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이야기

제2차 세계대전, 런던으로 피신한 망명 정부는 모두 몇 개였을까?

런던, '작은 유럽'이 되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런던은 '작은 유럽(Little Europe)'이라 불렸습니다. 히틀러의 승리 행진을 멀리서만 지켜볼 수밖에 없었던 정부와 통치자들이 영국 본토로 얼마나 많이 피신했는지는 믿기 어려울 정도입니다. 점령자에 맞선 공동 전선을 펼치기는커녕, 그들 가운데 상당수는 부끄러운 파벌 싸움과 오만함을 드러냈습니다. 물론 모두가 그랬던 것은 아닙니다.

고국 네덜란드에서 점령군의 실체를 가까이 목격한 저항 운동가 에릭 하젤허프 로엘프제마(Erik Hazelhoff Roelfzema)는 영국에 도착한 뒤 런던으로 피신한 망명 정부들의 작태에 경악했습니다. 그는 잉글랜드 수도의 온실 같은 분위기 속에서 사적 원한과 정치적 계산을 품은 사람들에 의해 음모가 독버섯처럼 우후죽순 자라났다고 직접적으로 평했습니다.

모국에서 패배의 굴욕을 겪고 도피할 수밖에 없었던 정부일수록, 타지에서 더욱 쉽게 그 상처를 드러내며 자기 진영 안에서 피 터지게 싸웠습니다.

『희망의 섬(Last Hope Island)』의 저자 린 올슨(Lynne Olson)은 하젤허프 로엘프제마가 고국 관료들을 만난 것이 마치 '찬물 샤워'를 맞은 듯했다며, 그가 남긴 말을 인용합니다.

"그들은 직위와 월급, 승진과 연봉 인상의 세계에 살고 있었습니다. 15개월간 점령 생활을 견뎌온 우리 피난민에게 그것은, 그들에게 감옥과 총살형이 허구인 것처럼 허무한 환상이나 다름없었습니다."

'뮌헨 콤플렉스', 체코슬로바키아

망명지에서 음모와 권력 다툼에 얽매인 정치인들 외에도, 런던에는 진심으로 활동한 이들이 있었습니다. 에드바르트 베네시(Edvard Beneš)가 바로 그런 인물이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런던으로 피신한 망명 정부는 모두 몇 개였을까?

얼마 전까지 그가 다스리던 체코슬로바키아는 아돌프 히틀러의 첫 번째 희생자였습니다. 1938년 9월 30일 체결된 뮌헨 협정에 따라 프랑스와 영국은 독일이 체코 영토의 40%를 강탈하는 것을 묵인했습니다. 열강들은 퓌러를 달래면 전쟁의 위협을 피할 수 있으리라는 착각에 빠져 있었습니다.

히틀러는 뮌헨 협정 체결 며칠 뒤 베네시에게 대통령직 사임을 강요했고, 그는 결국 국외로 떠났습니다. 그러나 전쟁 발발 소식을 접하자 그는 즉시 런던으로 향해, 자신이 체코슬로바키아의 정당한 지도자이며 자신의 뒤를 이은 정부는 독일의 괴뢰가 된 순간부터 합법성을 상실했다고 주장했습니다.

린 올슨이 강조하듯, 베네시 활동 초기 2년은 때때로 좌절과 굴욕의 연속이었습니다. 얼마 전까지 약탈적인 뮌헨 협정에 서명했던 바로 그 네빌 체임벌린이, 이제는 체코슬로바키아 전 지도자의 태도에 분노를 표했습니다. 베네시는 정치적 망명을 허가받을 수 있지만 단 하나의 조건이 있다는 통보를 받았습니다. 즉, 영국에 머무는 동안 정치에 일절 관여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런던으로 피신한 망명 정부는 모두 몇 개였을까?

그에게 이것은 개인적인 모욕이었습니다. 결국 그는 지위를 인정받았지만, 이때의 굴욕을 결코 잊지 못했습니다.

'심술쟁이이자 오만한 자', 프랑스

샤를 드골(Charles de Gaulle)은 선거로 선출된 적이 한 번도 없음에도, 자신이 싸우는 그리고 패배하지 않은 프랑스의 유일한 지도자라고 주장했습니다. 린 올슨이 지적하듯 영국 정치인들은 그의 오만한 태도를 미워했고, 그가 이끄는 자유 프랑스(Free French) 역시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습니다. 드골의 주변은 온갖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끊임없이 다투되 오직 드골에게만 충성하는, 말 그대로 투기장이었습니다.

윈스턴 처칠 정부의 한 장관이 일기에 이렇게 적었습니다.

"프랑스 망명자들은 서로 물고 물립니다. 그들은 내게 찾아와 다른 모두가 얼마나 끔찍한 인간들인지 이야기하죠."
제2차 세계대전, 런던으로 피신한 망명 정부는 모두 몇 개였을까?

