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엔키에비치의 상상 속 인물일까?
소설 '삼부작'과 영상 매체를 통해 널리 알려진 아시아 투하이베요비치(Azja Tuhajbejowicz)는 과연 헨리크 시엔키에비치가 만들어낸 순수한 허구일까? 결론부터 말하면 전혀 그렇지 않다. 물론 잔혹한 배신자의 원형이 된 실존 인물은 소설처럼 '꿰뚫린 가슴에 푸른빛'을 띠지 않았지만, 그의 일대기 역시 소설 못지않게 흥미진진했다.
소설 속 아시아는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에 살며 연방군에서 복무하는 타타르족, 이른바 립카(Lipka) 타타르의 반란을 이끄는 지도자가 된다. 동시에 그는 유명한 크림 군사령관 투가이 베이(Tugay Bey)의 아들이자, 폴란드 귀족에게 거두어져 자라난 인물이기도 하다. 그의 행동은 주로 명예와 영광에 대한 갈망, 채찍질을 아끼지 않았던 폴란드인 '보호자'에 대한 복수심, 그리고 바르바라 볼로디요프스카(Barbara Wołodyjowska)에 대한 사랑에 이끌린다.

영화 '판 볼로디요프스키'에서 다니엘 올브리히스키가 연기한 아시아 투하이베요비치.
실제로 1671년과 1672년이 바뀌는 무렵 오스만 제국 진영으로 넘어간 타타르 부대의 선두에 섰던 인물은 알렉산데르 크리친스키(Aleksander Kryczyński)였으며, 시엔키에비치의 소설에도 그는 반란 지휘관 중 한 명으로 언급된다. 그의 조상들은 15세기 초 리투아니아에 정착했고, 1720년대에는 볼히니아로 이주했다. 그렇다면 크리친스키는 과연 아시아 투하이베요비치와 얼마나 닮았을까?

율리우시 코사크의 그림. 알렉산데르 크리친스키는 이런 전투에 여러 차례 참전했다. 물론 항상 같은 편은 아니었다.
영웅에서…
두 사람 모두 뛰어난 군인이었다. 크리친스키는 1654년부터 왕립군(크라운군)에서 자신이 이끄는 타타르 기병대의 대장으로 복무했다. 우크라이나에서 흐멜니츠키 반군과 싸웠고, 1655년에는 모스크바군의 침공에 맞섰다. 그루데크 전투에서는 왕관 대헤트만 스타니스와프 레베라 포토츠키를 죽음의 위기에서 구해냈다. 당시 목격자는 그가 '모스코바 기병을 말에서 떨어뜨렸다'고 기록하기도 했다.
이후 몇 년간 그는 스테판 차르니에츠키 휘하에서 스웨덴군과 싸웠고, 1660년에는 추드노프와 슬로보디슈체 근교에서 모스코바군 및 코사크와 교전하다 중상을 입었다. 1665년과 1666년에는 루보미르스키 반군과, 1667년과 1671년에는 타타르의 침입에 맞서 싸웠다. 전쟁과 전쟁 사이에는 볼히니아의 이웃들과 격렬한 분쟁을 벌였는데, 어떤 때는 법정에서, 또 어떤 때는 타타르 부하들의 도움을 받아 칼을 들고 싸우기도 했다.
…배신자까지
립카 반란의 원인은 여러 가지였다. 1667년 세임(국회)은 그들의 공로를 외면하고 밀린 급여 지급을 거부했다. 이후에도 충성스러운 복무에 대한 보수는 제대로 지급되지 않았다. 기병대 규모가 대폭 축소되면서 일부 병사들은 생계 수단마저 잃었다. 여기에 모스크 건축과 개보수가 금지되었는데, 특히 1655년 이후에야 타타르 정착이 본격화된 왕관령에서 이 조치는 깊은 상처로 남았다.
국왕은 크리친스키에게 볼히니아의 체체니오브체 마을에 대한 세습 소유권을 약속했지만, 세임이 이를 승인하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1672년 폴란드-오스만 전쟁이 불가피해졌다는 것이 분명해지자, 독실한 무슬림이었던 크리친스키는 술탄 진영에 합류하기로 결심하고 수많은 타타르 부대까지 함께 끌고 갔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포들라스크 지방 크루시냐니의 모스크. 립카 타타르가 연방 복무로 복귀한 뒤 소비에스키 왕이 하사한 마을 중 하나다.
한편 라슈코프를 비롯한 변경 거주지가 불탄 일은 없었다. 립카 타타르들은 단순히 겨울 거처를 떠나 가족들과 함께 적진에 합류했을 뿐이다. 그 수는 2천에서 4천 명에 달했다. 주목할 점은 리투아니아 타타르들은 끝까지 연방에 충성을 지켰으며, 그들의 부대는 호틴 전투 등에서 폴란드 측으로 참전했다는 사실이다.
영예, 질투, 그리고 죽음
립카 타타르들은 전장을 잘 알고 있었기에 오스만군에게 정찰병, 안내인, 통역관으로서 값진 공헌을 했다. 그들은 종종 옛 전우들과 소규모 접전을 벌였고, 루텐니아 지역 주민들을 무자비하게 약탈했다. 19세기 역사가 율리안 바르토셰비치가 기록했듯이 '그들의 복장과 말투만으로는 폴란드식 옷을 입은 타타르인지 알아볼 수 없었다'. 그들은 이 점을 여러 차례 악용해 폴란드 부대 행세를 하며 기습당하는 마을과 도시의 주민들을 현혹했다.
크리친스키는 초기 성공 이후 갈수록 제멋대로 행동했다. 그는 자신만의 하렘을 꾸렸고, 1673년 7월에는 술탄의 임명장을 받아 바르 요새의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앞으로의 출세길이 열려 있었지만, 커져가는 그의 지위는 다른 타타르 지휘관들의 질투를 샀다. 폴란드 문화에 동화되어 거의 귀족적인 자유에 익숙해진 립카 타타르들은 오스만의 통치에 빠르게 환멸을 느꼈다. 1673년 10월 13일, 폴란드군이 바르로 접근하자 폴란드 진영으로의 복귀를 원하던 무리가 상관을 포위해 살해했다.
립카의 지도자는 아시아처럼 유일한 눈을 드릴로 뚫린 채 말뚝에 꿰여 죽지 않았다. 아주 단순하게도 창에 꿰뚫려 목숨을 잃었을 뿐이다. 립카 타타르들은 곧 사면을 받고 다시 폴란드군에서 복무했으며,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이 존속하는 마지막 순간까지 그 충성을 지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