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의 결말은 이미 예정되어 있었다. 제3제국은 처참한 패배를 맞이했고, 6년간의 잔혹한 점령 끝에 폴란드는 마침내 해방되었다. 그러나 조국을 되찾은 사람들에게 남은 것은 기쁨만이 아니었다. 억누를 길 없는 복수욕이 그들 안에서 끓어오르고 있었다. 살인, 강제 노동, 비인간적인 대우, 약탈, 성폭행… 이것이 폴란드인들이 독일인에게 '갚아준' 방식이었다.
전선은 폴란드 영토를 가로질러 진격하며 나치 군대를 그들이 왔던 방향으로 몰아내고 있었다. 하지만 모든 독일인이 떠난 것은 아니었다. 많은 가족들이 이전에 정착했던 집에 그대로 남아 있었지만, 그들이 기다린 병사들의 귀환은 영원히 오지 않았다. 피오트르 피틀라코프스키(Piotr Pytlakowski)는 저서 『그들의 어머니, 우리의 아버지: 전후 폴란드의 불편한 역사』에서 해방 직후 독일인들이 겪은 마지막 나날들을 이렇게 묘사한다.
복수란 달콤할 수 있다. 거의 6년에 걸친 점령과 유럽을 뒤덮은 피의 강물 앞에서 승자들이 너그러움을 보일 것이라 기대하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그들은 자비를 베풀지 않았고, 우리 또한 자비를 받지 못할 것이다. 이것은 잔혹한 정의다. 여기에 미묘한 여지는 없다. 독일인은 독일인일 뿐이다. 늙은이든, 임산부든, 아이든 상관없다. 일단 움직이기 시작하면 복수의 기계는 평등하게, 그리고 무자비하게 모든 것을 갈아뜯는다.
사회적 동의 아래의 폭력
침략자를 몰아내는 일은 개인이 입은 피해에 대한 보복 그 이상이었다. '짐승을 죽여라'는 구호는 하나의 사회적 행위, 새로운 현실 속에서 다시 태어난 국가의 사명이 되었다. 언론은 여기에 기름을 부었다. 피틀라코프스키는 이렇게 전한다.
소위 '회수된 영토'에서는 현지 주민에 대한 테러가 정당화되어야 했다. 단순한 복수가 아니라 역사적 필연이라는 명분이 필요했다. 1945년 2월, 폴란드 노동자당 기관지 『트리부나 실롱스카(Trybuna Śląska)』는 이렇게 썼다.
"우리 실레시아인들은 먼저 우리 집안을 청소해야 한다. 실레시아는 폴란드의 땅이 되어야 한다. 게슈타포, 친위대(SS), 짝하이트디엔스트(SD), 베르크슈츠를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 우리는 안다. […] 우리는 그들에게 무자비할 것이다. 오늘날 흰색과 붉은색 완장을 열심히 두른, 독일 처형자들의 폴란드인 앞잡이들을 어떻게 할지도 우리는 안다. 파충류들을 은신처에서 끌어내어 나치 쓰레기를 뿌리 뽑을 것이다!"
▲ 독일 주민들에게 발급된 추방 통지문. 하부 실레시아의 슈차브노즈드로이(Szczawno Zdrój) 지역.
이처럼 부정적으로만 그려진 독일인의 이미지는 오랫동안 폴란드 사회의 의식 속에 각인되었다. 서쪽 국경 너머의 이웃에 대한 비난거리만이 부각되었고, 튜턴 기사단의 오래된 역사마저 다시 소환되었다.
동시에 정체성이 분명하지 않은 토착 주민들, 즉 마주리인, 실레시아인, 슬로빈치인, 카슈비인들에게도 화살이 날아들었다. 왜였을까? 동부 변경 지역(크레시)에서 이주해 온 대규모 인구가 살 곳을 찾으면서 최근의 점령자들을 '공식적으로' 쉽게 내쫓을 수 있었던 반면, 폴란드와 독일 사이 경계에 선 이 가족들은 그럴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을 향한 공격은 더욱 거셌다. 『그들의 어머니, 우리의 아버지』에는 이런 대목이 나온다.
