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이야기

로마노프 왕가의 비극, 역사상 가장 논란이 많은 살인은 막을 수 있었을까?

로마노프 가족의 운명을 결정한 선택

1918년 7월 니콜라이 2세와 그의 가족이 참혹하게 학살당한 비극은 충분히 막을 수 있었다는 것이 오늘날 역사학자들의 공통된 견해다. 안타깝게도 사촌 형제였던 영국 국왕 조지 5세는 로마노프 가족을 자신의 나라로 초대하지 않았고, 이들은 볼셰비키의 손아귀에 그대로 놓이고 말았다.

퇴위 후 시작된 감금 생활

1917년 3월 15일(구력 3월 2일), 니콜라이 2세는 제위에서 물러났고, 일주일 뒤 아내 알렉산드라 황비, 다섯 명의 자녀, 그리고 가장 가까운 측근들과 함께 차르스코예 셀로의 거처인 알렉산드르 궁전에 유폐되었다. 황실 가족의 미래와 안전은 유럽에 있는 니콜라이 2세의 친척들에게 중대한 문제였다. 그중 가장 강력한 인물은 러시아 황제와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던 조지 5세였다.

러시아와 영국, 두 사촌 군주

니콜라이 2세의 어머니 마리아 표도르브나 황후와 영국의 알렉산드라 여왕은 덴마크 출신의 친자매였다. 이러한 근친 관계 덕분에 두 군주는 물방울처럼 닮았다고 할 정도였다. 실제로 1893년 조지가 테크의 마리아 공녀와 결혼식을 올렸을 때, 일부 하객들은 신랑이 아닌 그 자리에 있던 니콜라이에게 축하 인사를 건네기도 했다. 또한 마리아 표도르브나와 알렉산드라 여왕은 꾸준히 따뜻한 교류를 이어갔고, 덕분에 두 사람의 자녀들도 서로 편지를 주고받으며 자주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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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아 표도르브나 황후

니콜라이와 조지는 성격도 무척 비슷했다. 조용한 가정생활을 좋아하고 화려한 파티를 기피했으며, 가족과 함께하는 시간을 무엇보다 소중히 여겼다. 두 사람 모두 수줍음이 많았고, 강한 의지의 어머니 밑에서 자랐다는 점도 공통점이었다.

니콜라이 2세는 1894년에 즉위했고, 사촌 조지는 1910년에 왕위에 올랐다. 두 군주는 '사촌 빌리'라고 불리던 독일 황제 빌헬름 2세의 군국주의적 야망을 억누르고 유럽의 평화를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하기로 했다. 조지 5세는 한때 니콜라이에게 자신이 '가장 친근하고 따뜻한 벗'이라며 애정을 드러낸 바 있으며, 제1차 세계대전 기간 동안 영국과 러시아는 동맹국이 되었다.

영국 왕실의 약속

1917년 3월 21일(구력 3월 8일), 즉 니콜라이 2세 퇴위 6일 후, 주 페트로그래드 영국 대사 조지 부캐넌 경은 러시아 외무장관 파벨 밀류코프를 만나 차르와 그 가족의 안위를 걱정하는 마음을 숨기지 않았다. 밀류코프는 폐위된 군주의 생명에는 어떠한 위협도 가해지지 않을 것이라고 확약했다. 나아가 장관은 퇴위 서명 당시 차르가 잉글랜드행을 희망했으며, 새 러시아 정부도 그 뜻에 반대하지 않았다는 점을 덧붙였다.

황제는 전쟁이 끝나는 동안에만 해외에 머물고, 종전 후에는 러시아로 돌아와 평범한 시민으로 살 계획이었다. 임시정부는 니콜라이의 뜻을 받아들였다. 각료들에 따르면 군주가 러시아에 계속 머무는 것은 새 정부가 피하고자 했던 사회적 혼란을 초래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밀류코프는 부캐넌에게 영국이 니콜라이 2세와 그의 아내, 자녀들에 대한 공식 초청장을 발급해 줄 것을 요청했다. 대사는 즉시 이 요청을 런던에 전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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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국왕 조지 5세

조지 5세는 즉시 러시아 전문가들에게 현지 정세에 대한 분석을 의뢰했다. 전문가들은 온건파인 임시정부가 머지않아 니콜라이 2세를 극도로 증오하는 급진적 볼셰비키 세력에 의해 붕괴될 것이라고 만장일치로 예측했다.

4월 1일(구력 3월 19일), 부캐넌과의 회동에서 밀류코프는 니콜라이 2세의 안전을 보장할 유일한 방법은 잉글랜드행이라고 다시 한번 강조했다. 임시정부의 계획에 따르면 황제와 가족은 무르만스크까지 이동한 뒤, 그곳에서 대기 중인 영국 선박을 타야 했다. 4월 4일(구력 3월 22일), 국왕폐하의 정부는 니콜라이에게 공식 초청장을 보냈고, 조지 5세는 사촌에게 다음과 같은 서한을 남겼다.

