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8년에 자신들의 힘으로 독립을 쟁취했다고 폴란드인들이 믿는 것은 용서할 수 있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 노먼 데이비스(Norman Davies)의 이 말은 옳았습니다. 자유로운 폴란드 건국을 위해 도움을 준 사람들은 누구였을까요? 그리고 우리는 그들의 공헌을 제대로 기억하고 있을까요?
물론 군단병이든 외국 군복을 입고 싸운 병사든, 폴란드인들이 1918년 독립 회복에 기여한 바가 크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습니다. 특히 폴란드인들은 분할 지배국들의 국력을 서로 소진시키는 데 확실하게 일조했습니다.
하지만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진정한 평화의 조건은 승전국, 즉 서방 민주주의 국가들의 대표들이 결정했습니다. 전쟁이 끝나갈 무렵 그들은 폴란드 독립 문제라는 난제와 직면했고, 폴란드의 노력을 지지한 몇몇 정치가와 군인이 없었다면 역사는 완전히 다른 길을 걸었을지도 모릅니다. 과연 그 누구일까요?

5. 에이드리언 카튼 드 위아르 경(Sir Adrian Carton de Wiart)
영국의 전쟁 영웅 에이드리언 카튼 드 위아르 장군은 재탄생한 폴란드가 제대로 설 수 있도록 영국 정부의 지원을 이끌어낸 인물입니다.
전후 시기의 영국인들은 폴란드에서 좋은 이미지를 가지고 있지 못합니다. 커즌 경(Lord Curzon)과 그가 긋기로 한 '커즌 선'이 기억되곤 하니까요. 또한 당시 로이드 조지 수상은 특유의 영국식 유머 감각으로 "폴란드에 실레시아를 주는 것은 원숭이에게 손목시계를 주는 격이다"라는 발언을 던지기도 했습니다.
이런 배경 속에서 카튼 드 위아르 경은 상당히 호감 가는 인물로 그려집니다. 전쟁 직후 그는 폴란드 파견 군사 사절단의 일원이 되었지만, 처음에는 자신의 임무가 무엇인지 거의 알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는 스스로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폴란드가 어디에 있는지에 대한 개념도 꽤 흐릿했다. 러시아 근처 어딘가라는 것만 알았지 (...) 게다가 폴란드가 현재 독일, 볼셰비키, 우크라이나, 리투아니아, 체코와 동시에 다섯 개의 전쟁을 치르고 있다는 것도 나중에야 알게 되었다."

1919년, 카튼 드 위아르 장군은 연합국 사절단과 함께 리비우에 머물렀습니다.
하지만 그 무지는 빠르게 호애심으로 바뀌었습니다. 1918년 가을, 그는 영국과 폴란드 사령부 사이의 연락관이 되며 이를 증명했습니다. 그는 폴란드인들에게 매우 우호적인 방식으로 임무를 수행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정부에 물적 지원을 요청했고, 헝가리에서 폴란드인들의 전투 준비를 조직했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폴란드에 적대적인 체코 영토를 통과하는 수송까지 허용했다는 점입니다. 나아가 그는 폴란드를 너무나 사랑해서 임무를 마친 후 포레시에(Polesie)에 정착했고, 두 차례의 세계대전 사이 기간 내내 폴란드에 머물렀습니다.

4. 페르디난 포슈(Ferdinand Foch) 원수
포슈 장군이 없었다면 전쟁의 운명은 완전히 달라졌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폴란드는 독립을 되찾았을까요?
제1차 세계대전 동안 포슈는 프랑스 참모총장을 지냈으며, 1918년 3월부터는 연합군 총사령관이 되었습니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던 그는 강한 의지와 용기를 갖춘 인물로, 큰 손실을 감수하는 일에도 주저 없이 책임을 짊어졌습니다. 1918년 봄, 그는 독일군의 마지막 공세를 이렇게 막아냈습니다. "땅 한 치도 내주지 마라." 그는 공격자들에게 강경히 맞섰습니다.
포슈 원수는 폴란드에 대한 우호적인 감정을 숨기지 않았는데, 아마도 그것은 독일에 대한 타협 없는 입장과 연결되어 있었을 것입니다. 우리가 그에게 빚진 것 중 하나는 바로 대폴란드 봉기(Wielkopolska Uprising)의 성공입니다. 오직 그의 결연한 태도, 즉 군사 작전 재개 가능성을 시사한 것만이 1919년 봄 독일군에 의한 폴란드 봉기 진압을 막을 수 있었습니다.

1923년, 포슈는 폴란드를 방문해 열광적인 환영을 받았습니다. 비르투티 밀리타리(Virtuti Militari) 십자장을 수여하기 직전, 유제프 피우수츠키(Józef Piłsudski)는 그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한 명의 군인으로서, 나는 당신이 그토록 막중한 책임을 짊어진 어깨로 해내 놀라운 업적에 감탄하고 또 감탄했습니다."
3. 조르주 클레망소(Georges Clemenceau)
훌륭한 웅변가였던 이 프랑스 정치인은 신랄한 유머로 유명했습니다. 정치 계획을 철저하게 추진한다는 이유로 '호랑이(Tiger)'라 불렸고, 정적들을 언론에서 거의 잔인할 정도로 몰아붙였으며, 필요하다고 판단되면 검이나 권총을 이용한 결투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처음 총리가 되기 전까지 그는 무려 열 번의 내각을 무너뜨린 인물이었습니다. 1917년 11월, 프랑스가 붕괴 직전에 몰려 있을 때 그는 두 번째로 총리 자리에 올랐습니다.

