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생에 대한 지식이 부족했던 것만 빼더라도, 중세 시대 아픈 사람에게 닥칠 수 있는 최악의 상황은 바로 의사를 만나는 일이었다. 온갖 의료인 가운데 사람들이 가장 두려워한 존재는 단연, 마치 공포 영화에서 튀어나온 듯한 외과의사였다.

마취가 발명되기 전, 수술은 문자 그대로 공포 그 자체였다. 사진은 이해를 돕기 위한 자료 이미지다.
오늘날 앙리 드 몽드빌(Henri de Mondeville)은 중세 최고의 의사로 꼽힌다. 당시 대부분의 동료들이 환자와 접촉하는 것 자체를 피하고 신의 뜻만 기다렸던 것과 달리, 그는 직접 손을 썼다. 그리고 바로 그 점이 환자들에게 가장 두려운 부분이었다. 물론,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행방불명의 인물
몽드빌은 프랑스 노르망디 어딘가에서 태어났으며, 당시 관습에 따라 고향 마을 이름을 따서 성씨를 스스로 붙였다. 그러나 역사학자들은 그가 태어난 정확한 장소는 물론, 이름과 성씨의 올바른 발음과 철자조차 아직 확정하지 못했다. 어떤 학자는 그가 카앙 근처의 망드빌(Mandeville) 마을 출신이라고 주장하고, 또 다른 이들은 에몽드빌(Emondeville) 출신이라고 말한다. 그의 후계자인 기 드 숄리아크(Guy de Chauliac)는 그를 언급하며 "에르몬다빌"이라는 변형된 이름을 사용했고, 여러 문헌에는 "몬다빌라", "아몬다빌라", "아르망다빌라", "아모다 빌라", "문디 빌라" 등 다양한 표기가 등장한다.

앙리 드 몽드빌은 당대 기준으로 매우 혁신적인 치료법을 사용했다.
"앙리 드 몽드빌"이라는 표기가 공식적으로 채택된 것은, 1314년 문헌과 1373년 루브르 도서관 목록에서 이 철자가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몽드빌의 정규 교육 역시 수수께끼에 싸여 있다. 그는 몽펠리에와 파리에서 신학 및 의학 과정을 공부한 뒤 이탈리아로 건너가, 당시 볼로냐 대학교에서 주류 사상이던 테오도리크(Theodoric)의 제자가 된 것으로 추정된다.
외과의사의 고된 삶
이렇게 길러진 그는 1301년 이미 왕실 외과의사가 되어 있었다. 기록에 따르면 그는 왕가의 234일간의 행로에 동행했고, 그 대가로 상당한 보수를 받았다. 당시 외과는 오늘날처럼 의학의 주류가 아니었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오히려 외과 수술은 환자에게 추가적인 해를 끼치는 행위, 신의 뜻에 거스르는 시도로 간주되곤 했다. 그럼에도 몽드빌이 나라의 가장 중요한 인물들에게 고용될 수 있었던 것은, 그만큼 그가 카리스마 넘치고 뛰어난 기량의 소유자였음을 보여준다. 그는 먼저 미남왕 필리프 4세를 모셨고, 이후에는 루이 10세를 섬겼다.

