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이야기

“주변 바다가 새빨갛게 물들었다”… USS 인디애나폴리스호 생존자들의 지옥 같은 5일

약 1,200명에 달하는 USS 인디애나폴리스호 승조원 가운데 생환자는 단 316명이었다. 그리고 그들이 맞은 죽음은 익사만이 아니었다. 탈진과 갈증으로 숨진 이들도 있었고, 굶주린 상어 떼에게 산산조각 난 자들도 있었다.

아무도 재앙을 예감하지 못했다. 1945년 7월 30일, USS 인디애나폴리스호는 극비 임무를 마치고 귀항하는 중이었다. 함에는 히로시마에 투하될 예정이던 원자폭탄 ‘리틀 보이’의 핵심 부품이 실려 있었고, 그것은 제2차 세계대전의 향방을 결정지을 물건이었다. 그러나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대통령이 각별히 아꼈던(1936년 대통령의 첫 공식 해외 방문에 쓰이기도 했다) 이 배가 역사에 이름을 남기게 된 이유는 전혀 다른 곳에 있었다.

바다는 잔잔했고, 순양함은 정해진 지그재그 항법을 따르고 있었다(해가 지면 지그재그를 멈췄다는 설도 있다). 보일러 가운데 네 개만 증기를 올린 채였다. 적의 공격 가능성은 그다지 심각하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런데 7월 30일 0시 14분, 두 발의 어뢰가 함의 우현을 강타했다.

그러나 이것은 이후 태평양 해상에서 펼쳐질 참극의 서막에 불과했다.

피격, 침몰!

운명의 냉소적인 아이러니 — 루스벨트 대통령이 가장 아끼던 배의 최후는 순전한 우연의 산물이었다는 사실. 일련의 불운한 우연들로 USS 인디애나폴리스호는 육지에서 먼 해상, 호위함도 소나도 없는 채 홀로 항해하고 있었고, 그 항로는 ‘표류’하던 일본 잠수함 I-58의 항로와 교차했다. 잠수함을 지휘한 이는 하시모토 미치쓰라(橋本以行) 소령이었다.

“주변 바다가 새빨갛게 물들었다”… USS 인디애나폴리스호 생존자들의 지옥 같은 5일

USS 인디애나폴리스호는 극비 임무를 마치고 돌아오던 길이었다. 함에는 리틀 보이 원자폭탄의 핵심 부품이 실려 있었다.

7월 29일에서 30일로 넘어가는 밤, 일본 잠수함은 어둠 속을 미끄러지듯 나아가던 미국 순양함 바로 옆에서 수면으로 부상했다. 자신이 아이다호급 전함을 포착했다고 확신한 하시모토는 공격을 명령했다. 일본군은 통상 어뢰 여섯 발을 발사했다. 몇 분 뒤 폭발이 하늘을 밝혔다.

하시모토 소령의 어뢰가 정확히 어느 부위에 명중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다만 알려진 것은 어뢰 하나하나가 400킬로그램이 넘는 폭발물을 함 내부로 밀어 넣었다는 사실이다. 불행 중 다행이라면 선수(船首) 부분에 꽂힌 어뢰가 항공유 저장탱크를 피해 지나갔다는 점이다. 만약 치명적인 탄두가 그곳에 도달했다면 순양함은 그 자리에서 산산조각이 났을 것이고, 수백 명의 승조원을 살린 단 12분이라는 시간조차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생존자들이 정말 행운을 말할 수 있었을까? 바다로 뛰어든 이들은 자신들의 운명이 함상에서의 빠른 죽음보다 훨씬 참혹하리라는 사실을 아직 알지 못했다…

드넓은 바다 위의 지옥

승조원의 25%, 약 300명이 공격으로 직접 목숨을 잃었다. 그렇다면 나머지는 어떻게 되었을까? 선원들에게 대피할 시간은 많지 않았다. 함은 첫 피격 후 불과 12분 만에 해저로 가라앉았다. 물에 빠진 이들은 무리 지어 함께 표류했다. 처음에는 구조가 곧 올 것이라 믿었다. 장교들은 침몰 직전 SOS 신호를 보냈다며 그들을 안심시켰다(신호가 실제로 발신되었는지는 오늘날까지도 불확실하지만, 함내 폭발로 통신 장비가 모두 파괴되었기에 어디에도 신호가 닿지 못한 것만은 분명하다).

승조원 상당수는 이미 부상당한 상태였다. 폭발 화염에 데었거나, 수면에 떠오른 기름에 중독된 이들이었다. 후자가 특히 치명적이었다.

생존자 네 무리 중 세 무리만이 구명뗏목을 쓸 수 있었다. 상대적으로 나은 처지는 이들이었다. 기름에 덮인 바닷물에 머문 시간이 가장 짧았으니까(...). 유독한 기름은 점막을 맹공격해 위장까지 침투했고, 코와 목구멍을 태웠으며, 입안과 식도에 메스꺼움을 일으키고 눈을 충혈시켜 앓게 만들었다. 살길이 될 뗏목을 찾지 못한 불행한 이들은 끊이지 않는 기침에 질식하고, 구토 발작으로 쇠약해지면서 파도에 내던져졌다.