자유 프랑스는 오직 장군에 대한 충성심으로만 결속되어 있었습니다. 비록 그가 다정한 삼촌은 아니었지만요. 차라리 모든 이를, 심지어 자신의 대의를 지지하려는 이들까지도 깔보는 오만하고 심술궂은 인물이라고 평가하는 편이 더 정확했습니다.

드골은 자신에게 합류하려는 이들에게 너무나 가혹했기에 많은 이의 의욕을 꺾어버렸습니다. 프랑스 해군 장교 중 한 명도 자유 프랑스 지도자의 태도에 실망한 뒤 그들을 떠나 프랑스로 돌아가, 레지스탕스 지도부에 합류했습니다.

완강한 여왕, 빌헬미나

영국으로 피신한 네덜란드의 빌헬미나(Wilhelmina) 여왕은 전혀 다른 태도를 보였습니다. 국내에서는 황금 새장 속에 살며 정치에 뚜렷한 영향력이 없었지만, 런던에서는 정부의 고삐를 확고히 쥐었습니다. 이제 그녀는 완전한 권력을 손에 넣었고, 그것을 최대한 활용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런던으로 피신한 망명 정부는 모두 몇 개였을까?

많은 망명 지도자들과 달리 그녀는 겸손했으며, 매우 강경하고 심지어 호전적일 만큼 단호한 태도를 보여 존경을 받았습니다. 네덜란드를 떠나기 전부터 그녀는 퓌러에 대한 생각을 거듭 드러냈고, 제3제국 대표단을 '강도 무리'라 불렀습니다. 불굴의 여왕의 진짜 위상은, 몇몇 비겁한 정치인들이 런던을 떠나 지구 반대편 네덜란드령 동인도로 옮길 것을 권했을 때 뚜렷하게 드러났습니다. 여왕은 격노했습니다.

그녀는 즉각 뒷정리에 나섰습니다. 떠나기를 완강히 거부했고, 독일군의 손에 떨어질 경우 비서관이 자신을 쏘도록 명령했으며, 총리에게는 사임을 강요했습니다.

런던에 머문 빌헬미나는 평범한 네덜란드인들, 특히 조국을 탈출해 영국에 도달한 이들에게 마음을 열었습니다. 그들은 '영국 관광객(English tourists)'이라 불렸습니다. 여왕은 이들을 자주 자택으로 초대해 차를 대접하며, 본국의 민심과 현황을 최대한 파악하려 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런던으로 피신한 망명 정부는 모두 몇 개였을까?

에릭 하젤허프 로엘프제마는 회고록에서, '점령'이나 '비밀 접촉'이라는 말에 전율하며 본국 소식을 읽을 겨를도 없는 정부 관료들과의 만남을 회상했습니다. 한편 여왕은 그를 침착하고 존중하는 태도로 맞이한 뒤, 곧바로 네덜란드 정보부 수장에게 연락을 취했습니다.

한 도시에 밀집한 20여 개국

전쟁 기간 영국 정부는 나라가 적에게 점령된 뒤 런던으로 피신한 수많은 외국 통치자와 정치인들을 상대해야 했습니다. 알바니아, 오스트리아, 벨라루스, 벨기에, 불가리아, 체코슬로바키아, 덴마크, 에티오피아, 에스토니아, 프랑스, 조지아, 그리스, 인도, 한국, 룩셈부르크, 네덜란드, 노르웨이, 이란, 필리핀, 폴란드, 루마니아, 슬로바키아, 스페인, 태국, 우크라이나, 유고슬라비아 등의 망명 정부나 왕실이 영국 수도에 자리 잡았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런던으로 피신한 망명 정부는 모두 몇 개였을까?

이들 나라마다 저마다의 이해관계가 있었고 그것은 끊임없이 충돌했기 때문에, 이 혼돈을 통제하는 일은 거의 불가능해 보였습니다. 그래서 미국은 런던에 무려 두 개의 대사관을 두었습니다. 첫 번째는 미영 관계를 담당하는 해당국 최대·최중요 외교 공관이었고, 두 번째는 그에 비하면 초라한 규모로 망명 정부들과의 관계를 중재하는 역할을 맡았습니다.

그러나 런던의 게임 규칙은 '언클 샘'이 참전한 뒤에야 진짜로 바뀌었습니다. 미국이 전쟁에 개입한 후 망명 정부들은 불안한 추세를 감지하기 시작했습니다. 세계의 미래는 국제 공동체가 아니라 오직 가장 강대한 열강들에 의해서만 결정될 것이라는 사실이 날로 분명해졌습니다. 나머지에게 남겨진 것은 지켜보는 일, 그리고… 다투는 일뿐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