그들은 저주와 위협, 몽둥이와 도끼를 들고 마주리인들을 잘 지어진 농장에서 내쫓고 그 자리에 스며들었다. 식량과 산 가축, 도축된 가축을 모조리 가져갔다. 그들은 그들을 때리고 학대했다. 재산을 차지하기 위해 수많은 마주리 남녀가 살해당하거나 중상을 입었다. 많은 폴란드인들이 그들의 집을 헐어 벽돌, 기와, 문, 마루, 목재, 말, 소, 오토바이, 농기계, 마차와 마구를 폴란드 본토로 실어 날랐다. 국경 마을 일부는 통째로 사라졌다. 관리들과 민병대도 이 불법적인 짓에 한몫했다.
패자들의 행진
소련군이 지나간 직후의 며칠, 몇 주가 가장 혹독했다. '추방', '이주 작전', '독일 민족의 이주'라고 불린 이 과정에서 모든 이들이 절대적인 테러 속에 쫓겨났다. 피틀라코프스키는 이렇게 보고한다.
새로운 폴란드 국경 안에 남은 독일인 주민들은 분리 수용되거나 강제 노동 수용소에 갇혔고, 추방당했다. 포고령에 따라 독일인들은 법적 보호 밖의 존재가 되었고, 재산은 몰수되었으며, 린치가 자행되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의 원칙이 지배했다. 다만 보복의 희생자들은 실제 죄가 아니라 출신에 따라 무작위로 골라졌다.
수 시간에 걸친 행진 속에서 서쪽을 향해 걷는 사람들은 생계 수단 하나 없이 하나둘 쓰러져 갔다. 러시아인들은 선별을 실시했고, 일부는 반대 방향으로 끌려갔다. 당시 여섯 살이었던 헬가 쿤카(Helga Kunka)가 수년 뒤에 들려준 이야기는 그 사건들의 끔찍한 단면을 보여준다.
▲ 본문은 리비스(Rebis) 출판사에서 간행된 피오트르 피틀라코프스키의 저서 『그들의 어머니, 우리의 아버지: 전후 폴란드의 불편한 역사』를 바탕으로 한다.
소녀는 회상했다. 그녀는 어머니, 남동생과 함께 피난민 무리와 더불어 헛간에서 하룻밤을 묵었다. 기온이 너무 낮아 일부는 얼어 죽었다. 희생자 중에는 그녀의 어린 남동생도 있었다. 동생은 어머니의 품에 안겨 잠들었지만 아침이 되어도 깨어나지 않았다. 모두 열몇 구의 시신이 확인되었는데, 대부분이 아이들이었다. 그리고 부모들이 울부짖기 시작하자, 러시아인들이 총알을 장전한 채 건물 안으로 들이닥쳤다.
긴 방황의 나날 동안 독일인들을 죽인 것은 혹한만이 아니었다. 질병과 기아, 그리고 복수에 굶주린 폴란드인들도 그들을 덮쳤다. 포메라니아의 한 마을 주민이었던 안나 킨토프(Anna Kientopf)는 이렇게 증언한다.
네 명의 폴란드 군인이 부모에게 매달리던 젊은 처녀를 떼어내려 했다. 폴란드인들은 총개머리로 내 부모를 때렸다. 특히 아버지가 심하게 맞았다. 아버지가 비틀거리자 그들은 그를 길 건너편으로, 둑 아래로 밀어붙였다. 아버지가 넘어지자 그중 한 명이 기관단총을 들고 점사를 쏘았다. 잠시 정적이 흘렀고, 이내 두 여인의 비명이 하늘을 찔렀다. 여인들이 죽어가는 남편에게 달려가는 사이, 네 명의 폴란드인은 숲속으로 사라졌다.
이런 장면은 종전 무렵 폴란드 전역에서 일상적으로 벌어졌다. 그럼에도 추방당한 이들은 강제 노동에 동원되거나 살인 구덩이에 처형된 동포들에 비하면 여전히 운이 좋은 편이라 말할 수 있었다. 슬픈 진실은 이것이다. 종전 무렵과 그 직후, 나치의 폭력 기계만큼이나 잔혹하되 방향만 뒤집힌 기계 하나가 폴란드를 휩쓸었다. 사면이나 이해, 정당한 사유 따위는 논외였다. 복수는 맹인이었으니까…
출처
본문은 리비스(Rebis) 출판사에서 출간된 피오트르 피틀라코프스키(Piotr Pytlakowski)의 저서 『그들의 어머니, 우리의 아버지: 전후 폴란드의 불편한 역사』를 바탕으로 작성되었다. 이 책은 제2차 세계 대전 말기 폴란드 땅에서 독일인 가족들이 겪은 운명을 다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