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년 집권의 끝, 1970년 12월의 붕괴
블라디스와프 고무우카(Władysław Gomułka)는 14년간 폴란드를 통치하며 권력에 깊이 익숙해져 있었다. 그러나 1970년 12월 발트 해안 지역의 노동자 파업이 유혈로 진압되면서 그는 정치 무대에서 밀려나고 말았다. 정치적 은퇴 이후 그의 삶은 과연 어떠했을까?
고무우카가 권력을 잡았을 때는 사회 전체가 더 나은 시대에 대한 큰 기대에 부풀어 있었다. 하지만 집권 말기에는 그를 지지하는 사람이 사회에 거의 남지 않았다. 게다가 당 동료들은 1970년 12월 사태에 대한 정치적 책임을 그에게 물었다. 이로써 고무우카 시대는 완전히 막을 내린 것이다.
권력 상실이 가져온 충격
폴란드 통일노동자당 중앙위원회 제1서기 직위를 잃는 것은 그에게 감당하기 힘든 타격이었다. 심각한 스트레스로 뇌졸중이 올 뻔할 정도였다. 사임 직후 그는 곧바로 병원에 입원했다.
1971년 12월까지 형식적으로는 중앙위원회 위원 신분을 유지했지만 표결권은 없었다. 좌절감에 시달리던 그는 자신의 목소리를 낼 다른 통로를 찾아야 했다. 퇴원 후 고무우카는 당 요인들에게 긴 서한을 보내기 시작했는데, 그 안에서 그는 자신의 정책을 옹호하는 동시에 새 지도부를 날카롭게 비판했다.
당 간부들은 이러한 서신에 짜증을 냈지만, 전 당수를 처벌할 생각은 없었다. 대신 그를 완전히 무시하고, 회담에서조차 그가 권력을 쥐었던 시절을 언급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고무우카를 둘러싼 '침묵의 음모'가 시작된 것이다.
전형적인 은퇴자의 일상
그리하여 전 제1서기는 정치적 은퇴 속에서 비교적 평온한 나날을 보냈다. 1973년에는 당국으로부터 바르샤바 근교 콘스탄친(Konstancin)의 별장을 제공받기도 했다. 그는 생을 마감할 때까지 아내와 함께 그곳에서 살았다.
그의 일상은 전형적인 은퇴자의 모습이었다. 반려견 샤리크(Szarik)와 함께 긴 산책을 즐겼고, 당시 큰 인기를 누리던 TV 드라마 '코브라'를 빠짐없이 시청했다. 손녀들의 학업 성장 과정에도 세심한 관심을 기울였으니, 다정한 할아버지의 모습 그 자체였다.

인기 상실과 주변의 침묵은 고무우카 인생 최대의 비극 중 하나였다. 사진은 '타임'지 표지를 장식한 '비에스와프' 동지(1956년).
식지 않았던 정치 열정
그를 찾는 이들은 주로 오랜 벗이자 정부의 핵심 측근들이었다. 제논 클리슈코(Zenon Kliszko), 이그나치 로가소빈스키(Ignacy Loga-Sowiński) 등이 대표적이다. 정치는 여전히 고무우카의 가장 큰 열정이었다. 그는 매일 신문을 꼼꼼히 읽고 뉴스 프로그램을 놓치지 않았으며, 최신 문서들도 샅샅이 넘겨보았다. 물론 후계자 기에레크(Gierek)를 끊임없이 비판했고, '연대(Solidarność)' 운동의 탄생도 흥미와 불안이 뒤섞인 시선으로 지켜보았다.
가짜 인터뷰 파문
1973년, "나의 14년 — 블라디스와프 고무우카의 고백"이라는 제목의 심층 인터뷰가 유포되어 순식간에 퍼져나갔다. 그러나 이것은 전 제1서기의 실제 발언이 아니라 완전히 조작된 내용이었다. 위조는 아마도 당시 당 요인들이 고무우카의 명예를 실추시키고 자신들에게 유리한 역사 서술을 만들기 위해 저질렀을 가능성이 높다.
고무우카는 이 일을 그냥 넘기지 않았다. 문서 배포의 배후를 규명하기 위해 만날 수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도움을 요청했지만, 어디에서도 외면당했다. 오늘날까지도 이 가짜 인터뷰를 준비한 사람이 누구인지 밝혀지지 않았다.

권력을 잃었지만 빈손으로 돌아간 것은 아니었다. 사진은 은퇴 기간 콘스탄친예조르나에 있던 고무우카의 집.
완성되지 못한 회고록
아마도 이러한 사건들이 하나의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전 제1서기는 자신의 일기를 직접 집필하기 시작했고, 그 안에서 자신의 평생과 주요 정치적 결정들을 꼼꼼히 분석했다. 안타깝게도 기록은 완성되지 못했다. 당 최고직에 오르기도 전인 1945년에서 일기는 끝을 맺는다.
마지막 여정
1980년대 초, 건강 문제가 다시 찾아왔다. '비에스와프' 동지는 폐암 판정을 받았고, 1982년 9월 1일 세상을 떠났다. 향년 77세였다.
고무우카 본인의 유언에 따라 그가 남긴 회고록은 폴란드가 독립을 되찾고, 책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더 이상 정치 무대의 중심에 있지 않게 된 뒤에야 세상에 공개되었다.

1960년대 후반부터 고무우카는 소련과의 '적절한 관계'를 점점 더 강조했다. 사진은 1967년 동독에서 만난 고무우카와 브레즈네프.
죽음 후 다시 빛난 '별'
역설적으로 고무우카의 죽음은 그의 '별'을 다시 한번 빛나게 했다. 당국이 주관한 장례 행사는 그에 대한 존중의 표현이었다. 유해가 담긴 관은 하루 동안 국회의사당 기둥 홀에 안치되었고, 이후 포본츠키(Powązki) 묘지에서 엄숙한 장례식이 거행되었다. 또 다른 당 제1서기였던 보이치에흐 야루젤스키(Wojciech Jaruzelski) 장군이 직접 고인과 작별을 고하기도 했다.
이후 여러 해 동안 '비에스와프' 동지를 기리는 다양한 시도가 등장했다. 1986년에는 루블린에 그의 이름을 딴 대로가 조성되었다. 1000즈워티 지폐에 고무우카의 초상을 새기고, 문화궁전 앞 데필라다 광장을 그의 이름으로 명명하려는 계획도 있었다. 그러나 1991년 루블린의 해당 도로는 새로운 이름인 '루블린 연합 대로'로 바뀌었고, 나머지 구상들도 결국 실현되지 못했다.
오늘날 포본츠키 묘지 한복판, 공로의 거리 꼭대기에 자리한 전 지도자의 석관만이 유명 폴란드인들의 묘비들 사이에 여전히 우뚝 서 있다. 이것이 아마도 '비에스와프' 동지의 전성기를 보여주는 마지막이자 유일한 흔적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