'그렇다, 내 사랑하는 니키여. 우리 우정이 세상이 끝나는 날까지 이어지기를 바란다. 이 문제에 관해 나에게는 아무것도 변한 것이 없다. 나는 언제나 너를 사랑해 왔다 (...) 너는 언제든지 나를 벗으로 믿고 의지할 수 있음을 기억하라. 영원히 너를 헌신적으로 지지하는 너의 조지.'

등 뒤에 꽂힌 칼

로마노프 가족의 잉글랜드행은 이미 확정된 듯 보였다. 그러나 뜻밖에도 조지 5세 본인이 각료들의 결정에 반대하면서, 니콜라이 2세 가족의 영국 체류 협상 중단을 명령했다.

이러한 불친절의 배경에는 국왕 자신의 평판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다. 당시 영국에서는 헤센 공녀 출신인 알렉산드라 황비가 친독 성향이라는 소문이 퍼지고 있었다. 러시아 황후가 독일과 단독 강화를 추진한다거나, 빌헬름 2세의 첩자들에게 둘러싸여 있다는 이야기가 돌았지만, 이는 전혀 사실이 아니었다.

로마노프 왕가의 비극, 역사상 가장 논란이 많은 살인은 막을 수 있었을까?

니콜라이 황태자와 헤센 공녀 알릭스의 약혼 발표 직후 촬영된 공식 사진

조지 5세의 입장 변화에는 개인적 사정도 작용했다. 그의 핏줄에도 독일의 피가 흐르고 있었다. 할아버지 알버트(빅토리아 여왕의 남편)는 독일 제후였고, 할머니 빅토리아 역시 절반이 독일 혈통이었다. 적국에 대한 동조 의혹을 피하기 위해 영국 국왕은 독일과 연관된 모든 것에서 거리를 두고자 했다.

한편 영국 정부는 조지 5세에게 이미 발행한 초청을 철회하는 것이 얼마나 결례인지 설득하려 애썼다. 외무장관 아서 밸포어는 '군주가 내린 약속을 번복하는 것은 왕다운 행보가 아니다'라며 국왕을 설득했다. 국왕은 정부의 입장을 수용할 것처럼 보였으나, 사흘 뒤 부캐넌 대사에게 러시아 정부에 황실 가족의 다른 거처를 고려해 달라고 제안해 줄 것을 요청했다. 로마노프 가족의 영국 체류가 '부정적인 여론'을 불러일 것이라는 판단 때문이었다.
다행히 차르스코예 셀로에 머물던 니콜라이 2세는 영국과의 협상 세부 내용을 알지 못했다. 사랑하는 '조지'의 배신 소식은 그에게 감당하기 어려운 충격이 되었을 것이다.

다른 선택지는 없었을까?

1917년 8월 1일(구력 7월 19일), 차르 가족은 우랄 지역의 토볼스크로 이송되었다. 당시 니콜라이에게 충성하던 많은 장교들이 로마노프 가족을 구출해 해외로 데려가거나 러시아 내에 숨길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로마노프 왕가의 비극, 역사상 가장 논란이 많은 살인은 막을 수 있었을까?

차르 가족과 20세기 러시아를 다룬 여러 저서를 남긴 영국 역사가 헬렌 라파포트에 따르면, 기술적인 측면에서 로마노프 가족의 구출은 어렵지 않았다. 그들을 지키던 경호 인력은 소수였고 무장도 빈약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물류적인 측면에서 작전은 매우 복잡했다. 어떻게 7인 가족을 러시아에서 몰래 밀반출하면서 아무런 의심도 사지 않을 수 있겠는가? 니콜라이와 알렉산드라가 출국을 거부한다면 과연 어디에 숨겨야 하는가?

유감스럽게도 빌헬름 2세 황제 역시 차르를 도울 뜻을 보이지 않았다.

볼셰비키 쿠데타 이후 로마노프 가족의 건강과 생명에 대한 실질적 위협이 커지자, 니콜라이 2세와 깊은 혈연 관계에 있던 덴마크 왕실은 빌헬름 2세에게 외교 채널을 열어 차르와 그 가족의 러시아 탈출을 도와달라고 요청했다. 카이저는 러시아인들에게 군주제 복원을 노린다고 비난받을 것을 우려해 거절했다. 어차피 제1차 세계대전 발발의 책임자로 빌헬름 2세를 지목해 온 니콜라이와 알렉산드라가 독일 카이저의 도움을 받아들였을 가능성은 애초에 매우 낮았다.

헬렌 라파포트의 기록에 따르면, 러시아 황제는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의 충직한 벗들이 자신과 가족을 구해줄 것이라 믿었다. 그러나 그 희망은 헛된 것으로 판명되었고, 1918년 7월 17일 가족 전원이 예카테린부르크의 상인 이파티예프의 저택에서 총탄에 쓰러지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