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이야기

피우수츠키는 유대인을 지켜주었을까? 폴란드 제2공화국의 반유대주의와 유대 공동체의 기대

1926년 5월 쿠데타가 일어난 뒤, 유대인 사회에는 "피우수츠키 원수가 유대인이 피해를 입지 않도록 해줄 것"이라는 확신이 퍼져 있었다. 과연 이 믿음은 옳았을까?

실망 속에서 찾은 희망, 술레유효크의 원수

폴란드 제2공화국의 초년은 수많은 이들의 기대를 배신했고, 그중에서도 소수민족이 가장 깊은 실망을 겪었다. 19세기 말부터 국민민주주의(ND)와 가톨릭 교회가 부추겨온 반유대주의는 킬체에서 리다, 핀스크에 이르기까지 포그롬(유대인 학살)의 물결이라는 형태로 결실을 맺었다. 학살은 폴란드군의 행군과 함께 전개되었고, 수백 명이 살해되며 수천 명이 부상을 입었다. 국가가 어느 정도 안정된 이후에도 유대인 공동체에 대한 박해는 끊이지 않았다.

비토스가 이끄는 연립정부의 통치에 대한 환멸은 사회 전반으로 번져갔다. 나루토비치 대통령 암살 사건과 1923년 크라쿠프에서 노동자들에게 발포한 군대의 기억은 여전히 생생했다.

사람들은 그만큼 열렬히 술레유효크로 시선을 돌렸다. 요제프 피우수츠키 원수는 겉보기에 정치적 은퇴 생활을 보내고 있는 듯했지만, 상당수 폴란드인은 그를 시대가 부른 영웅이자 의로운 지도자, 독립 폴란드의 재건자로 여겼다. 우크라이나인들은 볼셰비키와의 전쟁 당시 그가 내세운 연방 구상과 폴란드-우크라이나 동맹을 기억했다. 유대인들에게 원수는 반유대주의에 물들지 않았고 국민민주주의에 맞서 싸운 지도자, 즉 자신들의 수호자였다.

5월 쿠데타, 아니면 실수였나?

비토스가 이끄는 '키엔노피아스트'(Chjeno-Piast) 정부가 또다시 들어서리라는 전망이 참을 수 없는 분노를 자아냈고, 1926년 5월 피우수츠키 원수는 술레유효크를 떠났다. 사실 피우수츠키와 산치야(Sanacja) 진영은 소수민족과의 관계에 대해 전혀 다른 구상을 갖고 있었다. 강제 동화나 게토화가 아니라, 절대적인 충성을 조건으로 더 큰 자유를 제공하는 길이었다.

유대인 사회는 5월 쿠데타를 대체로 안도의 마음으로 받아들였다. 유대계 폴란드인, 폴란드화된 계층, 동화주의자들은 원수를 통해 모든 공동체가 평등하게 대우받고 반유대주의에 맞설 수 있기를 기대했다. 독립투쟁 참전용사들에게 피우수츠키는 국가의 부활자이자 건설자였다. 시오니스트들은 그를 존경했으며, 팔레스티나에서 자국 건설을 위해 싸우던 이들에게 영감의 원천이 되었다. 정통파 유대인들은 피우수츠키를 집권 진영의 흔들림 없는 지도자로 받아들이며, 권력을 위해 기도하라는 종교적 가르침에 따라 그를 신뢰했다.

피우수츠키는 유대인을 지켜주었을까? 폴란드 제2공화국의 반유대주의와 유대 공동체의 기대

요란타 진둘(Jolanta Żyndul)의 저서 『유대인과 피우수츠키: 전간기 폴란드-유대 관계사 자료집』이 최근 유대역사연구소(ŻIH) 출판부를 통해 출간되었다.

반면 사회주의 성향의 분트(Bund)는 훨씬 냉담한 반응을 보였다. 폴란드 사회당(PPS)과 마찬가지로 분트 역시 쿠데타 지지를 "5월의 실수"로 규정했다. 요란타 진둘은 유대역사연구소에서 펴낸 저서 『유대인과 피우수츠키』에서 다음과 같이 적었다.

산치야가 정권을 장악한 뒤 유대인 종교 공동체와 정부 협력 무소속블록(BBWR)(산치야의 정치 대표 조직 — 역자 주) 사이에 특이한 동맹이 형성되었다. 이 동맹은 구라 칼바리아의 차디크(경건한 지도자) 아브라함 모르데차이 알테르의 영향 아래 있던 정통파 정당 아구다트 이스라엘의 지지를 받았으며, 벨즈의 차디크 아론 로케아흐를 중심으로 결집한 마워폴스카 랍비 그룹은 이에 반대했다.

새 의회에 대한 첫 선거는 1928년 봄, 정치적 반대파를 향한 마녀사냥 분위기 속에서 야당 활동 방해와 국가 기구를 동원한 선거 운동이 벌어지는 가운데 치러졌다. 그럼에도 원수에 대한 호감은 크게 흔들리지 않았다. 유대인 사회 역시 BBWR 외에 자신들만의 대표를 세임(폴란드 의회)에 배출했다.

국민들이 원수에게 편지를 쓰다

전간기 동안 피우수츠키는 주로 정통파 유대인과 시오니스트로 구성된 유대계 국민들로부터 수천 통의 편지를 받았다. 요란타 진둘은 이 편지들을 저작에 모았는데, 발신자 중에는 정치 단체와 종교 학교도 포함되어 있었다.

5월 쿠데타 이후 피우수츠키는 일반 국민들의 편지를 처리할 개인 비서를 두었다. 원수는 이 자리를 외무부 공무원이자 시인인 카지미에시 이우와코비치우나(Kazimierz Iłłakowiczówna)에게 맡겼다. 저자가 지적했듯, 유대인들이 피우수츠키를 제2공화국 최고의 정치가로 대한 태도는 곧 폴란드 국가 자체에 대한 그들의 태도를 반영하기도 했다.

피우수츠키는 유대인을 지켜주었을까? 폴란드 제2공화국의 반유대주의와 유대 공동체의 기대

"사랑하고 그리운 할아버지께. 저는 유대인이지만, 당신의 동포들만큼 당신을 사랑합니다." 1935년 원수의 이름날을 맞아 우치의 학생 니우시아 발트마누브나는 이렇게 썼다. "교육자, 지도자, 스승" — 1932년 누메루스 클라우수스(유대인 입학 정원 제한)로 인해 의학부 입학을 거부당했던 모르데차이 그리펠은 원수에게 이렇게 호소했다. "당신은 '모든 재보를 바치며 평생을 민족을 위해 헌신할 그 사랑받는 나라의 아들'이라고 스키르가가 말한 바로 그 분입니다."

기대에 부응했는가?

그렇다면 피우수츠키는 유대인 사회가 걸었던 기대에 부응했을까? 이 질문에 단 하나의 답을 내리기는 어렵다. 1926년 쿠데타부터 1935년 원수가 서거할 때까지의 통치는 개인적 권위에 기반했으며, 동시에 국가가 점진적으로 독재 체제로 기우던 시기이기도 했다. 반유대주의에 깊이 물든 폴란드에서 산치야는 적어도 그때까지는 협력의 공간을 어느 정도 만들어냈다. 유대인 사회에는 피우수츠키가 유대인이 피해를 입지 않도록 하리라는 확신이 있었다. 그러나 원수가 떠나자 반유대주의는 본격적으로 득세했고, 그 기세는 1926년 5월 이전보다 한층 거세졌다.

참고문헌

  • Jolanta Żyndul, 『유대인과 피우수츠키』(Żydzi i Piłsudski), 유대역사연구소 출판부, 2021.