프랑스의 클레망소 총리는 폴란드인에 대한 동정심으로 움직였을지는 모르겠지만, 그의 독일 혐오는 우리에게 매우 이로웠습니다.
클레망소는 영국과 이탈리아의 총리, 미국 대통령과 함께 베르사유 조약의 공동 설계자였습니다. 그리고 폴란드인들은 그를 믿고 기대할 수 있었습니다.
비스툴라 강의 나라에 대한 약간의 애정이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솔직히 인정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를 움직인 것은 주로 다른 감정이었다는 점입니다. 그는 강하고 독립적인 폴란드를 찬성했는데, 그 이유는 독일인들을 그토록 미워한 나머지, 동쪽에서 '프러시아(Boches)'를 견제할 강력한 동맹국을 만들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평화 조약 논의 과정에서 클레망소는 강한 폴란드의 건설을 적극적으로 주장했습니다.
2. 에드워드 맨델 하우스(Edward Mandell House) 대령
텍사스 출신의 이 군인은 윌슨 대통령이 가장 신뢰하는 조언자이자 벗이었습니다. 대통령은 두 사람의 관계에 대해 "우리는 너무 많은 일에 완벽하게 공감하고 이해하여 곧 말없이도 서로의 생각을 알아차릴 수 있게 되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하우스는 나의 제2의 인격이다"라고 덧붙였습니다.
하우스는 백악관의 이면 실세였습니다. 어떤 대사는 그를 '차관급 인물'이라고 부르기도 했습니다. 흥미롭게도 그의 군 계급은 명예직에 불과했고, 하우스는 풀타임으로 일하면서도 보수를 받지 않았습니다. 특별한 정치적 야망도 없었는데, 아마도 거대한 유산을 물려받아 표를 구하거나 생계를 걱정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부자를 누가 막겠습니까?

에드워드 맨델 하우스 대령은 윌슨 대통령의 가장 가까운 측근 중 한 명이었으며, 폴란드 독립 문제를 지지하도록 대통령을 부추긴 인물입니다.
1915년 11월 12일, 파데레프스키(Paderewski)는 하우스를 찾아가 폴란드 문제에 대한 지지를 설득했습니다. 대령이야말로 그 아이디어를 윌슨 대통령에게 '판매'한 핵심 인물이었고, 이윽고 폴란드 문제는 진행 중인 분쟁에서 미국의 우선 과제 중 하나로 자리 잡았습니다.
베르사유 회의에서는, A. 스콧 버그(A. Scott Berg)가 저서 『윌슨(Wilson)』에서 인정했듯이, "미국 대표단은 특히 폴란드를 기억했으며, 그것을 재건될 유럽의 초석으로 여겼습니다." 단순한 동정심만은 아니었습니다. 현실적 판단도 독립을 지지했습니다. "폴란드는 독일과 러시아 사이의 가장 중요한 완충지대이자, 서유럽을 공산주의로부터 지키는 방파제였기 때문입니다."

1. 우드로 윌슨(Woodrow Wilson)
미국이 전쟁에 참전하기 전부터 윌슨은 독립된 폴란드가 항구적인 평화의 조건 중 하나라고 강조했습니다.
우드로 윌슨의 두 번의 대통령 임기는 제1차 세계대전 기간과 겹쳤습니다. 처음에 미국은 중립을 유지했고, 주로 연합국 쪽에 제공된 대출과 물자를 통해 오히려 부를 축적하기도 했습니다. 마침내 전쟁에 참전했을 때, 대통령은 아름답고 민주적인 신념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우리에게는 이루고자 하는 이기적인 목표가 없습니다. 우리는 지배도, 정복도 원하지 않습니다." 그는 의회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전후 한 영국 외교관은 이렇게 평했습니다. "윌슨은 [전쟁 중인 유럽에] 역사상 누구도 가지지 못한 힘, 즉 위대한 이상과 함께 나타났다."

윌슨은 파리에서 만장일치의 예우를 받았습니다. 사진은 프랑스의 레몽 푸앵카레 대통령과 함께한 모습입니다.
독일에 선전포고하기 전부터 윌슨은 미래 평화의 원칙들을 구체화하고 있었습니다. "폴란드, 군비, 공해상 자유" — 1917년 1월 의회에 제시된 개념들을 대통령의 전기 작가이자 『윌슨』의 저자인 A. 스콧 버그는 이렇게 요약했습니다. 그러나 폴란드 문제에 진짜 중요한 순간은 1918년 1월 8일이었습니다. 이날 대통령은 의회 연설에서 14개 조항으로 구성된 평화 구상을 발표했고, 제13항은 바다로 통하는 출구를 가진 독립 폴란드의 재건 필요성에 할애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이런 폴란드에 대한 호의는 어디서 왔을까요? 그것은 폴란드계 유권자들 덕분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이그나치 얀 파데레프스키(Ignacy Jan Paderewski)의 개인적 매력 덕분이기도 합니다. 비공개 대화에서 그는 대통령과 그의 참모들에게 폴란드의 독립 회복이 가치 있는 일임을 설득했습니다. "사랑하는 파데레프스키여, 폴란드가 다시 부활하고 다시 존재할 것이라는 점을 나는 당신에게 확언합니다." 미국 대통령은 이 폴란드의 거장에게 그렇게 약속했고, 그리고 그 약속을 지켰습니다.
우드로 윌슨 최초의 폴란드어 전기를 엠피크(Empik)에서 만나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