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이야기

주치의이자 환자가 된 남자, 눈보라 몰아치는 남극에서 스스로 맹장 수술을 감행한 외과의사

레오니드 로고조프(Leonid Rogozov)의 자기수술은 전 세계적인 센세이션을 불러일으켰습니다. 고작 두 주 전에 세계는 유리 가가린의 우주 비행 소식으로 들썩였는데, 이어진 이 위업은 소련 국민들에게 커다란 자부심을 안겨주었습니다. 냉전 경쟁에서 미국을 또다시 앞질렀으니까요. 게다가 사람들이 젊은 의사를 더욱 존경하게 된 데에는 다른 이유도 있었습니다. 그의 인생이 결코 행운에만 기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험난했던 인생

'료냐'라는 애칭으로 불린 레오니드는 1934년 바이칼 호 근처의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는 운전기사였고 어머니는 낙농장에서 일했으며, 가족의 형편은 가난했습니다. 로고조프 가족에게 상황이 거의 비극으로 치달은 것은 쿨라크(부농)로 몰려 알마아타로 강제 이주당했을 때였습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이 처벌은 굶주림에 의한 죽음을 의미했지만, 훗날 외과의사가 될 아이의 가족은 살아남았을 뿐만 아니라 고향으로 돌아오는 데까지 성공합니다.

소년에게는 위로 형과 누나가 있었고, 시간이 지나 여동생 발렌티나(발랴)가 태어나자 그녀를 돌보는 일 역시 레오니드의 몫이었습니다. 대조국전쟁(독소전쟁)이 발발하자 아버지는 전선으로 나갔고 1943년 목숨을 잃었습니다. 어머니는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하루 종일 일터에 나가 있었고, 집안일과 동생을 돌보는 책임은 어린 레오니드의 어깨에 지워졌습니다.

주치의이자 환자가 된 남자, 눈보라 몰아치는 남극에서 스스로 맹장 수술을 감행한 외과의사

전쟁이 끝난 후 소년은 7년제 학교를 졸업하고 광부 기술을 익히는 직업학교에 진학했습니다. 이 일에 큰 흥미가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직업학교는 숙식과 장학금을 제공해 어머니의 짐을 덜어줄 수 있었습니다. 여동생 발랴가 훗날 회상하기로는, 형은 현실적인 판단으로 진로를 선택했음에도 공부에 온 신경을 기울였고 성적은 오직 최고 등급뿐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레오니드는 더 큰 꿈을 품고 있었습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군 복무를 마친 뒤, 레닌그라드에 사는 형을 찾아갔습니다. 네바 강변의 도시는 료냐의 마음을 사로잡았고, 그는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기로 결심합니다.

모험에 대한 갈망

로고조프는 현지 의학 아카데미의 학생이 되었고,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뒤 박사학위 논문 준비에 착수했습니다. 하지만 병원이나 진료소에서의 평범한 일상은 그가 원하는 삶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그의 머릿속에는 언제나 짜릿한 사건과 모험으로 가득한 삶이 그려져 있었습니다.

1960년 여름, 소련 남극 탐사대가 의사를 찾고 있다는 소식이 레오니드에게 닿았습니다. 그는 즉시 자원했고, 가을이 되자 남극으로 향했습니다. 어머니는 아들의 뜻을 이해하고 축복을 보내주었습니다.

레오니드의 짐에는 책이 가득 담겼고, 그리고 무려 32kg짜리 역기도 함께였습니다. 남극으로 향하는 길목마다 그는 가족에게 엽서를 보내 무사함을 알리고 여행의 감회를 나누었습니다.

주치의이자 환자가 된 남자

남극에서 의사는 탐사대원들의 건강을 책임졌습니다. 그런데 1961년 4월 29일, 도움이 필요한 사람은 의사 자신이 되고 말았습니다. 오른쪽 아랫배에 통증이 밀려왔고 열이 오르며 구역질이 따랐습니다. 진단은 명백했습니다. 급성 맹장염(충수염)이었습니다. 로고조프는 아무도 구하러 올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밖에는 항공기 운항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맹렬한 눈보라가 몰아치고 있었으니까요. 염증을 가라앉히기 위해 항생제를 복용하고 배에 차가운 것을 대보았지만 모두 허사였습니다. 수술만이 남은 길이었습니다.

주치의이자 환자가 된 남자, 눈보라 몰아치는 남극에서 스스로 맹장 수술을 감행한 외과의사

노보라자렙스카야 남극 관측기지(사진)에서 자신에게 수술을 집행하는 유일한 의사, 로고조프

기지에는 다른 의사도, 의학 교육을 받은 사람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로고조프는 동료들에게 간단한 훈련을 시키기로 했습니다. 기상학자 알렉산드르 아르테미예프는 수술 기구를 건네는 역할을, 정비공 지노비 테플린스키는 조명을 담당했고, 기지장 블라디슬라프 게르보비치는 동료 중 누군가 충격으로 의식을 잃을 경우에 대비했습니다.

레오니드는 기구를 철저히 소독했지만, 손끝의 감각을 잃지 않기 위해 장갑 없이 수술하기로 결정했습니다. 복강이 가슴에 가려져 눈으로 확인할 수 없었기 때문에, 로고조프는 촉감과 해부학 지식에 전적으로 의존해야 했습니다. 수술 내내 그는 다리를 30도 각도로 든 반쯤 기대앉은 자세를 취했습니다.

치료는 1961년 4월 30일 모스크바 시간으로 밤 10시에 시작되었습니다. 조수들은 흰 가운을 입었습니다. 레오니드는 스스로 마취제를 투여했고, 마취가 든 밤 10시 15분 메스를 들어 12cm 절개를 가했습니다. 그러자 동료들은 쓰러질 듯한 기색을 보였습니다. 겁에 질린 동료들을 진정시키기 위해 로고조프는 농담을 던지며 웃어 보였습니다. 그리고 훗날 그가 회상했듯이, 주변을 완전히 차단한 채 수술에만 온 정신을 집중했습니다.

밤 10시 30분, 어지럼증과 무력감이 밀려왔습니다. 그는 30초간 휴식을 취한 뒤 다시 수술을 이어갔습니다. 부어오른 충수를 제거하고 봉합을 마쳤을 때는 자정이 넘어 있었고, 그는 항생제 주사와 수면제를 맞고 잠들었습니다. 며칠 후 열이 내렸고, 수술이 성공했다는 사실이 분명해졌습니다.

명성의 무게

로고조프의 위업은 세계적인 화제가 되었습니다. 1962년 남극에서 레닌그라드로 돌아왔을 때, 시 당국은 그에게 두 개의 방을 가진 아파트를 내주었습니다. 수천 명의 여성들이 사랑과 존경을 고백하는 편지를 보내왔고, 레오니드는 편지 자루를 받을 만큼 뜨거운 인기를 누렸습니다. 그중 체코슬로바키아 출신의 여성 마르첼라와 가까워졌고, 두 사람의 인연은 결혼으로 이어집니다.

이후 그는 레닌그라드의 과학연구소에서 연구 경력을 이어갔습니다. 그 유명한 수술에서 사용된 기구들은 네바 강변 도시의 북극·남극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습니다. 위대한 의사이자 과학자였던 로고조프는 2000년 위암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