“주변 바다가 새빨갛게 물들었다”… USS 인디애나폴리스호 생존자들의 지옥 같은 5일

참사에서 살아남은 승조원은 316명에 불과했다.

그러나 곧 드러나겠지만, 기름 목욕이 인디애나폴리스호 선원들에게 최악인 것은 아니었다. 구조를 기다리는 시간은 날씨 탓에 갈수록 괴로워졌다. 생존자 중 한 명인 포수 우디 유진 제임스는 이렇게 회고했다.

하루가 지나고 밤이 왔다. 추워졌다. 정말 추웠다. 아침이 되자 해가 떠올라 몸을 녹여주었지만, 금세 뙤약볕이 내리쬐었다. 그러자 우리는 다시 밤이 오기를 기도했다(...). 어떤 이들은 배가 가라앉지 않았다고 우겼다. 수면 바로 아래 있다고. 방금 거기서 물을 마시고 아이스크림을 먹고 왔노라고 했다. 설득당한 이들은 잠수하거나 무리를 떠나더니,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극심한 갈증이 낳은 환각 때문에 일부 선원들은 훈련과 상식을 저버리고 짠 바닷물을 입에 대기 시작했다.

그 결과 그들의 상태는 더욱 악화되었고, 고통 속에서 하나둘 쓰러져갔다. 그러나 생존자들을 기다리는 위협은 그것만이 아니었다…

피로 물든 바다

침몰 이틀째 저녁, 선원들의 상황은 한층 더 절박해졌다. 그때부터 펼쳐진 광경은 마치 공포영화 한 장면 같았다. 배는 운 나쁘게도 상어의 먹이터 위에 가라앉았던 것이다. “수백 마리가 있었다. 조용하고 평온하던 순간 갑자기 누군가 끔찍하게 비명을 질렀다. 상어에게 잡아먹힌 거지.” 우디 유진 제임스는 말했다. 태평양의 바다는 거듭 붉게 물들었고, 그래도 구조대는 오지 않았다.

가장 가까운 육지에서 수백 킬로미터 떨어진 해상에서 나흘 동안 표류한 끝, 생존자 대부분은 이미 세상을 떠난 뒤였다. 물 위에는 기진맥진한 단 316명만 남아 떠 있었다. 그때 구조대가 도착했다 — 공격 자체처럼 우연하게도.

VPB-152 정찰비행대대의 윌버 C. 그윈 중위가 정기 초계 비행 중 바다 위의 기름 얼룩을 발견했고, 그곳에는 기력이 다한 수백 명의 선원이 떠 있었다. 그러나 처음에는 그의 보고를 믿지 않으려 했다(오늘날까지도 이유가 밝혀지지 않았지만, USS 인디애나폴리스호가 예정대로 필리핀 항구에 도착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마침내 몇 시간 후 카탈리나 수륙양용 비행정이 파견되었지만, 한 번에 실을 수 있는 생존자는 고작 9명이었다. 구조선이 도착하기까지 또 몇 시간이 더 걸렸다.

“주변 바다가 새빨갛게 물들었다”… USS 인디애나폴리스호 생존자들의 지옥 같은 5일

괌 섬에서 구조된 USS 인디애나폴리스호 선원들

결국 순양함의 침몰에서 316명의 승조원(함장 포함)이 살아남았다. 대피 지휘의 실책과 지그재그 항법 미이행 등을 이유로 함장 찰스 버틀러 맥베이는 군사법정에 세워져 유죄 판결까지 받았으나, 훗날 사면되었다(그러나 이 사건은 그의 정신에 깊은 상처를 남겼다. 죄책감에 시달리던 그는 1968년 스스로 생을 끝냈다). 수십 년 후 이 배의 불운한 최후는 대중문화에 영감을 주었다. 영화 《죠스》에서 상어 사냥꾼 퀸트의 상징적인 독백에 등장했고, 2016년에는 니콜라스 케이지가 맥베이 함장 역을 맡은 영화 《USS 인디애나폴리스: 맨 오브 커리지(USS Indianapolis: Men of Courage)》가 극장 개봉했다. 2017년에는 순양함의 잔해가 심해에서 발견되면서 선원들의 비극에 대한 관심이 다시금 일기도 했다.

USS 인디애나폴리스호 사건은 수많은 논란을 낳았다 — 하지만 그것은 주로 미 해군 지휘부와 희생자 가족들 사이의 문제였다. 늦어진 구조 작전이 시작되고 사흘 후, 세계는 생존자들의 공포를 잊었다. 모든 시선이 히로시마로 향했다. 8월 6일, B-29 폭격기 ‘에놀라 게이’가 인류 최초의 원자폭탄을 투하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