이 유명한 외과의사의 환자 중에는 미남왕 필리프 4세도 있었다.
이토록 저명한 인물들을 치료했음에도, 외과의사의 삶이 늘 순탄했던 것은 아니다. 그는 군대와 함께 이동했고, 원정 과정에서 테오도리크가 주창한 창상 치유법을 실전에서 다듬을 기회를 얻었다. 교황 보니파시오 8세, 베네딕토 11세, 클레멘스 6세까지 그의 손길을 거쳤다. 그럼에도 그는 헛되이 흘러가는 시간과 턱없이 적은 보수를 크게 불평했다. 그가 직접 남긴 말은 이렇다. "생계를 위해 하루 종일 학교와 여러 곳을 뛰어야 해서, 하루에 한 줄의 글조차 쓰지 못할 때가 있다."
그가 언급한 저술이야말로 그의 평생의 작업, 즉 의학서 『키루르지(Chirurgie)』였다. 이 책은 프랑스어로 쓰인 최초의 외과학 논저로, 덕분에 몽드빌은 프랑스 외과학의 아버지로 불린다.
죄에 대한 벌
몽드빌은 혁신적인 의사였지만, 역설적으로 중세의 미신과 '멘토 모리(memento mori)', 즉 죽음을 깨닫는 사유가 그의 업무에 도움이 되었다. 환자들은 모든 고통이 죄에 대한 벌이라 믿었고, 병은 그 치료만큼이나 끔찍한 것으로 여겼다. 그래서 괜찮았다. 몽드빌의 치료법에는 공포와 고통이 그대로 녹아 있었으니까.
이는 외과의사 본인이 남긴 다음 문장에서 가장 잘 드러난다.
"환자를 아껴주는 것은 외과의사에게 위험하다. 설령 상처를 부드럽게 처리할 수 있다 해도 마찬가지다. 배우지 못한 평범한 백성들은 그런 외과의사를 믿지 않으며, 부드럽게 다루는 이들을 겁 많고 나약하고 경험 없는 자라고 비웃는다…"
몽드빌은 이렇게 적었다. 그 본인은 아마 다르게 행동하고 싶었겠지만, 그는 이런 조건, 다른 무엇도 아닌 이 조건 속에서 일해야만 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수술 준비란 대개, 근처에서 구할 수 있는 가장 힘센 자원자들로 환자를 꽉 붙잡아 움직이지 못하게 하는 것에서 시작되었다. 많은 조력자들이 시술 도중 피와 상처를 보고 기절해 버렸고, 작업은 진행될수록 오히려 늘어났다. 외과의사는 기절하면서 머리를 다친 자들의 상처까지 추가로 치료해야 했다.
만능의 포도주
이상할 것도 없다. 몽드빌이 활동하던 시절에는 어떤 형태의 마취도 존재하지 않았으니까. 그는 절단 수술을 집도하고, 출혈을 멈추게 하고, 내장까지 번진 상처를 처리하고 붕대를 감았다. 현대 의사들이 평하기에 그의 가장 위대한 업적은, 화농(고름)이 치유의 핵심 과정이라는 통념을 거부한 데 있다. 스승 테오도리크조차 여전히 상처를 벌려 고름을 일부러 유도하는 치료를 옹호하던 시절, 몽드빌은 완전히 다른 방법을 고안해냈다.
그는 불필요하게 상처를 만지지 않았고, 물론 추가 출혈을 일으키지도 않았다. 대신 이물질을 제거한 뒤 출혈을 멈추는 데 집중했다. 그다음 포도주로 손상된 조직을 씻어냈고(내장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다), 포도주에 적신 천으로 만든 붕대를 감았다. 그는 상처를 촉촉하게 유지하려 애썼는데, 공기와의 접촉이 환자에게 가장 위험하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안타깝게도 후계자 기 드 숄리아크는 선배의 혁신적인 방법을 계승하지 않았다.
그는 장의 상처를 봉합한 뒤, 역시 포도주로 씻어내고 건조시킨 다음, 말린 석류 뿌리와 꽃, 그리고 썩은 참나무 재목으로 만든 '흉터 회복 가루'를 뿌릴 것을 권했다. 이것이 우연히나마 감염 예방책이 되었을 수 있는데, 일부 균류가 나무를 분해하며 천연 항생물질을 내뿜기 때문이다.
"나는 이런 종류의 상처를 새로운 방식으로 즉시 닫고 봉합하여, 단 한 번의 붕대 교체로 짧은 시간 안에 고통 없이 아문 것을 보았다. 반면 구식 방법으로 치료받은 비슷한 환자들은 배속이 고름으로 가득 차 죽어갔다. 이 사실은 더 이상의 해설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몽드빌은 이렇게 강조했다.
흥미롭게도 1320년 몽드빌이 세상을 떠난 뒤, 그의 방법—환자를 공포에 떨게 하면서도 기존 방식보다 훨씬 효과적이었던 그 방법—은 후계자 기 드 숄리아크에 의해 버려지고 만다. 이렇게 해서 항소독 외과의 시작은 잊혀졌다. 근대 소독제가 발명되기 거의 600년 전의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