웠다. 백인들은 흑인들의 머리를 창에 꽂아 길가에 세워두고, 가죽을 벗기고 사지를 토막냈다. 어느 쪽이 더 잔혹한 만행을 저질렀는지 단정하기는 어렵다. 다만 분명한 것은, 영화 '장고: 분노의 추격자'조차 실제 역사 앞에서는 오히려 온화해 보일 수 있다는 사실이다.
1619년, 제임스타운에 온 최초의 노예들
1619년은 버지니아의 작은 마을 제임스타운의 역사에 두 가지 이유로 기록되었다. 폴란드 장인들의 파업이 일어난 것, 그리고 '검은 대륙'에서 온 최초의 흑인 노예 20명이 도착한 것이다.
폴란드인들의 반골 기질은 누구도 놀라워하지 않았지만, 사슬에 묶인 값싼 노동력에게는 맹목적인 복종만이 기대되었다. 그래서인지 지금까지도 "흑인 노예들은 반란을 일으키지 않았다"는 통념이 남아 있다. 그러나 이것만큼 틀린 생각도 없다.
백인의 피로 물든 스토노 반란
1739년 9월 9일, 미국 남부 사우스캐롤라이나. 콩고 출신 노예 수십 명이 제미(Jemmy, '카토'라고도 불림)라는 남자의 인솔 아래 스토노 강가에 모여 플로리다를 향해 행진을 시작했다.

남부의 목가적인 풍경? 그것은 백인들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였다.
그들이 자유를 되찾으리라 믿은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당시 그레이트브리튼과 식민지 사이에 벌어진 전쟁(소위 '젠킨스의 귀 전쟁') 중이었던 스페인은, 흑인 노예들에게 자유를 되돌려주겠다고 약속했던 것이다.
반군의 대열은 피를 먹고 자랐다. 노예를 소유한 백인 가족이 하나씩 쓰러지고 농장이 하나씩 불탈 때마다 반군의 규모는 커져갔다. 그러나 봉기는 오래가지 못했다. 반군은 포위당했고, 일부는 도주에 성공했지만 나머지는 몰살당했다. 백인들은 흑인들의 머리를 말뚝에 꽂아 길가에 늘어놓아 경고로 삼았다. 이 반란의 희생자는 백인 20명, 노예 44명이었다.
미국이 탄생해도, 노예에게 자유는 없었다
스토노 반란은 농장주들 사이에 불안의 씨앗을 뿌렸다. 대륙의 정세는 급변하고 있었다. 미국이 탄생하고, 민주주의를 외치는 세력이 집권했다. 그러나 흑인에게 자유는 찾아오지 않았다.

무자비함. 그것이 백인 농장주들의 기본적인 특징이었다.
산토도밍고(아이티)에서 노예 반란이 성공하고, 1800년 버지니아에서 가브리엘 프로서의 봉기가 간발의 차로 좌절되면서 농장주들의 공포는 더욱 깊어졌다.

농장주들은 노예를 억누르기 위해 손에 닿는 모든 수단을 동원했다.
북부 주들이 마침내 노예제를 폐지하는 동안, 남부 흑인의 처지는 오히려 악화되었다. 그들은 모든 권리를 빼앗겼고, 백인들은搾取 위에 경제 전체를 세웠다. 조지아, 미시시피, 사우스캐롤라이나의 노예들은 뉴욕이나 필라델피아의 흑인이 비로소 숨을 돌릴 수 있게 된 대가를 치른 셈이었다.
더 이상 새로운 노예를 수입할 수 없게 되자, 농장주들은 흑인 여성들에게 아기를 낳게 강요했다. 마치 강제 노동력을 생산하는 기계처럼 그들을 취급한 것이다.

노예들은 아이를 낳도록 강요당했다. 노동력 확보를 위해서.
흑인들의 바스티유
다음 봉기는 오래 기다리지 않아도 찾아왔다. 1822년, 덴마크 베지(Denmark Vesey)를 중심으로 한 비밀 결사가 형성되었다. 그는 노예로 태어났지만 복권에 당첨되어 스스로 자유를 사들인 자유 흑인이었다.

도망친 노예를 붙잡기 위해 내걸린 현상금 광고.
이 음모에는 무려 6,000명의 노예가 가담했다. 공모자들은 바스티유 감옥 함락 기념일인 7월 14일에 딱 맞춰 찰스턴을 해방시킬 계획이었다.
그러나 계획은 두 명의 가담자가 밀고하면서 수포로 돌아갔다. 131명이 체포되었고, 베지를 포함한 35명이 교수형에 처해졌다.
'하나님께서 백인을 죽이라 하셨다'
백인 사회는 이미 완전한 공황 상태에 빠져 있었다. 9년 후, 내트 터너(Nat Turner)는 이 두려움을 현실로 만들었다.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농장주들을 죽이라는 사명을 받았다고 확신했던 노예였다.
"내가 하늘에서 큰 소리를 들으니 성령이 내 앞에 나타나, 뱀이 풀려났으며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죄를 위해 세상에 오실 때 지셨던 멍에를 내려놓으셨다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이제 내가 그 멍에를 지고 뱀과 싸워야 한다고 하셨다. 처음 것이 나중이 되고 나중 것이 처음이 될 그날이 곧 다가오기 때문이다."

당대 삽화로 그려진 내트 터너의 반란.
봉기는 1831년 8월 21일, 버지니아 사우샘프턴 카운티에서 일어났다. 반군은 농장에서 농장으로 옮겨 다니며 노예들을 해방시켰고, 연령과 성별을 불문한 모든 백인을 간단한 도구로 살해했다.
터너의 반란, 그리고 유혈의 보복
55~65명이 목숨을 잃으면서, 터너의 봉기는 미국 남부 역사상 가장 크고 성공적인 노예 반란으로 기록되었다.
물론 반란은 진압되었고, 터너 자신도 교수형에 처해졌다. 그의 시신은 가죽이 벗겨지고, 목이 잘리고, 사지가 찢기는 처형을 받았다. 이후 몇 달간 이어진 유혈 보복 속에서 약 200명의 무고한 노예가 살해되었다.
헛되지 않았던 희생
이 어떤 봉기도 결국 성공하지 못했지만, 터너와 베지 같은 영웅들의 죽음은 헛되지 않았다. 미국 노예제 역사 전체로 보면 약 250건의 봉기가 일어났다. 이제 "흑인 노예들은 수동적이었다"는 통념은 동화책 속으로 보내야 할 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